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우연에서
마드리드 12일차,
시간이...
남아돈다.
미도리 노트, 일기장, 블로그를 왔다갔다 하며 이것저것 끄적이다
유튜브를 보면서 티켓 사이트를 뒤적이다
느지막이 잠에 든다.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고
밥을 먹고 씻고
모카포트로 내린 아이스 커피를 텀블러에 소중히 챙기고
옷을 챙겨입고
일단 밖으로 나간다.
계획인 듯 아닌 듯
대강의 행선지만 있는
느슨한 일정으로 이곳저곳 걷는다.
집 근처에 큰 공원이 있길래 어제는 그곳에 가봤다.
너무 근사해서 한참을 머물면서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벤치에 잠깐 앉아서 챙겨온 미도리 노트를 꺼내서 공원 구조를 기록하고 다음 행선지로 나섰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을 보고 오늘 집을 나설 때는 나도 책 한 권을 챙겨나왔다.
공원에서 나와서 어제의 산책지로 정한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가
지나가던 가게에 괜히 들어가서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본다. 아직 말만 걸고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취감.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서점 한 곳에 눈에 들어왔다. 가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굳이 들어가봤다.
우연히 들어간 서점은 보물창고였다. 겨울에 언니가 마드리드에 오면 여기를 내 단골 서점으로 소개하고 싶다.
여기에서 내가 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마드리드 통지도를 집에 데리고 왔다.
마드리드는 해가 늦게 진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가는 걸 확인할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다 보면 어느덧 시간은 7-8시가 되고, 배가 고파지면 집에 온다.
저녁에 집에 와서 지도를 벽에 붙이고 싶었는데 테이프가 없네.
그래서 오늘 행선지는 전에 구글맵에 저장해두었던 문구소품샵이 되었다.
20분을 걸어 문구점에 왔더니
문을 닫았다.
씨에스타라 쉬는 시간...
사실 여기저기 구경하고 오느라 1시간 걸려서 문구점에 왔다.
덕분에 행선지를 바꿨다.
근처에 큰 백화점이랑 상점가가 있어서 거기를 가
,
려다가 자연사박물관과 주정부 건물이 보이길래
다시 방향을 틀었다.
지도에서 보니 건축관(Casa de la Arquitectura)이 있길래
잠시 들어갔다 나오려
,
던 걸 너무 좋아서 규모도 크지 않은 전시를 보는 데 거의 2시간이 걸렸다.
건축관을 나오니 옆에는 주정부 건물 앞의 열린 공원이 있었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 또 방향을 틀어 걷다가 걷다가.
2시간 반 정도 걸려서 원래 가려던 백화점과 상점가에 도착했다.
여기저기 구경하다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샀다.
4시간을 거쳐서 7시쯤에 문구점으로 돌아왔다.
계산줄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고른 마스킹테이프가 벽에도 잘 붙냐는 말을 스페인어로 얼른 외워서
사장님에게 물어봤다.
사장님이 무어라 무어라 열심히 설명하고 다른 제품도 추천해주셨지만
나는 애초에 가장 저렴한 마스킹테이프를 사고 싶었고, 눈치껏 알아들은 바로는 내가 고른 것도 벽에도 잘 붙는다고 말씀해주신 것 같아서
마스킹테이프 하나를 집에 안고 왔다.
교회에서 만난 분이 운영하시는 카페에 잠깐 들러서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하고
오늘 본 전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사장님께서 케이크 한 조각을 선물로 포장해주셨다.
정말로 집으로 가는 길에 주방용품 가게가 보여서
'긴 병을 설거지할 때 쓰는 제품이 있'냐고 사장님한테 물어봤다. 전에 다른 가게에서 물어보느라 외워뒀는데 그 가게에는 없었다.
마침 이 가게에는 있었어!
사장님이 알려주시면서 이런 브러쉬도 'cepillo'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도 새로운 단어를 하나 더 알게 됐다!
초심자는 기쁨을 느끼기가 참 쉽다. 작은 배움에 기뻐할 수 있는 지금의 단계가 좋다.
여행의 기쁨은 어디에서 올까.
하고 싶은 모든 걸 가능한 더 좋게,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최대한 가장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 몇 일 동안 이런 부담에 머리가 많이 아팠다.
다음 달에 독일과 런던 여행을 앞두고 있다.
가장 완벽한,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멋진 때와 장소가 있을 것 같아서 그걸 찾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여행의 기쁨은 많은 우연에서 온다.
나에게 필요한 건 그걸 허용하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
사실 여행을 많이 안 해봤다.
오롯이 혼자 숙박이나 교통편을 결정하는 것도 처음이다.
되게 웃긴 게 있다.
여행처럼 낯선 문제를 맞닥뜨리면 갑자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어딘가에 숨겨진 정답을 찾아서 사람들이 쏟아낸 정보를 뒤지고 뒤지고.
그러다 너무 많은 정보에 휩쓸려 가기 직전에 오면
그제서야 모범답안이나 정답이 없다는 게 생각이 나서 나만의 결정을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엔 내가 원래 하던 대로 한다.
교환학생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마드리드에 왔으니까 한국에서와는 획기적으로 다르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잠시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안 하던 행동도 하고, 더 호들갑도 떨고, 일부러 들뜨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몇일 전에 시종일관 들뜬 아이처럼 꺄르르대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좋아좋아를 남발하던 다른 교환학생 친구들을 만났다.
함께 들뜨지 않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고, 사실은 좀 속상했다.
어제, 오늘 혼자 도시 이곳저곳을 탐색하고 작은 것에 즐거워하면서
감탄사를 내뱉거나 감성에 젖기보다는 호기심과 탐구욕을 쫓는 게 나의 기쁨의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충분히 기뻤다.
싱글벙글 우와우와 해보려고도 했는데 어차피 되도 않더라.
그냥 하던 대로 하자.
지금 방식도 마음에 든다.
나는 나대로 가자.
늘 그랬듯이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충실히 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