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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sta Seo Jun 30. 2020

6월에 만난 우리의 영웅

경남 남해

420여 년 전 버려졌던 그 섬들은 지금도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초여름 남해의 햇볕은 뜨겁다. 그래도 6월의 녹음이 있어 실핏줄처럼 섬 구석구석까지 퍼진 길을 걸을 수 있다. 생명력 넘치는 섬의 신록은 바다와 함께 아스라한 정감에 젖어드는 남해의 풍경을 보여준다. 숲 속에서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덩굴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 물 댄 논에서는 개구리밥 물풀이 햇살에 반짝인다. 언제 이 섬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담벼락 옆 텃밭에는 늘씬한 보라색 코끼리마늘 꽃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6월의 남해

섬이 버려졌을 당시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적의 말똥에 섞여 나온 곡식의 낟알을 찾아 먹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 땅의 백성이 가여워서, 참혹하게 유린당한 산하와 백성의 눈물을 잊을 수 없어서, 단 한 놈의 왜적도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그는 이 섬 앞바다에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

남해 충렬사 앞 거북선과 남해대교

6년 동안 이 땅에 치욕의 상처와 큰 아픔을 주었던 일본은 명량에서 그에게 대패당한 후 겨울 대비를 위해 남해안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군을 원했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는 싸우지 않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뇌물과 타협이 오간 사실을 안 그는 결전을 벌일 준비와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일본군의 정예병 1만 2,000여 명을 태운 500여 척이 순천을 향해 광양만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명나라 300여 척, 조선 80여 척의 380여 척이 노량해협으로 갔다. 명나라 도독 진린은 하동의 죽도 부근을 지키고, 그의 전함들은 맞은편 남해 관음포에서 일본 전선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어둠을 타고 노량해협으로 들어오는 일본 전선들은 그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앞다퉈 다가왔다. 컴컴한 어둠이 깔린 검은 바다에 갑자기 불화살이 포물선을 그리자 조용했던 바다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날 밤 2시부터 전투는 시작됐다. 포탄과 조총 탄환, 화살이 수없이 오가고, 불길과 일본군의 비명은 밤바다로 멀리 퍼져나갔다. 전투는 새벽 일출의 붉은색처럼 일본군의 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낮까지 이어졌다. 그와 조선의 수군은 한 명의 침략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했다. 흔히 지휘선은 최전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데 이날 전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 전선에 포위된 명나라 도독 진린을 구출하기 위해 그의 배가 앞장서 전선을 돌파하기도 하고, 적선을 추격하는데 선두로 나서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 전선 200여 척이 침몰하고 100여 척을 포획하는 승리로 전투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마지막 저항을 하며 도망가던 일본군의 탄환이 그의 왼쪽 가슴을 뚫었다. 

“이 사람의 죽음을 삼가고 삼가 말하지 말고 군사들을 놀라게 하지 마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그의 시신은 관음포로 옮겨져 이락사에 안치되었다. 그 후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까지 3개월 정도 ‘남해 충렬사’의 가묘 자리에 안치했다.

남해 충렬사와 이순신 장군 가묘

보물섬 남해군에는 ‘바래길’이라는 ‘걷기 여행길’이 있다. 이 바래길 중 2012년에 개통한 13코스는 ‘이순신 호국길’로 불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길이다. 노량해협을 따라 있는 길일뿐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던 충렬사 사당이 이 길에 있다. 길은 관음포 해안을 따라 ‘이순신 순국공원’까지 이어진다. 격전지였던 관음포만 외해가 보이는 해안에 있는 공원은 ‘호국 광장’과 ‘관음포 광장’으로 나뉜다. 

남해 바래길 13코스 '이순신 호국길' 풍경

호국 광장에는 장군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노량해전에서 전몰한 조명 연합 수군의 위령탑, 도자기 벽화로 만들어진 순국의 벽 등이 있다. 순국의 벽은 50X50cm 크기의 도자기 벽화 3,797장을 이어서 만든 세계 최대 규모의 도자기 벽화다. 광장 주변은 공원과 공연장이 둘러싸고 있다. 호국 광장에서 관음포 광장 쪽으로 가다 보면 돔형으로 생긴 영상관을 만난다. 118석 규모의 입체 영상관인 이곳에서는 노량해전 영상을 3D 영상으로 보여준다. 

관음포 광장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테마별 체험과 리더십 체험관이 있어 체험과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호국 광장 '순국의 벽'과 '이순신 장군 동상'
'이순신 순국 공원' 내 '3D 영상관'

이곳 ‘이순신 순국공원’에서 노량해전이 벌어진 11월이면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이순신 순국제전’이 격년제로 열리고 있다.

이순신 순국 공원  '관음포 광장'

그는 노량해전에서 왜 무모할 정도로 앞에 나서서 싸웠을까? 


노량해전이 있기 1년 전 조선의 임금 선조는 일본의 계책에 말려 그가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정할 것을 명했다. (정유재란이다) 하지만,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있던 그는 큰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해 출정을 늦췄다. 이에 선조는 그를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한다. 사실 선조가 명분으로 삼은 ‘임금을 능멸한 죄’는 핑계였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쿠데타로 건국한 나라다. 더군다나 선조는 아들에게 섭정을 시키고, 이 땅과 백성을 버린 채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던 군주다. 백성들의 존경과 민심이 그에게 집중돼 있다는 것을 선조는 알고 있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혹독한 문초를 당했다. 그런 와중에 그를 찾아온 선조는 “짐은 다시는 그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소. “라고 말한다. 그 후 그는 백의종군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처참한 심정을 안고 바닷가 수군 진영으로 내려가던 중 모친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난중일기에 이렇게 썼다. ‘하늘이 캄캄했다.’ 


그해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그는 9월에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13척의 기적’ 명량대첩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꾼다. 그리고 가을이 한창이던 10월에 애지중지하던 아들 면이 왜적 손에 죽었다는 비보를 받았다. 

그는 이 전쟁이 끝나면 승패와 상관없이 자신은 이 나라에서 더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처절하고 결연하게 싸운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기의 생을 연장하고 싶은 몸부림은 더욱 아니었다. 자신의 뿌리인 이 산하와 자기를 존경하고 따르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복수와 일본의 만행에 대한 응징도 포함돼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잘 알고 있던 그는 노량해전을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전쟁으로 생각한 것이다.   


6월이다. 남해군 바래길 13코스 ‘이순신 호국길’에서 우리 역사에 드문 위대한 장군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와 함께 우리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가! 지켜주고 싶고, 지켜야 할 자연과 사람이 있다면 그 끔찍했던 슬픔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벽 5시 23분 첫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바다는 고요했다. 노량 앞바다가 다시는 분노의 파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와 이야기 나누며 ‘이순신 호국길’을 걷는다.       


http://bravo.etoday.co.kr/view/atc_view.php?varAtcId=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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