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밤바람의 도시, 호찌민

일상과 만나는 여행이 가장 호화롭다

by 아리


"그래서 학교는 금요일에 결석할 거야? 아님 월요일?"

"왜 꼭 빠져야 해?"

"그래야 2박 3일 갈 수 있어. 아님, 하룻밤만 자고 와야 해"


중학생 딸이 열심히 시간표를 떠올리며 짱구를 굴리더니 말했다. "금요일!!"


"오케이!"



그렇게 2박 3일 호찌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금요일 새벽 출발. 안타까운 건 일요일도 아침 일찍 비행기라는 것. 어쩔 수 없다. 학교 빠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이니 월요일 전에는 돌아와야 하는데 일요일 밤 표는 없다. 결국 우리에겐 꼬박 이틀 정도의 시간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호바루에서 호찌민까지는 2시간.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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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조호바루의 새벽빛을 뚫고 환한 아침에 호찌민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남편이 일러준 쌀국수 집에 갔다.


"가면 777 맥주를 꼭 시켜 쌀국수랑 모닝 맥주 조합 괜찮아."


"오케이 알았어!"



메뉴판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333을 777로 기억하는 그 자유분방함이라니!


어쨌든 모닝 맥주와 쌀국수의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아침부터 배가 몹시 불렀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호찌민 산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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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너 처음인 줄 알지? 사실 엄마 뱃속에서 와 봤어.

그때 엄마랑 아빠는 호찌민에서 동물원도 가고 (왜 동물원에 갔나 몰라) 평양냉면도 먹었지.

그런데 2주쯤 되어가는 여행에 뱃속의 네가 지쳤는지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어.


혼자라면 약 먹고 쉬면 되지만 뱃속에 네가 있으니 덜컥 겁이 났지.

그래서 부랴부랴 가장 큰 병원에 가서 스페셜리스트 요금까지 지불하고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어.


다행히 너는 뱃속에서 여전히 힘차게 쿵쿵거리고 있었어.

숙소에 돌아왔는데 김밥이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 그런데 어디서 김밥을 찾아.

게다가 아빠는 첫 해외여행인 데다가 영어도 못해서 바짝 긴장해 있었지.

그래도 비장한 마음으로 김밥을 찾아 나섰어.

해가 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딜 헤매고 있나 걱정이 될 즈음 아빠가 돌아왔어.

겨우 초밥집을 하나 발견해서 김밥 비슷한 걸 들고 돌아오긴 했지.

그리고 그렇게 침대에 누워 하루 이틀 더 쉬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단다.


그렇게 겁을 주더니!

이제 나보다 더 큰 인간이 되어 호찌민에 함께 다시 왔네!




에어비앤비로 고른 집은 유명한 콩 카페가 있는 건물 4층이었다. 육중한 철문을 열어야 탈 수 있는 아주 늙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아이가 타기를 거부했다! 자연스레 공포영화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이해는 했다. 게다가 얼마나 느리게 철컹철컹 움직이는지 4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게 빨라 보이기도 했고. 그래도 4층인데! 호찌민까지 와서 운동을 하게 될 줄이야!


난관은 끝이 아니었다. 집주인이 보내준 동영상을 보고 이중삼중으로 잠긴 복잡한 자물쇠를 열어야 했는데,

"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왜 그런 것도 못해!" 아이가 짜증을 낸다!

뭐라! 십 년 전에 심장 철렁하게 했던 널 이만큼 키워놨더니!



숙소에 짐을 부려놓고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를 걷고 있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다. 숙소 바로 앞 시원한 쇼핑몰에서 더위도 식혔고, 조호바루에 없는 한국 빵집 뚜레쥬르 빵도 먹었다. 걷다 보니 중앙 우체국이 나왔고, 배낭여행객들이 저마다 무리 지어 북적북적 시끌벅적했다. 오! 여행 온 기분이 든다. 우체국 구경보다 사람 구경에 더 신났다. 그 옆 성당은 마침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는데 뭐 상관없다. 어차피 게으른 여행자들에게 성당은 그냥 성당일 뿐. 그리고 인도가 없는 조호바루에서 어려운 산책을 많이 했다. 많이 걸었다. 오래된 도시답게 나무가 무성해서 그늘이 많았다.



그렇게 걷다 더위에 지쳐 작은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사진보다 훨씬 비좁았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수조차 없는 조그만 식탁에, 흉내만 낸 싱크대가 있었고 계단, 아니 사다리를 타고 복층으로 올라가면 커다란 창 옆으로 2인용 매트리스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구석에 공이 되어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애써 모른 척하며 좋다고 뒹굴었다.


오르내리며 좁은 집 구경을 마친 다음 나는 올라앉을 수 있는 넓은 창틀에 앉아 아담한 건물들 틈에서 우뚝 솟은 성당을 바라보며 책을 읽었고 아이는 영어 숙제를 했다.

천천히 어둠에 잠기는 성당과, 이제 거울이 되어 내 모습을 비춰주는 창, 낮은 테이블에서 등을 구부리고 열심히 무언가를 쓰는 아이를 번갈아 보면서 느린 시간 속에 앉아 있었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낮과 다르게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오래된 도시답게 키 큰 나무들이 꼭대기에 앉은 잎들을 쏴쏴 흔들었고

낮에 휑하던 쇼핑몰 앞은 밤바람 쐬러 나온 여행객들, 가족들, 야참 거리 파는 상인들로 북적했다.

우리도 음료수 하나씩 사서 쇼핑몰 앞 화단 옆 빈자리에 얼른 앉았다.


"와, 시원하다!"


"아이씨, 화나! 교복 입은 애들 보니까 나도 학교 가고 싶잖아!"


"어머, 넌 참 웃긴 애구나! 남들은 학교 가기 싫다고 난린데! 하긴, 남자 친구 보고 싶어서 어째!! 호호호!"


괜히 약을 올렸다. 그렇게 웃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했다.

시원하지만 끈적한 열대의 바람이 머리칼을 날려 빰에 붙여놓고 달아났다.


호찌민 관광 명소보다, 내일 어딜 가볼까, 보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이런 대화를 하며

집에서보다 더 시원한 열대의 바람을 맞는 시간이 참 좋았다.

우리의 여행이 일상과 비슷해서 좋았다.

여행책과 비슷한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비슷한 여행.


그렇게 돌아와 오래간만에 같은 침대에서 뒹굴며 수다를 떨다 잠이 들었다.






"쌀국수가 다 쌀국수지 않을까? 어때? 새로운 데 가? 아니면 그냥 어제 거기?"


"그냥 어제 거기 가."


"오케이!"


비슷하게 게을러서 좋다! 다음 날 아침 또 그 쌀국수 집에 갔다.

남편이 가보라고 찍어준 다른 쌀국수 집도 많았는데 말이다.


"야, 우리 벌써 호찌민에 단골집이 생겼어! 곧 또 와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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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돌아와 짐을 챙겨 나왔다. 이틀 자면서 왜 숙소를 두 군데나 예약했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숙소를 옮겼는데 세상에 얼마나 좋은지!

신이 나서 집 구경을 하고 더운 한낮에 또 새로운 집에서 아이는 숙제를, 나는 책을 폈다.



몹시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어젯밤에 이어 일상이 그대로 펼쳐지는 여행을 보며 이 여행, 참 호화롭다 생각했다. 이런 게 사치인 것 같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비행기 타고 날아와 하고 있는 것.


5성급 호텔도, 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신나는 액티비티도, 가이드북의 꼼꼼한 설명도 없지만

여행에 일상이 있어서, 일상이 그대로 여행이 되어서 좋았다.


일상이 그대로 펼쳐지는 여행이 어쩌면 최고로 호화로운 여행이다.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골목들 틈에서,

보란 듯 일상을 펼쳐버리는 여행!


어쩌면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부릴 수 있는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지나치는 관광 명소는 다음에 가면 되고 어쩌면 평생 가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다.

물론 한국에서 몇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아마 이만큼 여유롭지는 못했을 게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해 누구도 하지 못하는 초호화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우아하게 책장을 넘겼다.




두 번째 밤이 내렸다.


숙소 바깥에 커다란 푸드코트가 있었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전 세계의 남녀노소가 모여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이고 있었다. 라이브 노랫소리도 들렸다. 영 실력은 아니라며 둘이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장면은!


나중에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아이 모습이었다. 엄마 아빠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았다.

언제든 또 올 수 있다고 자만했는데, 사실 아이와의 여행은 얼마 안 남았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도장이라도 찍듯 불쑥 말했다.



딸! 앞으로 몇 번 더 와야겠어. 우리 단골 쌀국수 집도 생겼잖아.
아, 낮에 먹었던 그 반미 또 먹자. 다음에는 하나 시켜 나눠먹지 말고 두 개 시키자!

너무 맛있어서 아쉬웠잖아, 그렇지?

꼭, 꼭 또 오자!


그건 그렇고 나는 가져온 책 다 읽었는데, 넌 숙제 다 했어?
내일 집에 가서 한다고? 그래, 새벽부터 공항에 가야 하니까 맥주 한 캔만 마시고 일찍 자자.
굿나잇 마이 베이비. 알맞게 게으른 내 여행 파트너!


KakaoTalk_20191007_125932070.jpg 정말 맛있었던 길거리 반미





돌아오니 남편이 물었다.


"호찌민에서 뭐했어?"


"별거 안 했어. 쌀국수 먹고 산책하고 반미 먹고 숙제했어."


"응, 정말 별거 안 했어. 쌀국수 먹고 산책하고 반미 먹고 책 읽었어."


그리고 우린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우리에겐 그저 밤바람의 도시 호찌민에, 그렇게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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