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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l 17. 2021

일 년 내내 여름이라



  어렸을 때 ‘무슨 계절이 제일 좋아?’라는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봄은 포근하고 예뻐서, 여름은 차림이 가벼워서, 가을은 화려한 눈요기가 많아서, 그리고 겨울은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어 좋은데 그중 하나를 고르라니.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내 생일이 있는 겨울! 그렇게 대답하며 살다 보니 실제로 겨울이 좋아졌지요. 줄무늬 목도리를 할까, 술 달린 카키색 목도리를 할까 고르는 재미도 좋았고, 춥다 춥다 얘기하며 두툼한 옷에 파묻혀 종종거리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내 생일날 눈이 오거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기라도 하면 로또에라도 당첨된 듯 꺅 소리를 지르며, 역시 겨울이 최고라고 신나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여름이 제일 좋아요.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이 제일 좋다고요? 덥지 않냐고요? 물론 덥죠. 하지만 덕분에 가벼워지는 옷차림이 좋아요. 포근한 스웨터와 코트, 목도리도 좋지만,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여름이 오면, 두꺼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가벼워져 날개도 없는데 날아갈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요. 입고 벗는 것도 간편하고, 헐렁한 홑겹의 옷을 걸치고 에어컨 바람 밑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면 여기가 천국인가 싶지요.


  물론 가벼운 옷차림은 좋지만 그렇다고 정말 가볍게만 입고 살 수는 없지요. 짧은 반바지에 소매 없는 셔츠, 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는 곳은 집 앞 슈퍼나 되려나. 옷차림은 가벼워져도 주변의 묵직한 시선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으니까요. 때와 장소에 맞춰 갖춰 입어야 할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옷을 입잖아요. 그리고 그 시선은 여름에도 여름답게 옷을 입지 못하게 하잖아요. 게다가 네 몸은 어딘가 부족하다는 광고 역시 어딜 가든 우리를 따라다니며 여름의 가벼운 옷차림을 방해하고요. 완벽한 몸매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철저히 가리라는 메시지는 여름에 유독 힘을 얻어요. 그러니 여름옷차림도 한없이 가벼워질 수만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열대의 나라는 달라요. 어쩌다 보니 나는 일 년 내내 여름인 나라에 살고 있어요. 가벼운 옷차림이 좋아 사는 곳을 옮긴 건 아니지만, 옮기고 보니 좋았고 그래서 알았어요. 내가 여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이에요. 일 년 내내 여름인 나라에서 나는 팔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종종 노브라로 거리를 활보해요. 포근한 겨울 코트가 일 년에 한 번쯤 그립기도 하지만 일 년 내내 간편하게 입고 다니는 기쁨이 더 커요.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아 주변 시선의 밀도도 떨어져요. 그리고 그 시선은 한국보다 훨씬 순해요. 내가 무엇을 입고 다니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그래서 더 자유롭게, 가볍게 입고 다녀요.


  소녀답고 싶은 날에는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끈 원피스를 입고 노란 샌들을 신고 또각또각 걷지요. 씩씩한 커리어 우먼답고 싶을 때는 하늘하늘 시원한 카키색 점프수트를 입고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요. 등이 훌러덩 드러나는 홀터넥 원피스를 입고 친구 집에 놀러 가고, 집 앞 슈퍼에 갈 때는 노브라에 가벼운 조끼를 걸치고 쪼리를 꿰차면 그만이에요. 자전거를 탈 때는 얇은 티셔츠가 가볍게 팔랑이는 느낌이 좋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는 날카로운 바람이 얇은 카디건을 파고드는 느낌이 좋아다. 


  1년 내내 입을 옷이 작은 옷걸이 하나면 충분해요. 옷걸이가 단순해지니 몸과 마음도 단순해져요. 그리고 단순한 마음은 사소한 행복도 잘 찾아내요. 여름밤의 새빨간 노을, 산책길에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 한나절이면 빨래를 바짝 말려주는  뜨거운 햇살까지, 저는 여름 나라에서 사소한 것들에 더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몸은 가볍지만 마음은 충만하게, 그렇게 일 년 내내 여름으로 사는 지금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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