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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May 05. 2021

그리운 언니, 선희 언니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정하의 시 -그립다는 것은>



가끔 카톡 친구 검색 탭에 'ㄱ ㅅ ㅎ'를 입력한다. 여러 이름 가운데 그리운 이름, 선희 언니를 찾는다. 프사의 사진을 넘겨가며 한참을 들여다 본다. 오랫만에 보니, 프사 사진이 성경필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글씨체를 보니 언니 글씨인 줄 금방 알아보겠다. '성경을 필사하고 지내는구나, 잠언이네.' 혼자 중얼거린다. 갑자기 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언니는 가끔씩 이렇게 언니를 검색하고, 언니 프사 사진을 보며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생각도 못할 것이다. 언니도 가끔 내 생각을 할까? "언니, 나야. 명희..." 뜬금없이 카톡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동학년으로 만나자마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수다 떨기, 춤추며 놀기, 거기에 술 좋하하는 것이 나랑 잘 맞았다. 만나면 죽이 맞아 낄낄거리느라 목이 늘 아팠다. 언니는 옆에 있는 사람을 때리면서 웃는 버릇이 있는데 얼마나 손이 매운지 헤어져서 집에 와 옷을 갈아입을 때면 등짝에 멍이 들 때도 있었다. 옛날이니 일 년에 한 두번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전교직원이 놀러갈 때가 있었다. 학기를 끝내 놓고 방학을 앞둔 날이 대부분이었다. 적당하게 음주를 하게 되면 선희언니는 주로 무대로 나가서 넘치는 끼와 흥을 발산하고 나는 그 옆에서 장단을 맞추며 밤새 놀곤 했었다. 대천 바닷가에서 조개구이 안주에 밤새 소주를 마시다가 날이 밝아지던 바닷가를 휘청휘청 뛰어다닌 기억이 선명하다. 남편과 동갑이었던 선희 언니, 둘이 하도 술을 많이 먹고 다녀서 남편은 선희 언니랑 좀 떨어지라고 잔소리도 좀 했었다.



사람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망가지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정성껏 키운 딸 하나를 대학에 입학시켜 놓고 이젠 자유부인이라는 언니를 부러워했었다. 남매를 키우며 지지고 볶던 시절이라 더욱 그랬다. 그 예쁜 딸아이가 대학에 입학을 하고 처음 미팅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언니는 갑자기 휴직을 했고, 딸이 아프다는 말만 쉬쉬하며 돌아다녔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만날 수도 없었다. 스토커처럼 전화를 하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하다가 결국 집 앞에 잠깐 나온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너무나 망가져 있었다. 가뜩이나 자그마한 사람이 거의 삼분의 이로 몸집이 짜부라들었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이뻤던 얼굴은 뼈만 앙상해서 눈이 튁 튀어나와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뇌종양이라고 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프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길에서 쓰러졌고, 검사를 했더니 너무나 큰 사이즈가 위험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급하게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여 집에서 병간호를 한다고 했다. 하루 종일 집안을 청소하고 아이 먹을 것을 준비하고 아이와 운동을 하며 지낸다고. 그래서 종일 바쁘다고.


회복되는 줄 알았다. 일년의 간병 휴직을 마치고 언니는 복직을 했고 딸은 복학을 했기에 조심하면서 다시 일상을 회복하는 줄 알았다. 그 때 언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전의 언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딸은 다시 쓰러졌고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언니는 말했다.

"붙들고 있었던 건 내 욕심이었나 봐. 입관할 때 보니 아이 얼굴이 평온하더라. 고통스러워하던 표정이 아니고 편안해."



언니는 퇴직을 했고, 이사를 했고, 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언니의 갑작스런 부재, 그 때는 막연하게 언니의 슬픔을 짐작하는 정도였다. 어떤 안부도, 어떤 위로도 건넬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언니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나대로 살았다.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슬픔의 위안 168쪽)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40쪽>



선희 언니가 갑자기 더 생각나고 그리웠던 것은 어쩌면 내가 남편을 황망하게 떠나보내고 나서였다. 잊고 지냈던 언니가 문득 문득 생각난 것은 아마도 그 때 다 위로하지 못한 언니의 슬픔과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해도 언니는 이해해 줄 것만 같은 나의 슬픔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언니는 프사의 사진으로 다시 나타났다. 작은 아이와 함께. 거실에서 태권도를 하는 대여섯 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 그리고 박수를 치면서 바라보는 선희 언니. 아마 이 사진은 형부가 찍은 준 것일게다. 웃는 모습이 선하던 형부도 아이 곁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프사에 담겨있다. 누가 보면 분명히 손주라고 할 것이다. 얼굴이 길죽하고 웃을 때 쳐지는 눈매가 사랑스런 아이는 점점 자랐고,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함께 등산을 자주 다니고, 해외 여행도 여기 저기 다닌다. 사진 속 선희 언니는 점점 얼굴이 빛나고 내가 알던 언니의 모습, 가끔은 장난기가 나타난 사진 속 모습에 담겨있다. 풍물단에 들어가 공연하는 모습, 화려한 댄스복을 입고 라인댄스를 추는 모습, 마이크를 잡고 교회 행사에서 사회를 보는 모습으로 언니는 예전의 흥많고 끼많던 언니로 다시 살고 있는 것이다.



짐작하는 바로는 언니는 남자 아이를 입양했고, 그 아이에게 사랑을 주며 딸아이를 잃은 상처를 회복하고 있다. 아픈 세월을 보내고 이제 다시 작은 아들과 함께 행복한 얼굴로 언니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며 언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보고 싶은 선희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세월이 좀 지났고, 언니는 나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보냈다.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서로를 밀쳐냈던 그 시간들을 흘러가게 했으니, 이젠 보고 싶은 마음으로 만나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운 언니, 선희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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