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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검정 끈 민소매만 입는다. 주로 자라나 H&M 매장 입구 19,000원 가격표를 단 행거에 쭉 걸린 그 아이템말이다. 앞섶과 등판은 속옷 라인 바로 위까지 파여있고 살짝 들어간 옆라인과 바지 허릿단에 간당하게 떨어지는 기장, 낙낙한 품에 만만한 폴리에스테르 소재다. 편하게 나갈 땐 얇은 카고팬츠에 슬리퍼와, 조금 신경 쓰고 싶은 날엔 딱 붙는 청바지에 굽 높은 샌들, 실버 귀걸이면 완전 다른 옷이 된다. 이 더운 여름 옷 고민에 땀 흘리며 입었다 벗었다 안 해도 되니 목욕탕의 살얼음 식혜처럼 자꾸만 손이 간다. 하지만 친구들은 주구장창 그 옷만 입는 게 지겨운지 “그놈의 까만 난닝구 보니 여름이네!” 한다.
까만 난닝구가 나의 여름 교복이 된 건 아마도 7년 전 초여름에 나간 마라톤 대회 때부터다. 주최사에서 준 참가 티셔츠를 입고 땡볕에 광안대교를 뛰고 나니 반팔라인으로 팔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그해 여름은 그 참가 티셔츠보다 짧은 소매 옷은 입질 못했다. 이럴 거면 여름 내내 아무 옷이나 입게 평소에도 팔을 최대한 드러내고 다니자 했다. 무더위의 정점, 8월의 대구 태생답게 특수 멜라닌 색소가 DNA에 탑재된 건지 어릴 때부터 더워지면 강아지 털갈이마냥 어딜 안 가도 피부가 까매졌다. 태닝오일을 안 발라도 얼룩덜룩 자국이나 허옇게 벗겨지는 뱀비늘 없이 돈 주고 태운 것보다 골고루 잘 타니 폭양이 두렵기는 커녕 오히려 돈을 번 기분이었다. (실제로는 파운데이션과 립스틱 컬러를 다 바꾸느라 태닝샵 회원권만큼은 썼겠지만). 그래서 꽁꽁 싸매기보다 햇빛을 흠뻑 받는 편을 택했다. 왼쪽 광대에 여름을 사랑한 훈장이 주근깨로 콕콕 박혔다.
몇 달 전 괜찮은 동네 산책 코스를 발견했다. 서해 끝자락에 사는 덕에 집에서 인천대교가 보이는 해변공원까지 왕복 3 킬로미터면 된다. 저녁 산책으로 종종 가던 그 길을 여름맞이 다이어트를 위한 아침 공복 러닝코스로 몇 번 뛰었다. 나이키 드라이핏 블랙 민소매에 에어팟과 애플워치까지 장착하고 달렸다. 내딛는 뜀마다 러닝머신에선 절대 못 느끼는 다이내믹한 접지력, 메트로놈처럼 진자운동하는 포니테일의 알레그로 박자에 몸이 따끔대다 곧 뜨거워졌다. 눅진한 회청색 공기가 인천대교 너머까지 내몰린 해면을 수제비 반죽 치대듯 방파제로 밀어내다 말고 내 어깨와 팔을 끌어안았다. 밤 산책 때 본 그득한 바다의 일렁임은 꺼지고 빈곤한 진흙 벌의 민낯만 드러난 아침. 하지만 아침도, 바람도, 바다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고 진득이 포복할 뿐. 눈앞에 펼쳐진 태양의 무한한 아량과 바람의 무구한 성정, 바다의 무진한 음률이 맨살에 스미자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러닝화에 숨겨진 새끼발톱 아래 연한 피부의 한 톨 감각까지 깨어났다. 조준한 새총처럼 명치에서 이탈한 조급함이 스르륵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작은 움직임이 너무 거대하고 당연하게 나를 감싸고 있던 태양, 바람, 바다를 분해시켰다. 자연의 분진이 표피에 닿자 자연과 나 사이 아무런 방해 없는 존재의 각성에 울컥했다. 그래서 나는 살결이 드러나는 옷을 좋아했나 보다. 한낱 미물이 최대한 자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리야나마스카라 : 어느 요가 수업을 가도 기본 상차림처럼 나오는 '태양 경배 자세'. 똑바로 서서 손을 하늘로 뻗었다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다시 일어나는 플로우를 반복한다. 길이 2미터, 폭 60센티미터 안팎의 요가매트 안에서 태양을, 자연을 한껏 품었다 되돌려주는 호흡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