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을 쓰기 위해 살았다[공모전]

by 유호현 작가

어린 시절 소년의 방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대망, 세계 명작 50선, 전래 동화, 단편 소설 등.

소년이 특히 자주 읽던 책은 어린 나이에 봐도 조잡한 그림과 허술한 느낌이 드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그럼에도 자주 펼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속에 가끔 '진짜' 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모래 속에 숨은 진주처럼.

그런데 그 진주까지 닿기 위해 너무 많은 모래를 파야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발견하지 못한 채 책을 덮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소년이 특히 소중히 여기는 SF단편 소설 하나가 있었다.

줄거리는 이랬다.

태어날 때부터 죄력을 측정받고, 10킬로그램 이상의 죄의 우량아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사회.

주인공 다울은 전례 없는 100톤으로 태어난다.

부모를 빼앗기고 격리당한 그는, 자신의 죄력이 플루토늄처럼 활용 가능한 강력한 에너지였음을 자신을 아껴준 직원의 유서를 통해 알게 된다.

다울은 폭주하고, 마침내 그 에너지를 무기로 작동시킬 수 있는 버튼 앞에 선다.

그의 생명의 남은 시간은 단 70초.

그는 복수를 택할 것인가, 사랑받은 기억을 위해 사라질 것인가.

이야기는 마지막 한 줄로 끝난다.

"그래, 아직 시간은 있어."

소년은 이 결말을 잊을 수 없었다.

소년이 지금까지 읽어왔던 작품들은 모두 닫힌 결말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엔 결론 대신 독자의 선택이 있었다.

소년은 처음으로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마주했다.

그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여운이었다.

새끼 오리들이 알에서 깨어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각인하듯, 소년에게 그 무명작가는 문학이라는 세계의 '첫 어미'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 내용은 평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여운과 열림은 소년이 쓰게 될 수많은 이야기의 뿌리가 되었다.

소년은 그 이후로 어떤 문장을 '쓸지'보다 '쓰지 않을지'를 고민하며 살아갔다.

책을 덮은 후에도, 잠들기 직전에도, 다음날 학교를 갈 때에도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그건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지만, 소년에게만 들린 목소리였다.

책의 마지막 장에, 작가의 이력이 짧게 적혀 있었다.

"작가 20XX 년 향년 52세로 별세."

책은 싸구려 문고판이었고, 편집도 엉망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작가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소년은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작가는 이미 10년 전 세상을 떠났고, 그 책은 많이 팔렸을 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책은 늘 소년의 인생을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경제적으로 힘들던 날에도, 학교 폭력에 오랫동안 시달리던 날에도, 소년을 견디게 한 건 그 책 한 권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 내용의 어떤 문장도 자신의 글에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남에게 쉽게 보일 수 없는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유다 왕 히스기야가 바빌론 사절단에게 자신의 보물을 보여주었다가, 그것이 침공의 빌미가 된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신의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그 책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쓸 모든 이야기의 레시피라 여겼기 때문이다.

숨겨두고, 혼자 꺼내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빛나는 레시피.

누군가에게 들키는 순간, 자신의 모든 이야기가 침공당할 것 같았다.

어떤 때는 오마주라도 해볼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오마주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오마주'만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따라 쓰기 시작하면, 그 문장을 중심으로 모든 글을 흉내 내고 싶어질 것 같았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던 베드로가 괜히 따라갔다가 숯불 근처에서 세 번 부인해 버린 것처럼,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었다.

소년은 결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묵상했고 그가 만든 세계에서 위로받았다.

소년의 책을 누군가는 연구했고, 수많은 매스컴에서 그의 문장을 인용했다.

어떻게 그런 훌륭한 글을 쓰냐는 인터뷰에 소년은 어린 시절 읽은 한 단편 소설의 영향을 받았음을 드디어 말한다.

어떤 소설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소년은 그저 웃기만 한다.

그 소설을 밝혔을 때, 세상이 그 소설 내용을 조롱할 것임을 가슴으로는 세 번 부인하고 싶어도, 머리로는 끝내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렀다.

소년이 그 책을 접한 지 60년.

그러니깐, 무명작가가 죽은 지 70년이 지났다.

저작권법이 정한 '사망 후 70년'이라는 보호기간이 이제 지난 것이다.

세상에서 단 한 명만 지켜주던 그의 저작권이 이제 사라졌다.

그 문장들은 오랫동안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 누구나 쓸 수 있는, 누구의 것도 아닌 것들이 되었다.

이제 노인이 된 소년은 흰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그래, 아직 시간은 있어."


아마 사람들은 물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것이었냐고.

심지어, SF 치고는 너무 단순하고 설정에도 구멍이 많다고.

더구나 마지막 문장이 너무 평범하지 않냐고?

하지만 소년은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든, 자신에게는 걸작이었다고.

그건 내가 누구였는지, 어떤 시절을 견뎠는지, 왜 지금까지 살아냈는지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단서였다.

그 문장들을 훔치지 않기 위해 살아낸 시간이, 나를 작가로 만든 진정한 글이었다.

소년은 비로소, 그 문장을 쓰는 자격이 생긴 것을 느꼈다.

그 문장 끝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려다, 오래 간직해 온 감정을 대신 적는다.


"이 문장은 선생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