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열정은 어디에 있나요

빛나는 구두를 신고 뜨겁게 원투쓰리

by 아리




오토바이에 앉아 시동을 건다. 희미한 달빛이 고요한 밤, 하늘하늘한 목도리가 바람과 함께 달린다. 낮에 내린 비가 나뭇잎에 맺혀 있다가 스치는 바람에 후두둑 헬멧 위로 떨어진다. 서늘한 바람을 가르며 열대의 밤길을 달리던, 내 생에 가장 뜨거운 시절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솜씨 좋게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안장을 열어 구두를 꺼낸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를 피해 후다닥 계단을 오른다. 건물은 길가에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계곡의 능선을 따라 비밀의 공간처럼 아래층이 나타난다. 아래층 베란다 앞으로 달빛 아래 시커먼 계곡에서 쭉쭉 뻗은 야자나무의 실루엣이 늠름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빨간 구두를 신었다. 구두에 촘촘히 박힌 큐빅이 천장의 둥그런 대나무 등 불빛에 반짝 빛나면 내 마음도 덩달아 환해진다. 젬베와 기타, 건반이 경쾌하게 뽐을 내기 시작하고 얼큰한 가수들의 목소리가 더해지면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홀로 또각또각 걸어간다. 첫 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비르 미 비다 vivir mi vida다. 스페인어로 내 삶을 살겠다는 뜻! 친구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빛나는 구두가 플로어를 누비는 동안 신나는 음악에 맞춰 열대의 하늘로 둥실 떠오르는 것이 마치 내 삶 같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환하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보름달이 풍성해진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는 나를 바라본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 그 둥근달과 그 아래서 환하게 웃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발리 우붓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곳. 어느 날 갑자기 긴 여행을 훌쩍 떠나 터를 잡은 발리의 산속 시골마을 우붓에서 나는 오토바이를 탔고, 논두렁을 걸었고, 요가를 했지만, 무엇보다 춤을 췄다. 흥겨운 라틴음악에 맞춰 살사와 바차타, 키좀바를 추었다. 친구들과 낯선 이들과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신나게 춤을 추었다.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오직 나 자신이 되어 밤마다 음악에 몸을 묻었다. 매일 열대의 선선한 밤공기를 가르며 뜨겁게 춤을 추었다.



원투쓰리, 파이브식스세븐. 일주일에 서너 번, 밤마다 춤을 추러 다니던 날들이었다. 처음에는 물론 어색한 배움의 시기를 거쳤다. 춤이라곤 모르던 내가 춤을 춰보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수많은 머릿속 다짐과 철회를 거치다 결국 마음먹고 최초로 원투쓰리 파이브식스세븐을 중얼거리며 발을 움직이기까지, 어쩌면 우붓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듣던 살사 수업이 곧 일주일에 두 번, 그리고 다시 네 번으로 늘어났고, 종국에는 밤마다 라틴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거의 매일 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있다고 생각했지만, 춤을 출 때마다 언제나 조금씩 더 살아났다. 내내 걸치고 있던 우울도 던져버리고 점점 더 많이 웃었다. 두 발을 질질 끌던 무기력도 떨쳐버리고 예쁜 구두를 신고 가뿐하게 춤을 추었다.


모르겠다. 왜 춤이었는지. 그때 나는 무엇이든 홀딱 빠질 것이 필요했다. 새로운 것이면 더 좋았고. 결국 낯설었지만 오래 동경했던 춤을 선택했다. 아니 어쩌면 춤이 나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춤을 춘다는 생각만 해도 온 몸이 오그라들던 나였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고집스럽게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외쳤다. ‘그래! 한 번 해보지 뭐!’ 무수한 저울질 끝에 기꺼이 옮긴 한 발짝 덕분에 나는 뜨거웠던 한 시절을 얻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을 것이다. 내 안의 열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기, 내 안에 장작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시기. 그렇게 한 번 활활 타보면 알게 된다. 내가 얼만큼 타오를 수 있는 사람인지. 물론 처음부터 불이 잘 붙지는 않을 것이다. 몇 번씩 사그라지는 불씨를 겨우 다시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불을 붙이고 싶은지 확신도 부족할 것이다. 춤을 추기 전에 나 역시 그랬다. 두려웠고 주저했다. 하지만 결국 한 발짝 걸어 나갔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더니 어느새 마음에 불이 활활 붙어 새로운 내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우붓을 떠났고 춤추는 삶은 잠시 멈춰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덕분에 나는 언제든 다시 장작을 태울 수 있음을 안다. 또 태울 준비도 되어 있다. 다음에는 무엇으로 태울지 그건 아직 모르겠다. 다시 춤이 될 수도 있고 아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언젠가 내 마음은 또 움직일 테고, 나는 잠시 주춤하겠지만 결국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그래! 한 번 해보지 뭐!’ 그리고 내 안의 장작을 활활 태울 것이다. 궁금하다. 다음에는 또 무엇이 나를 타오르게 할지. 무엇이든 뜨겁게, 비비르 미 비다 vivir mi 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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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W매거진 14호 <내 생의 뜨거운 순간> 에 게재된 글입니다.


2W매거진은 여성 에세이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에세이 전문 월간 웹진입니다. 매달 전자책으로 발간되며, 여러 작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지는 독립잡지이기도 합니다. 글 쓰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이자, 즐거운 창작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연대하는 따뜻한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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