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1주차.
마드리드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벌써 일주일이나?'도 '아직 일주일밖에?'도 아니고, 딱 일주일만큼의 느낌의 시간으로 보냈다.
무탈하다. 얼마나 다행인지.
별 탈 없이 지낸다. 오 그것도 참 다행이다.
마드리드를 여행지로 방문했다면 지나가며 보이는 모든 풍경에 눈을 반짝거렸겠지만, 여기서 수개월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보다는 꼼꼼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게 된다.
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찾아 돌아다니고, 원두를 구매하고, 동네 이곳저곳을 계획 없이 산책하면서 도시에 정을 붙이고 있다.
언어, 생존, 행운.
일주일 동안 세 가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언어
교환학생 후보 국가는 영국, 독일, 스페인이었다.
나의 영어는 모든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는 수준, 독일어는 어느 정도 길이가 있는 텍스트의 독해가 가능한 수준, 스페인어는 몇 개월 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수준이다. 아마 스페인 3세 아가 정도 수준인 듯.
나는 셋 중에 언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 나라를 선택했다.
마드리드는 생각보다 영어가 안 되는 도시고, 그 점은 오히려 좋다.
스페인어로 한마디라도 더 말하고 듣게 만드는 환경이라 마음에 든다.
스페인을 굳이 교환지로 선택한 이유는 새로운 언어를 하나 더 배우는 게 더 생산적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여기 와서 지내다 보니 내가 이번에도 참 재미난 선택을 했구나 싶다.
영국과 독일에 갔더라면 뭐든지 쉽게 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지금 생활이 특별히 어렵다거나 힘든 건 아니다.
언어에 압도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긴 했다.
마드리드,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해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서점이 많다는 것이다.
개성 있고 아름다운 서점이 많다.
스페인은 비문학 출판이 발달한 것 같다. 특히 '~의 모든 것' 같이 정보전달성이 강한 비문학 서적들은 일러스트가 아름답고, 텍스트 배치는 조화롭다. 분야도 무척 다양해서, 문학, 역사, 예술 등 전 분야에서 이런 책을 찾을 수 있다.
공공도서관도 활발히 운영되는 것 같다. 어린이실에서 아이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고, 부모들은 네트워킹을 하고, 책을 읽거나 할 일을 하러 온 대학생, 청년, 노년,, 인구 분포가 다양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나는 저 책들을 읽을 수가 없다.
아직은 책의 제목을 해석하는 데도 시간이 조금 걸린다.
서점에 가도 한국이나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서점이 주력으로 취급하는 분야가 어떤 건지, 그게 뭐가 특별한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섹션과 책 표지의 그림을 보고 어림짐작한다.
한국에서 책을 두 권만 가져왔다.
통학하면서 읽을 책이라도 빌려볼까 해서 공공도서관에 갔지만, 꽂혀 있는 책의 스페인어 제목 텍스트만으로 압도당해서 자료실을 금방 나와버렸다.
그때 경험했다. 언어에 압도당하는 느낌.
텍스트가 나를 가득 둘러싸고 누르는 느낌.
언어가 참 이상하다.
사실 언어는 그냥 문자이고, 그건 사람을 압박할 수 없는 건데.
언어의 힘이란 참 강력하다.
반대로 언어가 없는 사람은 인간세계에서 얼마나 큰 압도감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힘을 빼앗기고 있는 건지도 생각해 봤다.
외국어도 마찬가지이다.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한국에서 영어로 도배된 메뉴판을 읽을 때, 외국학교를 다니는 딸의 학교에서 온 영문 안내문을 받았을 때,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이 대학에 와서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라고 요구받을 때,
모르는 문장이 나오면 그냥 구글번역기로 돌려서 무슨 뜻인지 알아내면 해결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들이 사람을 압도하는 그 경험이 무서운 것 같다.
정말 다행인 건 나는 이 압도감이 괜찮다.
나를 3세 아가나 바보로 만드는 환경에 있다는 게 오히려 기쁘다.
언제든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구글 번역기를 늘 손에 쥐고 다녀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구구절절 늘어놨지만
사실은 나에게 종종 도움을 요청해 왔던 부모님에게 더 상냥하지 못했던 걸 반성하면서 하는 생각들이다.
나는 왜 꼭 똑같이 경험해 봐야지만 아는지.
좁은 시야에 머무르는 내가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부족했던 것보다 더 많이 만회하겠다.
생존
그다음으로 가장 많이 생각한 키워드는 생존.
생존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해서 그런 건 아니다.
언제 어디를 가도, 답지 않게 대단한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그저 생존하자. 살아남자(survive).
는 걸 목표로 삼고,
종료지점에 와서도
역시 이번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는 걸 가장 큰 보람이자 자랑거리로 삼고,
이런 생각으로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원래도 어떤 낯선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걸 내 가장 큰 강점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다.
행운
그리고 그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많은 행운이 따랐다.
교회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마드리드에 온 지 4일 만에 의지할 만한 한국 사람은 벌써 찾았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눈 딱 감고 참석한 학교 행사에서 사귄 친구들과 축구를 보러 가기로 했고, 그중 한 명은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산다.
첫 수업에서 앞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어쩌다 말을 걸었는데, 그 친구는 지난 학기에 한국에서 교환학기를 보내다 왔다. 나랑 똑같은 한국 드라마를 매주 챙겨보고 있다.
시간표가 안 맞아서 억지로 막판에 추가한 수업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생존하기만을 목표로 삼았는데 많은 행운이 따랐고
생존 그 이상의 많은 걸 얻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앞으로는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아도 동동거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운한 상황에서도 어거지로 좋은 점을 찾아내는 건
내 방식의 럭키비키 사고가 아닌 것 같다.
조금 막히고 삐걱거려도 또 다른 괜찮은 대안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식이
내 방식의 럭키비키인 것 같다.
이렇게 보니 꽤 괜찮은 일주일을 보낸 것 같아 뭉클하다.
나는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바들바들 떨던 겁쟁이였는데, 웃기다.
아니야.
사실은 모든 것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