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까요?
그래, 이거지! 이 후덥지근한 공기. 말레이시아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약간 다른, 힌두의 향 냄새가 촘촘히 달라붙어 있는 이 공기. 그립고 그리웠던 바로 이 공기. 코를 벌렁거리며 축축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캐리어를 덜덜덜 끌고 공항 엑시트를 향해 걷는다. 저 문이 열리면 더 무거운 공기가 그물처럼 나를 덮치겠지. 그럼 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마냥 파닥거리고 말 거야.
좋아서.
너무너무 좋아서.
그렇게 파닥파닥 공항 밖으로 나섰다. 여기는 발리! 온몸의 구멍이 활짝 열려 그리웠던 섬의 공기를 깊이 빨아들인다.
아빠 까바르? 잘 지냈어요?
까바르 바익. 잘 지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과 상상의 인사를 하며 우붓을 향해 달린다. 공항에서 우붓까지는 차로 한 시간. 우붓에서 머물 숙소의 이름은 그린 필드. 사방이 초록초록 논이다. 키를 받아 들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널찍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아, 드디어 발리다! 우붓이다!
어라, 어느새 해가 진다. 여행을 떠난다고 무리하게 마감을 하고 오느라 이틀 밤 잠을 설쳤다. 저녁도 먹으러 나가야 하는데 눈꺼풀이 시위를 한다. 에라 모르겠다. 눈을 감고 내일 뭐부터 할까 곰곰이 생각한다.
음, 우선 코코마트부터? 아니, 가장 먼저 갈 곳은 따로 있지. 눈 뜨자마자 내 사랑 무슈 스푼으로 갈 거야. 가서 늘 먹던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을 거야.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가서 종일 앉아 일하던 곳. 내 디지털 노매드 인생의 작업실. 바스락 부서지면서 결결이 찢어지는 크루아상과 맛난 커피. 음, 크루아상 냄새가 막 나는 것 같아. 뒷 정원의 나무는 얼마나 자랐을까? 아, 궁금해 미치겠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커피를 마시고 또 걸을 거야. 아니, 오토바이를 타고 부릉부릉 달릴 거야. 하노만 로드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들, 마사지 샵, 좋아하던 가죽 공방 다 그대로 있겠지? 오, 제발 플리즈. 낯선 모습이지 마. 그리운 모습 그대로 있어줘. 많이 변했으면 어쩌지? 흑, 변심한 애인처럼 뻥 차 버려? 아니, 애걸복걸 매달려야지. 아쉬운 건 난데. 네 새로운 모습도 다 받아들일게. 사랑할게.
자자, 하노만 로드 중간에서 왼쪽으로 꺾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고타마 로드로 갈 거야. 거기에 예쁜 것들이 많거든. 그래서 조심해야 해. 다 사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무사히 고타마 로드를 통과하면 우붓 대로가 나오지. 젤라토를 먹으며 걷다 보면 우붓 왕궁과 우붓 시장이 나올 거야. 그리고 다시 몽키 포레스트 로드로 내려오자. 조금 내려오면 초록 잔디가 깔린 커다란 운동장이 나와. 처음 발리에 여행을 왔을 때 저 운동장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생각했지. 여기서 살아보리라. 남편과 아이를 호텔에 놓고 혼자 나와서 말이야. 결국 살았고 또 떠났네. 거기 가서 추억의 커피를 한 잔 더 마실까? 아니 무슈 스푼에서 이미 마셨잖아. 그렇네! 그럼 점심 메뉴는? 당연히 나시 짬뿌르지! 어디서? 단골집에서? 거긴 좀 멀지 않나? 멀면 어때? 오토바이가 있는데! 그래 좋아! 부릉부릉 윙윙! 짬뿌르 집아, 기다려라, 아리가 간다! 부릉부릉 윙윙~ 어머, 졸린데 노래가 막 나오네. 너무 신이 나서 그런가, 아유 졸려.
쿨..
쿨쿨..
쿨쿨쿨..
.
.
.
.
.
.
꼬끼오!!!
앗, 깜짝이야.
그래! 역시 우붓에선 알람 대신 닭소리지!
아침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코를 킁킁댄다. 어제 오후, 그물처럼 나를 덮쳤던 무거운 공기가 밤새 한껏 가벼워져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다. 어서 나와라 손짓한다. 뜨거운 해, 적당한 구름, 그리고 저 멀리 논에서 불어오는 풀냄새. 아, 좋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아니, 수영을 한 판 하고 갈까?
수영? 아니면 커피랑 크루아상?
그래, 커피 먼저! 수영은 자고로 한낮이지.
자, 그럼 출발!!!!
우붓을 헤집고 다니며 실컷 놀아야지!
이얏호!
꺅! 여러분~~ 저는 지금 발리에 있어요!!
라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이쿠, 실망하셨나요.
에이~ 뻥인 거 다 알고 계셨죠?
이 오미크론 시대에 어느 나라가 국경을 쉽게 열어 주겠습니까. 그냥 희망사항이지요.
그런데!
조만간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
동남아 무격리 입국 기사가 막 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원래 뉴스란 게, 우리 회의 한 번 해볼까? 하면, 야,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 났대! 의 자세로 막 기대를 담아 쓰이기도 하니 다 믿으면 안 되겠지요? 그리고 무격리라고 해도 무비자 협정은 아직 중단 상태라서 예전처럼 아무나 쉽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런 뉴스에 설레발을 치는 나날들입니다. 국경은 열려야 열리는 거고 벌써 김칫국을 드링킹 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심장이 저 혼자 벌렁벌렁 합니다. 드디어 발리에 갈 수 있는 건가! 드디어 다시 하늘을 날아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가! 막 이러면서요.
어쨌든 저는 오토바이를 빌렸고,
무슈 스푼에서 아침을 먹었고,
오줌을 누며 영역을 표시하는 강아지처럼
내가 다시 왔다고 오토바이로 우붓 구석구석을 누비다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포옹을 수십 번쯤 하고,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러 갔고,
발리 맥주 빈땅을 마셨고,
또 편의점에서 싸구려 럼을 사 친구 집으로 가서
별을 보며,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쓸데없는 농담을 하며 새벽까지 놀았지요.
그리고 다음날에는 요가를 하러 갔고,
결국 고타마 로드에서 예쁜 가방을 발견해 참지 못해 사버렸고,
다음날 아침에 무슈 스푼에 또 갔고,
어제 안 가본 길들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그렇게 오래오래 여행을 하다가 돌아왔답니다.
Happily ever after 하게 말이에요.
아니, 그래서 진짜 갔다는 건 아니죠? 상상인 거지요? 라고 묻고 계신가요?
네, 이쯤 되면 저도 헷갈립니다.
계속 행복하게 헷갈려 하고 싶어도, 곧 정신이 차려지지만요.
꿈 깨! 아직 아니야! 하고 말이에요.
자, 여러분은 국경이 열리면 가장 먼저 어디에 가보고 싶나요? 공항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모습이 어떨지 눈을 감고 상상해 보세요! 그게 어디든 그 설렘이 얼마나 클까요? 아니면 여전히 가기 전에 코를 쑥, 도착해서 코를 쑥, 돌아와서 또 쑥, 쑥쑥쑥 찌르느라 성가시기만 할까요? 면봉을 보기만 해도 자지러지는 아이라도 있다면 더더욱? 아이고, 격리는 또 어떻고요.
그렇게 쉽지 않은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네요. 내년 이맘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래, 코를 찌르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이 많은 마스크를 이제 어쩌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조금 더 오래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될까요?
갑자기 우울해지나요? 아니, 우리 그러지 말아요. 이건 살아남기 게임이에요. 가장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불편해도, 그 와중에 가장 즐겁게 잘 사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눈을 감고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는 상상을 하든, 상상 따위 서랍에 넣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현실에 곱게 색을 칠하든, 즐겁게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여러분은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나요?
같이 이겨요. 이 시대를.
괜찮아질 듯하다 다시 나빠지고,
끝나겠지 하다가 다시 절망하고,
간절히 기대했다가 다시 좌절하는 코로나 3년의 시대를,
우리 함께 이겨요.
만세! 하면서요.
저는 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눈을 감고 발리 공항으로 갑니다. 우붓으로 바로 갈 수도 있지만 가는 길에 설렘을 차곡차곡 쌓으려고 일부러 공항으로 갑니다. 그렇게 우붓에 도착해야 제 마음이, 프라이팬에서 다글다글 구르다가 파닥파닥 터지는 팝콘처럼, 빵! 터지거든요. 그 빵 터진 마음에, 사는 동안 여기저기 흩뿌려 놓았던 행복을 주섬주섬 담아 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알뜰살뜰 아껴 야금야금 먹습니다. 다 떨어지면 언제든 눈을 감고 또 가지요. 뉴스는 뻥이고, 하늘길은 여전히 벽창호처럼 막혔어도, 훨훨 날아가는 내 마음은 오롯이 내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