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세상의 모든 계절
“숙면 외에 또 다른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른 인생”
위 대화는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도입부에서 심리상담사 ‘제리’와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한 불면증, 우울증 환자 ‘자넷’의 상담 중 나온 말이다. 자넷은 인생에 행복했던 순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휘청거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60대 언저리의 여자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삶도 소중하게 가꾸지 못하는 현대인의 허기진 영혼을 본다.
이 영화는 현대 사회의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문화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문제의식을 제기해 온 영국 감독 ‘마이크 리’의 또 하나의 걸작이다. 이 60대의 감독은(영화 제작 당시) 60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사는 방식과 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여러 인물이 섞여 있는 삶에 카메라는 지질학자인 톰과 심리상담사인 제리 부부를 따라가면서 어느 한 해에 생긴 일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 순서대로 보여준다.
런던에 사는 ‘톰과 제리’는 자신들이 원하는 관계를 성립해 살기 좋은 삶의 구조에서 사는 60대의 노부부다. 그들은 자신들 내면의 진실에 귀 기울이며, 주변 사람의 아픈 그림자마저도 존중하고 안아주면서 살아가고 있다.
톰의 어릴 적 친구 켄은 은퇴 후 닥쳐올 외로움이 두려워 술에 의지하면서 살고 있다.
제리의 친구 메리는 자신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지혜롭게 어루만져 주지 못하고 불안과 고독에 휩싸인 채 상실에 빠져있는 불안정한 독신이다.
이 노년의 등장인물들이 아픔과 결핍을 끌어안고 그들 각자의 안테나로 세상과 관계하면서 살아가는 시간이 만드는 삶의 순간들이 영화의 내용이다. 생에 대해, 삶에 대해 어떤 정의나 교과서적인 메시지는 없다. 강약조절 없이 그렇게 희미하게 주욱 인물들의 시간과 순간을 나열한다.
살면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사이에 거리 조절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영화는 어떤 영감을 준다.
메시지 전달의 매개가 주로 대사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는 두 곳의 중요한 공간이 나온다. 한 곳은 ‘톰과 제리’ 부부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주말농장이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계절을 보여주는 장치로도 사용된다.
다른 한 곳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듯이, 기분 좋은 공간인 ‘톰과 제리’의 집이다. 집은 두 사람의 휴식과 위로, 소통의 공간이며 그들의 빛과 그림자를 보듬어주는 곳이다. 나아가 타인을 위로하고, 사랑하며, 세상의 모든 길이 막혔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벗이 되어주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치유의 공간으로 영화의 주 무대다.
영화를 초반부터 긴장하고 보게 되는 것은 ‘자넷’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과 시니컬한 대화 내용이 사건의 전개를 끌고 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첫 등장 이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넷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강렬했던 자넷의 표정에 이어 메리의 신들린 연기가 이 서사를 끌고 가도록 바통을 넘기는 전략적 선택을 한다. 그리고 처음에 나오는 자넷의 표정과 비교가 되도록 마지막에 수십 초 동안 정지된 프레임으로 메리 표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마지막 표정의 변화와 눈길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그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명확한 것 하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내면의 자기가 아니라 타인에게 보이는 자아에 초점을 맞춰 삶의 균형을 잃게 되는 많은 현대인의 모습을 메리에게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외로움, 좌절, 질시, 공허는 미워할 수 없는 또 다른 우리들로 투영된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을 보이는 켄의 이야기에 가슴 저리는 아픔의 연민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로니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조차 안 보이는 눈길은 살며시 다가가 어깨를 감싸주고 싶은 마음을 샘솟듯 솟아나게 한다.
몇몇 뛰어난 사람들은 인생을 완성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버티는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 버팀 속에서 내 안의 진정한 나를 제대로 돌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사랑받고, 계약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작은 꿈이 피어오른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힘이다.
감독 ‘마이크 리’는 배우들과 함께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 스스로 연기력을 끌어내도록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평판이 자자한 감독이다. 명성대로 ‘레슬리 맨빌(메리 역)’은 이 영화로 미국, 영국의 비평가 협회상을 휩쓸었다. 그녀의 두 눈이 보여주는 연기가 이 영화의 진정성을 높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는 끝나고 난 뒤에도 우리들의 삶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가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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