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사색을 통한 채움이 글쓰기에 미치는 영향
어린 시절, 우리 집 뒷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깊이가 꽤 깊어서 두레박 줄이 4~5m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물물은 추운 겨울에도 웬만해서는 얼지 않았고, 더운 여름에도 시원함을 잃지 않아서 좋았다.
가뭄이 웬만해서는 우물물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가뭄이 너무 심했던 어느 해는 우물 바닥을 보일 만큼 우물물이 줄었던 적이 있었다. 끊임없이 신선한 물을 퍼올릴 수 있었던 우물도 오랜 가뭄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우물 바닥을 긁는 두레박?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퍼냄'의 과정이다. 내 속에 있는 생각과 경험들을 글쓰기라는 과정을 통해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리듯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어쩌면 글쓰기 자체는 기술이나 기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이 부분에 대해 반론을 얘기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많이 훈련하고 연습하면 웬만큼 글을 쓰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각'과 '경험'이라는 우물물이 말라 버리면, 글을 쓰는 것이 마치 마른 우물 바닥을 두레박으로 긁어대는 것과 같아서 어휘와 문장들이 거칠고 딱딱해질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시작해서 한 동안은 그동안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들,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이 경우의 글쓰기는 장르의 제한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과정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물물이 계절에 관계없이 늘 수위를 유지하고, 퍼올릴 때마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글쓰기는 가물어 바닥을 드러내는 우물물처럼, 생각과 경험의 고갈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소재가 없음에 대한 갈증, 점점 얄팍해지는 글의 깊이에 대한 민망함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패키지 투어로는 글을 못 써!
그래서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혹은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는 등 나름대로 글쓰기의 소재를 찾아다닌다. 이것은 어쩌면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깊이를 더해 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단순히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험과 사색이 병행되어야 비로소 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패키지 투어와 같은 여행으로는 결코 글을 쓸 수 없다.'는 어느 여행작가의 지적과도 통하는 말이다.(이 부분에 대해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극단적인 경우를 말한 것이다.)
나 역시 알량하나마 글이라는 것을 쓰려고 마음먹고 나니 생각이 참 많아진다. 책을 읽을 때도 작가의 의도와 고뇌에 감정 이입하며,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된다.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작가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은 뭘지, 배우들이 연기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뭘지에 관심을 더 갖게 된다. 하물며 집 근처에서 꽃 사진을 찍을 때도 다르지 않다. 그저 예쁘다는 말보다는 그 꽃의 이름은 뭐고,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꽃이 피어서 사람들에게 주는 감정은 어떤 것인지 등등을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게 된다.
이런 과정을 '채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가 '퍼냄'의 과정이듯이, 반드시 글쓰기가 전제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경험하고 사색하는 과정이 우리의 생각을 채우는 과정인 것이다.
글쓰기보다 독서를 먼저?
글쓰기에서 '채움'의 과정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지도할 때도 처음부터 글을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 훈련을 먼저 시킨다. 독서를 통해 어휘와 문장의 의미, 다양한 표현에 익숙하게 하고, 다양한 책 읽기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이도록 도와준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글쓰기 훈련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글의 기교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글의 깊이가 있고 적절한 소재를 잘 배치하여 맛깔나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의 글을 읽으면, 더운 여름날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물 한 바가지처럼 청량함이 있다. 그래서 이런 글은 길이가 길어도 쉼 없이 끝까지 일게 되고, 그 감동은 오래간다.
'채움'과 '퍼냄'의 상관관계, 경험과 사색이라는 '채움'과 글쓰기라는 '퍼냄'은 한 편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을 만들어내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글을 쓰기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바싹 말라가는 우물 바닥 같은 느낌이 든다면, 사색의 숲을 조용히 산책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