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의 날이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대장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빠는 건강검진 때마다 용종을 뗀다. 살벌하지만 우스갯소리로, 세상이 좋아져서 건강검진을 통해 대장암 안 걸리는 거지, 의료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면 아빠도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을 거라 얘기하곤 한다. 막냇동생은 크론병 환자다.
그런 가족력의 이유로 4-5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에 대장내시경을 넣고, 이번이 세 번째 대장내시경이다.
대장내시경의 준비는 고난의 길이었다. 검사 3일 전부터 식이조절을 해야 하는데, 식탐이 넘치는 나에겐 고난 그 자체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육식만 즐기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이 검사 3일 전이었는데, 시어머니가 이제 막 올라온 고들빼기를 무쳐주셨는데 먹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런 며느리를 불쌍히 여기고 조려주신 감자만 열심히 먹었다.(물론 그 또한 최상의 맛이긴 했다.) 바로 전 날엔 흰 죽만 먹을 수 있는데, 그걸 또 다르게 먹겠다고 일반 간장, 장아찌 간장, 소금으로 다 다른 간을 해 먹는 정성을 보였다.
그 밤에는 장을 비우는 약을 먹기 시작했다. 정해진 약을 절반을 밤에 먹어서 1차로 비워내고, 검사 당일 새벽에 남은 절반을 먹어 2차로 비워냈다. 밤새 비워내느라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건 물론이고, 검사를 가장 빠른 오전 7시 30분에 잡아놨기 때문에, 2차로 먹는 약은 정해진 시간보다 더 빨리 먹기 시작해야 병원으로 가는 시간 동안 변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검사복으로 갈아입는데, 대장내시경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엉덩이에 뚜껑이 달린 바지를 지급받는다. 이방 저 방 돌아다니며 각종 검사들을 하고, 중간에 인바디로 신체계측을 할 때는 지난 반년 간의 다이어트를 보상받는 뿌듯한 시간을 잠깐 가지기도 했다. 몸이 뜨끈해지는 조영제를 넣고 ct까지 찍고, 마지막 내시경실 앞에 도착하니, 조영제 때문에 갑자기 뜨거워졌던 몸이 식고,
긴 공복과 모자란 수면으로, 춥고 배고프고 졸렸다. 이런 거지가 따로 없네 생각했다가, 아 그러기엔 나 지금 엄청 호사스러운 건강검진 중이지 라는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수면마취약이 들어가면, 늘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최대한 버틸 것이다!!! 하지만 늘 숫자 셋까지도 못 가고 수면내시경이 끝났으니 일어나라는 간호사의 목소리로 눈을 뜨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면내시경을 했으니 오늘 하루는 운전하지 말고, 특별히 용종 같은 것들을 떼어낸 건 없으니 일반식을 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병원을 나왔다. 이제 먹는 것의 자유가 찾아왔다. 병원 근처 유명한 베이글 집에서 베이글을 잔뜩 사고, 점심으로 쫄면과 군만두 혹은 초밥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하다가 쫄면과 군만두를 사들고 집에 왔다. 쫄면과 군만두를 먹는데, 아직 약도 덜 깨고, 아무래도 속을 헤짚어놔서인지 영 입맛이 없었다. 대충 쫄면만 다 먹고, 모자란 잠을 더 잤다. 잠은 안 오는데 하고 침대에 잠깐 누웠는데 두 시간이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났다.
조금 개운해진 상태에서 사 온 베이글을 열어봤는데, 내가 이렇게 많이 샀나...? 싶게 많았고, 열어보니 평상시엔 사지 않을 자극적인 맛의 베이글(뭔가 베이글은 슴슴 한 맛이라는 생각이 있는 편)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수면마취와 공복의 조화가 이렇게 만들어냈구나 싶어서 어처구니없었다.
지난번 건강검진까지는 지나친 살로 좋지 않았던 지표들이 반년 간의 다이어트를 통해 많이 좋아졌다는 것에 감사하며, 사온 베이글을 열심히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