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인생아

by 아리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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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으며 자랐다. 기억력이라도 조금 나빴다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운 나쁘게도 그렇지 못해서, 나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많은 사람이 평생 한 번 겪어볼까 말까 한 일들이 자꾸만 나에게 일어났다. 그러다보니 이게 정말 내 몫이 맞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겪어야 할 불행을 내가 대신 겪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이상한 일들이 이어졌다.


죽을 것 같다는 감각이 자주 찾아왔지만, 이상하게도 그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내 삶의 강도를 조절하고 있는 것처럼, 딱 직전에서 멈춰 서는 느낌. 버티게 하되,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게 만드는 어떤 거대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자라면서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체념하게 되었다. 아, 내 삶은 이런 결인가 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역시 그렇구나.' 끄덕끄덕.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았고,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났으며, 자꾸 어딘가가 아팠다.


나는 그 결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받아들인 게 아니라 그저 오래 버티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2017년, 심각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상담을 받았다. 내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첫 번째 불행부터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지금껏 괜찮은 줄 알았던 마음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오열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상태가 이상해 짐작은 했지만, 도통 자기 이야기를 안 하는 딸이 토해내는 말들을 듣고 어머니께서는 많이 놀라셨다. 한동안은 상담을 다녀올 때마다 눈두덩이가 터질 것처럼 부어있었다.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달라질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조금은 버텨보고 싶었다.

사주를 보면 늘 ‘말년에 잘 될 팔자’라고 했으니까. 우스운 말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붙잡고 있었다.

그 말년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그래도 버티길 잘했다 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조금 억울했다. 사는 내내 좋은 기억은 짧았고, 힘든 시간은 너무 길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행복한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내가 제일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니까.


다음 해부터 나는 놀랍게도 조금씩 나아졌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는 걸 알고 바로 대응했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 버틴 것이라 믿는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진짜로’ 웃을 수 있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지금의 짝꿍을 만나고 나서는 그 웃음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다.


우울증이 왔을 때, 그 회색의 세상을 안다.

파란 하늘도, 눈부신 노을도, 반짝이는 달빛도 보이지 않는 무채색의 세상.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그곳이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곳이었다면 이미 나왔을 거라는 걸. 스스로를 그 안에 너무 오래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려달라고 말해도 괜찮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도 괜찮다. 당신의 삶이 괜찮아지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은 결국 당신일 테니까.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멀게 들리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대신, 조금은 힘을 빼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매일이 행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날 돌아봤을 때 그래도 꽤 괜찮았어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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