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중은 방안에 앉아서 옥편을 보며 신문지 여백에 어려운 글자를 따라 적는다. 이미 읽은 지난 일간 신문들을 차곡히 모아서 빈 여백을 이용하여 필사를 하며 숙지를 한다. 역사와 성씨에 관심이 많은 현중은 첫 만남에 꼭 묻는 말이 있다. "성씨가 어떻게 되나요?" 요즘 세대에게는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이 잘 대답해 주는 편이었다. 그러면 상대방의 시조는 이렇고 내력은 저렇고 당신의 머릿속에 숙지된 잡다한 지식들을 꺼내어 이야기한다. 개중에는 관심이 있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기에 보편적으로는 지루해하는 편이다. 구 남매 중에서 넷째이고 사내로서는 셋째이나 위로 형들이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에 어른 역할을 한다. 동생들은 뒤에서 왕초라고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현중에게 잡혀서 이야기 듣느라 수고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동정 어린 눈 짖을 한다. 구정 전날 이른 아침, 천중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집문을 열며 "형님!" 하고 인사한다. 현중은 안방 모퉁이에 설치된 낮은 창문을 열며 "자네 왔는가?" 하고 대답하니 구석방에 함께 사는 결혼한 형제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한다.
현중과 옥례는 10년 전에 전라도 광주에서 결혼을 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서울로 상경하여 숭인동을 거쳐 창신동에 자리 잡았다. ㄷ자 구조의 개조형 한옥은 마루를 포함하여 8칸 방에 부엌이 제법 있는 다가구 주택이다. 그중에 입구 방은 현중의 사촌 동생들이 상경하여 거주하며 직업을 구하는 전초기지로 많은 사람이 거쳐간다. 건넛방은 옥례의 친정 엄마와 자녀인 선옥과 선태, 그리고 명자가 생활하고 안방에는 옥례와 현중이 거주하며 선임과 선희가 생활을 하였다. 안방 옆에는 부엌이 있고 위로 다락이 있는 구조이다. 부엌 뒤편에는 몇 개의 항아리를 놓을 수 있는 장독대가 있다. 부엌을 지나 현중의 동생인 서중과 아내가 살고 그 옆방은 갑중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이 살았다. 그러고는 방이 3개가 있는데 간이 주방을 만들어 세를 놓아 수입을 올렸다. 한 지붕에 많은 가족들이 살고 있기에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화장실이다. 그때는 변소라고 하였다. 낡은 베니어에 빛바랜 하늘색 페인트가 벗겨져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한쪽 벽에는 낮은 높이로 옷 장사를 하며 모아온 구겨진 포장지를 손으로 펴서 가위로 적당한 크기로 잘라 벽에 걸어 휴지로 사용한다. 이른 새벽부터 화장실은 붐비기 시작한다. 때로는 공중변소처럼 줄을 서기도 하고 급하면 소리 질러 하던 동작을 멈추고 교대하기도 한다. 더 웃픈것은 재래식 화장실이라 양쪽으로 설치된 나무 발판에 많은 흔적들이 지저분하게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합승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복닥거리는 집에 손님들이 오기 시작한다. 천중을 필두로 삼촌, 사촌, 오촌, 육촌....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모를 지경이다. 나는 잘 모르면 적당히
"삼촌!" 이라고 부르면 대략 통한다. 여자들은 옷을 갈아입고 역할을 나누어 음식을 만든다. 한쪽에서는 전을 부치고 만두를 만들고 떡국을 끓이고 숙달된 솜씨로 먹거리 준비에 여념이 없다. 남자들은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술상을 차려서 한잔 나누고 한쪽에서는 화투를 치며 여자와는 너무도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어느새 준비된 근사한 음식들이 접이식 교자상에 차려져 안방으로 들어온다. 여자들은 작은 상에 구석으로 모여 몇 안 되는 반찬을 놓고 밥을 먹는다. 그러나 옥례는 교자상에 삼촌들과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한다. 삼촌들은 옥례를 <대장>이라고 부른다. 서중과 갑중은 옥례가 집에서 함께 지내며 결혼까지 시켰다. 그뿐 아니라 시골에서 상경한 수많은 삼촌들을 모두 챙긴다. 10년의 세월을 헌신한 공로로 옥례는 명실상부한 <대장>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부지런히 상을 정리하고 음식을 교체하여 미리 연락한 동네 어르신과 어려운 이웃들을 초대한다. 매년 명절마다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일이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참기름을 신문지에 싸서 가져오고 어떤 분은 신문지에 쇠고기를 싸서 오시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는 신문지의 활용도가 많았다. 많이 어렵던 시절인데 어떻게 이렇게 대접하였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음식과 술을 드시고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면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정리하며 수다들을 떤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별일은 없었는지 안부도 묻고 수많은 에피소드가 부엌에서 새어 나온다. 당연히 대장은 삼촌들과 안방에서 약주를 나눈다. 흥이 오른 옥례는 서중에게 말한다. "삼촌! 노래 한자리 하지." 서중은 당연하다는 듯이 일어나 18번을 읊조린다. 가락에 맞춰 젓가락 장단이 맞춰진다. 교자상에는 수많은 장단의 흔적이 남아있다. 모퉁이에 패인 흔적들은 문양처럼 자연스럽다. 이어서 현중에 노래다. "아아 신라에 밤 아암 이이이 여어~." 목이 트이지 않아 답답하고 처량한 읊조림이 시작된다. 노래가 끝나면 옥례는 손가락질로 또 한 번 지시를 한다. "이번에는 막냇삼촌." 모두들 아무런 저항 없이 지휘자의 손짓에 몸을 맡긴다. 그사이 설거지와 정리를 마친 작은어머니들이 조카들 옆으로 와서 자리를 잡는다. 안방의 구석은 제2그룹으로 다소곳이 노는 광경을 지켜보지만 옥례는 이 또한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동서 차례." 서중의 아내는 살짝 부당하다는 몸짓을 하지만 스스로 포기를 하고 일어서 노래를 한다. 이 모든 것이 흔치않은 풍경이다. 이렇게 명절 전날 밤은 옥례의 넓은 품속에 술과 음악과 함께 깊어만 간다. 현중의 서글픈 <불효자는 웁니다>가 흘러나온다.
설날 아침 어제 먹은 술과 음식으로 인해 얼굴들이 부어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어서인지 얼굴이 밝다. 고운 옷들로 갈아입고 서로 마주 보며 맞절을 한다. 삼촌들은 흰 봉투에 돈을 넣어 가장 어른인 현중에게 세뱃돈을 드린다. 어른들의 인사가 끝나면 아래 학열의 <선>자 돌림 조카들이 형제별로 세배를 드리며 세뱃돈을 받는다. 친척들이 많아서 어느새 주머니가 세뱃돈으로 채워진다.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건넛방에 와서 받은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며 자랑도 하고 좋아한다. 그 사이 갓 차려진 교자상에 하얀 떡국이 동치미와 곁들여 담겨 들어온다. 이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한다. 찢어지도록 가난한 시절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옥례가 있어서 좋다. 구심점이 되어 많은 친척들을 보살피고 밀어주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