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쩌면 외계인의 침략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몰라

협력: 가장 고도한 인류의 문명 02

by Armel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생각을 덧붙여 쓴 글입니다.

**초협력자 클럽에서 있었던 토론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책 <초협력자>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글에서 소개하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살면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인간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주위에는 꼭 한 명, 베푸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있지 않나. 그냥 막연하게 착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이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괜히 보고 있으면 '왜 굳이?' 싶은 사람이 있다. 사실 대학을 다닐 적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나 고민이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그냥 두지 못하고 나서서 도와주곤 했다. 한 후배는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까지 할 정도였다.


대가가 없는 자선이나 베풂을 행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미련하다' 혹은 '멍청하다'라고도 표현한다. 나에게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내 딴에는 좋은 것만 주고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배신당하고 상처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그러나 이제 나는 이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재학 중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배신당한 경험을 토대로 나름 나만의 규칙을 쌓아왔다. 여느 누가 인간관계에서 삐걱거리고 깨달으며 성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고민이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드는 때는 서점에 들를 때다. 어느 서점이든 비소설 베스트셀러 진열대를 보면 인간관계에 관한 책들이 한 켠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부터 <상처 받지 않는 영혼>,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등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은 '나 자신을 지키는 동시에 내 인간관계도 해치지 않는' 혹은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노하우에 대해 이야기한다. 몇몇 책들은 심지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도 등극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이 고민은 지구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전 인류적인 문제가 아닌가?


착하게 살면 호구된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처 받지 않는 법을 고민해서 일까? "착하게 살면 호구된다"라는 유명한, 사람들은 다 아는 우리 삶의 법칙이 있다. 그래서일까? 세상은 정말 나쁜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대학 조별과제에서 내 알바 아니라는 듯 연락 안 되는 사람, 공공장소나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침을 찍찍 뱉는 사람,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면서 변기 커버를 올리지 않고 소변을 보는 (남자) 사람 등 "세상은 정말 무자비할 정도로 개판이구나!"는 걸 절감할 때가 있다.


아아, 과연 그래서인 건가? 우리는 어느 새부터인가 계산적인 사람이 되고 있다.


'이 사람은 알고 지내도 괜찮을 사람인가?'

'이 사람을 도와주면 이 사람도 내가 정말 힘들 때 나를 도와주려 할까?'

'이 사람, 뒤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들 한 번쯤 이러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나? 그리고는 무고한 사람을 두고 의심하거나 수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되려 미안해지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속에 되새기며 자신을 채찍질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 세상이 야박하고 무정한 걸. 순진하고 넉 놓고 있으면 손해보고 빼앗기기 마련이니까. 이건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연한 세상의 법칙이다.


정말 그런가, 이 세상은 정말 70억 명의 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돌아가는 걸까?


죄수의 딜레마: 인간은 갈등할 때 그 본능을 드러낸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라는 유명한 게임이론이 있다. 나는 이 게임을 초협력자 클럽에서 읽은 첫 번째 책인 <초협력자>에서 처음 접했다. 메릴 플러드Merrill Flood와 멜빈 드레셔Mevlin Dresher가 고안한 죄수의 딜레마는 '이해관계가 얽힌 갈등 속에서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는 사람의 원초적인 본능은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라는 인간의 메커니즘을 그린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대대적인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등장하는 은유이기도 하다.


무역전쟁 중 보복성 관세율 인상을 반복하던 미국과 중국의 상황을 죄수의 딜레마라고 표현한 기사


죄수의 딜레마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비협조적인 균형이다. 비협조적인데 균형이라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죄수의 딜레마가 전제로 하는 다음의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경찰은 두 명의 사건 용의자를 체포해 기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용의자들에 대한 물적 증거가 없어 용의자들의 자백에 의해서만 죄를 입증해야 한다 (용의자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두 사람은 격리되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는다. 그리고 검찰은 사건 해결을 위해 두 사람에게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한다.

1. 두 사람은 죄에 대해 진실된 자백을 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2. 두 사람 모두 묵비권을 행사하면 두 사람은 증거 불충분으로 2년만 복역한다

3.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1년을 복역하고 나머지 한 명은 4년을 복역한다

4.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3년을 복역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체포된 죄수 두 명은 공범이고 서로 협력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용의자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시점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협력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더 짧은 형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을 위해 배신자가 될 것인지. 그들이 만약 체포됐을 경우에 관한 논의까지 하지 않았다면 이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저 용의자 중 한 명이라면 당신은 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죄수의 딜레마가 딜레마라고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래의 표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최소 리스크에 대해 배신하는 전략이 항상 우위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협력을 할 경우 용의자가 처할 수 있는 복역기간은 최소 2년에서 최대 4년이지만, 배신을 택할 경우 이는 최소 1년에서 최대 3년이기 때문이다.


"초협력자"에서 발췌


사실 죄수의 딜레마에서 핵심은 담합이다. '조금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다른 이들과 같이 이익을 얻을 것이냐' 또는 '다른 이는 외면한 체 혼자만의 이익을 취할 것이냐'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 게임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구조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많은 사례와 닮아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애국 운동가와 친일파의 갈등 구도는 큰 범주에서 죄수의 딜레마의 예시로 분류될 수 있다. 애국 운동가들은 협력자들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모두를 위해 나라를 되찾고자 했지만, 을사오적을 체결한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 일당은 배신을 행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통해 풍족한 삶을 얻었다. 일제강점기도 그렇고, 기업 간의 판촉경쟁, 석유 수출 기구(OPEC)와 같은 무역과 외교에서의 카르텔 등을 포함한 여러 사례들은 ‘먼저 배신할수록 이롭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수의 딜레마만큼 간단하지 않다


죄수의 딜레마가 초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인 배신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관계를 망치는데 이는 사실 귀여운 수준이다. 이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세상이 70억 명의 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면 우리의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해서 너덜너덜해지고 가까운 사람 한 명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더 무서운 건 공유할 수 있는 자원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게 있다. 가렛 하딘Garret Hardin이 처음 세상에 갖고 나온 공유지의 비극이란, 모두가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그래서 남용될 정도의 자원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는 현상을 말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2명의 플레이어만 전제로 했다면, 공유지의 비극에서 플레이어의 숫자는 제약을 갖지 않는다.


학교 급식시간을 떠올려보자. 학교 급식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반찬은 단연 고기 메뉴다. 수육이나 삼겹살, 닭튀김 같은 메뉴가 나오는 날이면 이 특별한 반찬을 더 조금이라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급식시간에는 (담임) 선생님이나 급식 아주머니들로 인해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지만, 이들이 없다면 학교 급식시간에는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 급식을 먼저 배급받는 학생들로 인해 고기반찬이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고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걸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학생들은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특별한 반찬이 나오는 날이면 자신이 이 반찬을 굳이 더 받지 않더라도 다른 학생들로 인해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때문에 학생들은 기어이 맛있는 반찬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학생들의 머릿속에 가득한 일련의 추론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왜 이것밖에 주지 않는 거지? 다른 애들은 얼마만큼 받은 거지? 다들 한 번씩 받은 뒤엔 (반찬이) 얼마나 남는 거지? 남은 반찬의 양은 또 몇 명이 더 받을 수 있는 거지? 조금 더 받으면 뭐 어때, 애들 수가 우리 반보다 적은 반은 더 많이 먹을 거 아냐. 게다가 남으면 어차피 버려지거나 다른 누가 먹을 텐데.'


급식의 올바른 이용방법은 모든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일정한 양만큼의 밥과 반찬을 배급받는 것이다. 다른 학생을 생각하는 양심 있는 학생들은 고기반찬을 무작정 먹고 싶은 만큼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에서도 보았듯이 인간의 특성상 이 방식이 실천되기란 쉽지 않다. 고기반찬을 양심껏 받은 학생들에 비해 원하는 만큼 고기반찬을 받은 학생은 더 큰 이익을 누리게 된다. 많은 양의 고기반찬을 받는 학생이 등장하고 한 번 이익 계산이 시작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이 특별한 반찬은 빠르제 없어질 것이다. 결국 급식을 먼저 배급받은 학생들로 인해 모든 고기반찬이 없어질 때까지 이 이기의 굴레는 반복된다.


복닥거리는 세상에서 관리되지 않은 공공 자원은
아마도 곧 쓸모없는 무엇이 될 것이다.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는 조금만 양보하면서 이용하면 모두가 편의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하딘이 처음 예시로 든 공유 목초지가 그렇고, 위에서 언급한 학교 급식시간이 그렇다. 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반찬의 양과 배분받을 순서를 정하면 모두가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급식시간에는 선생님과 급식 아주머니라는 중재자가 있고, 우리 사회에는 법과 제도가 존재하듯이, 현실에서 이런 실천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란 쉽지 않다.


공유지의 비극을 통해 엿본 학생들의 태도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태도와 얼핏 비슷하다. 공원에서 애완견과 산책할 때 애완견이 저지른 변을 치우지 않고 그냥 간다던가. 지하철에서 음료수나 음식물을 바닥에 쏟고 나 몰라라 한다던가. 팀 프로젝트를 할 때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의 몫을 다 하지 않고 동료에게 떠넘긴다던가.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동체 전체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우리는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상황에 치여 어쩔 수 없이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어떤 이유던 간에 한 가지로 축약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더 큰 이익이 되니까' 혹은 '그게 나에게 더 편리하니까.'


앞서 본 죄수의 딜레마는 "먼저 배신할수록 이롭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공식이 보다 복잡한 공유지의 비극에서도 적용될 수 있으며 일상에서 흔히 접하고 있음을 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먼저 배신할수록 이롭다니. "착하게 살면 호구된다" 같은 말이 있듯이, 죄수의 딜레마는 우리가 현실을 보다 지혜롭게 살게 하기 위해 조언하는 것일까? 우리가 길을 걷다 껌을 밟고 개똥을 밟은 이유가 모두 이 때문이며, 무임승차자 때문에 대학 조별과제에서, 팀 프로젝트 업무에서 밤을 새우는 이유가 모두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살면서 배신하는 게 지혜로운 선택인 걸까? 정말 배신이 정답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어떻게 인간 사회는 아직까지 붕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을까?

어째서 우리의 곁에는 마땅한 이익이 주어지지 않아도 협력자들이 등장하는 걸까?



<초협력자>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다섯 가지 법칙


다시 한 번 이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전 지구의 70억 인구가 모두 이기적이라면 인류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긴 세월의 역사를 갖고 있고 아직까지 건재하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협력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저자인 노왁은 죄수의 딜레마에 자연선택의 과정을 입혀 시뮬레이션을 반복적으로 돌려 한 종의 번성의 과정에 있어 배신을 이기는 협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그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존재해온 이 협력을 가장 기본이 되는 다섯 가지 체계로 나누어 소개한다.


1. 직접 상호성 - 직접 상호성에서는 팃포탯(Tit for Tat)이 기본이 된다. 팃포탯이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의미로 여기서는 "네 등을 긁어줄 테니 내 등을 긁어다오"라고도 해석된다. 도움을 베푼 이에게 이후의 보답을 바라며 이타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협력 체계이다.


2. 간접 상호성 - 간접 상호성에서는 '평판'이 핵심이 된다. 한 집단에서 한 개인의 남을 향한 행동은 그 개인의 평판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그 사람은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인가에 관한 평판과 신뢰를 형성한다. "내가 당신의 등을 긁어주리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내 등을 긁어주겠지"라고도 요약될 수 있겠다.


3. 공간 구조 - 죄수의 딜레마에 지리적 요소를 도입한 사례이다. 사회적 네트워크 또는 공간 구조는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다. 특정 구조 안의 개인은 특정한 인물들과 더 주기적으로 상호 소통하고 교류한다.


4. 집단 선택 - 협력자들로 구성된 집단은 배신자들로 구성된 집단보다 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다. 단, 조건이 한 가지 있다. 이 구조에서 협력은 많은 소집단이 존재할 때 잘 작동하고 몇 개의 거대한 집단이 존재할 때 취약하다.


5. 혈연 선택 - 혈연적 유대가 주가 되는 혈연 선택에서 개인은 가까운 친족과 협력하고 낯선 이는 배신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 형제자매가 물에 빠졌을 때 더 망설임 없이 뛰어든다.


어쩌면 생소해 보일 수도 있는 이 다섯 가지 체계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협력의 법칙이다. 친구와의 만남에서 돌아가며 술을 사는 직접 상호성부터 원활한 회사생활을 위해 이미지(평판)를 신경 쓰는 간접 상호성, 평판 관리 덕분에 재취업이나 이직에 성공하는 공간 구조, 그리고 모든 조원들이 자기 할 일을 하는 조가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유리한 사실을 암시하는 집단 선택과 조국이나 김성태의 자녀 특채를 가능하게 하는 혈연 선택까지. 우리는 이미 이 법칙을 통해 남들과 상호 교류하며 협력해왔으며 지금도 협력하고 있다.


노왁은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적합한 개체를 솎아내는 진화의 과정에서 협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파헤쳤다. 그는 '협력은 진화의 가장 능숙한 설계자'이며, 지구촌에 약 40 억년 간 걸쳐 일어난 진화는 모두 협력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협력은 불안정하다고 한다. 각각의 체계마다 배신과 위험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며 진화하는 순환을 갖는 게 이 다섯 가지 협력 메커니즘이며, 인간은 이 모두를 다룰 수 있는 종, 그래서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를 뛰어넘는 초협력자다.


협력의 딜레마


초협력자 클럽에서 책에 대한 내용에 대한 소감을 주고받은 뒤 이 협력의 법칙이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토론을 나누었다. 흥미롭게도, 다섯 가지 협력의 법칙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렌즈는 물론이고, 특정 상황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도 있다. 이 활용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체적인 사건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고민하는 기본적인 인간관계,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관계에서까지 용이할 수 있다. '나는 과연 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해주는 게 좋을까'부터 '이 사람과의 관계를 어디까지 내다보아야 할까' 같은 연애관계에서 고민하는 우리의 태도와 처우를 이 법칙을 통해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썩 재밌는 시뮬레이션이었다.


클럽장님은 이 같은 장황한 적용 가능성의 이면에 이 협력의 법칙은 피할 수 없는 딜레마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협력과 배신의 기로에서 하는 고민은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 상충한다'라는 본질에 있다는 점. 즉, 사익과 공익은 사실 분리된 구조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에는 균형이 있다고 했던가. 우리가 협력과 배신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어느 쪽을 선택하던 다른 한쪽은 선택받지 못할 때의 결과가 선택받을 때의 결과보다 못하듯이.


<초협력자>에서 노왁은 현대의 인류사회는 기후위기나 인구문제와 같은 이전과는 규모가 다른 위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에 협력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우리 모두의 미래에 총구를 겨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에어컨 사용과 탄소 배출에 신경 쓰지 않는 등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한 인지와 해결을 위한 노력은 정작 찾아보기 힘들다. 배신당해 협력에 실패해도 끝나지 않았던 이전과는 달리, 기후위기 같은 문제는 '다음'이 없기에 더욱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이 있음에도 말이다. 이 기후위기 해결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원인에도 우리의 협력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이 딜레마 때문이라는 본질이 있었다. 이를 두고 클럽장님은 말했다. 전인류가 즉각적으로 협력에 성공할 수 있는 때는 지구가 외계의 침략을 받을 때밖에 없다고.


어쩌면 우리는 외계의 침략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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