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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아론 Oct 15. 2021

[사례 17] ‘가스 라이팅’을 하는 여자 친구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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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7] ‘가스라이팅을 하는 여자 친구



이십 대 후반의 남자가 상담소를 찾아왔다. 여자 친구가 너무 무섭고 두렵다는 것이었다. 여자 친구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내담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채팅으로 서로 대화를 하다가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오프라인 만남을 가졌다. 실제로 보니 더 마음에 들었다. 여자는 굉장히 활달하고 밝고 얼굴도 예뻤다. 그녀는>20대 중반으로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팀장까지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관심을 보이며 결국 사귀기로 했다.


내담자는 너무 행복했다. 여자 친구랑 너무 잘 맞았다. 이런 여자를 또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100일이 지날 무렵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데이트를 하면 여자 친구가 전혀 비용을 부담하지 않았다. 자신이 밥을 사면 커피라도 사야 하는데, 그녀는 모든 비용을 내담자가 내도록 했다. 하지만 데이트 비용은 모두 자신이 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카톡이었다. 여자 친구는 카톡을 조금이라도 늦게 보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겨우 짬이 나서 카톡을 확인하면 5분 간격으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왜 연락 안 해?’

‘내 말 씹어?’

‘카톡 보는 거야, 마는 거야.’

‘시발, 뭐하냐니까.’


심지어 욕설까지 했다. 내담자가 일하느라 못 봤다고 하면, 여자 친구는 그렇다고 한 시간씩이나 휴대폰을 보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내담자가 바빴다고 하면 여자 친구는 이런 식으로 따졌다.


‘내가 한 시간씩이나 카톡 안 하는 거 봤냐?’ 

‘나는 일 안 하냐?’ 

‘너만 바쁘냐?’ 

‘네가 그 정도로 일을 잘하냐?’ 


이런 소모적인 싸움이 싫어 결국 사과를 했는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자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하면, 여자 친구는 일부러 비싼 가게만 갔다. 내가 이 정도로 화났으니 당해 보라는 심보였다. 또 카톡 문제로 싸우고 횟집에 갔을 때였다. 여자 친구는 이번에도 먹지도 못할 회를 마구 시켰다. 왜 이렇게 회를 많이 시키냐고 물으면, 여자 친구는 이 정도도 못 해주냐고 따졌다. 


먹을 때도 시비를 걸었다. 내담자가 쌈을 싸 먹으면 여자 친구는 “너만 입이냐?” “너만 처먹냐?”라며 감정적으로 말했다. 내담자가 회를 싸서 주면, 손을 탁! 치면서 “네가 준 거 안 먹는다.”며 토라졌다. 도저히 그녀의 기분을 맞출 수 없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고, 어느 때는 선물을 사달라고 강요했다. 카톡부터 시작해서 조금만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만 하면, 내담자에게 “멍청하다.” “머리에 똥만 들었냐.” “병신이냐.”라며 비난을 했다. 


어느 날은 여자 친구가 아파서 회사에 결근한 적이 있었다. 내담자는 회사를 마치고 전화를 해 오늘 심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 친구는 또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직장 안 갔다고 심심하겠냐. 내가 일 안 하니까 심심한 것처럼 보이냐. 사람이 아프면 오늘 아팠지. 힘들었지? 이렇게 말하는 게 정상 아니냐. 넌 대가리가 돌이냐, 병신이냐, 생각이 없냐.” 


이런 식으로 감정을 퍼부었다. 내담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헤어지자고 했다. 그러자 더 난리가 났다. 여자 친구는 “내 피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은 다음 헤어지자고 그러냐?”면서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심지어 손목을 그은 뒤 철철 피가 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기까지 했다. 내담자는 너무 놀라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됐으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여자 친구가 내담자에게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다. 내담자가 야근이 많고 심지어는 주말까지 일할 때도 있어 데이트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황당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고, 나름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있는데, 이유가 어이없었다. 내담자가 싫다고 하자 그 순간부터 또 지옥이 열렸다. 여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또 내담자를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자기가 다른 회사를 알아봤으니, 거기에 다니라고 강요했다. 근무시간도 짧고 주말에 쉴 수 있는 회사였다.


내담자는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수락해 버리고 말았다. 여자 친구에게 계속 당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공포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내고, 욕하고, 비난하고, 인격 모독을 하고, 헤어지자고 하면 죽겠다고 겁박하고, 실제로 자해까지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 친구가 알아봐 준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여자 친구는 몇 개월 후 아예 회사를 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취하고 있는 자기 집에서 동거하자고 제안했다. 자기가 혼자 돈을 벌 테니까 집에만 있으라는 것이다.


내담자는 부모님 때문에 동거는 못 한다고 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러면 회사만 그만두라고 했다. 내담자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려야 해서 못한다고 했다. 여자 친구는 자기가 용돈을 드릴 테니까 그만두라고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다. 결국 내담자는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아침에 회사를 나가는 척하면서 여자 친구 집으로 갔다. 이런 생활을 2개월 동안 하다 보니 회의가 왔다.


‘내가 왜 이러고 살지?’

‘왜 이렇게 무능하게 이러고 있지?’  

‘왜 이런 삶을 사는 거지?’


하루하루가 비관적이었다. 여자 친구는 내담자가 집에 있으면서 더 막 대하기 시작했다. 무시는 기본에, 막말에, 욕설에, 모든 감정을 퍼부었다. 예를 들어 방에 뭐가 떨어져 있어서 주우라고 시켰는데, 행동이 굼뜨면 “야 병신아, 빨리 좀 해.” “멍청한 새끼야.”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설거지나 청소, 밥을 제때 안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 다녀왔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욕을 퍼부었다. 


“너, 내가 이거 해놓으라고 했지?” “놀면서 뭐 했어?” “병신같이 이럴래?” 

언어폭력에 신체적 폭력까지 행사하기 시작했다.


내담자는 자신이 정말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펫이 되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도망이었다. 내담자는 집으로 도망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 친구는  집 앞으로 찾아와 카톡을 해대며 겁박하기 시작했다. 


‘지금 집 앞이니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나 들어가서 너네 부모님한테 난리 칠 수 있다.’ ‘지금 안 나오면 정말로 깽판 칠 거다.’

내담자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고, 여자 친구의 집으로 끌려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내담자는 몰래 여자 친구의 집을 나왔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도망을 갔다. 부산에 있는 회사에 다녔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여자 친구가 3일 만에 일하는 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날 또다시 여자 친구에게 끌려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더는 여자 친구에게 사랑의 감정도 없었고, 공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거 같아 여자 친구가 회사 간 사이에 상담소에 찾아온 것이었다.


원장님은 내담자 팔뚝에 할퀸 자국을 보며 입을 뗐다.

“그동안 정말 힘들었겠네요. 얼굴하고 팔뚝에 할퀸 자국이 있는데, 이것도 여자 친구가 한 거예요?”

“…네.”

“여자 친구를 사랑하세요?”

“아니요. 그런 감정 이제는 1%도 없어요….”

내담자의 얼굴에는 공포와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원장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여자 친구가 환자네요.”

“환자요?”

“네, 여자 친구가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우선 기본적으로 애정결핍이 있어요. 애정결핍은 성장 과정 중 부모님에게 사랑받지 못하거나,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을 때 나타나요. 아니면 외상 후가 있거나, 감각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여자 친구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없어지면 분명히 죽으려고 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저를 찾아낼 거예요. 이럴 땐 어떡해야 하죠?”

“일단은 여자 친구를 상담소에 데리고 오셔야 해요.”

“네?”


내담자가 눈을 크게 떴다. 몰래 상담소에 왔다는 것 자체를 알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운 모습이었다. 원장님이 이유를 설명했다.


“아까 진호 씨가 뭐라고 하셨어요? 마치 내가 펫이 된 기분이고, 내 삶이 없는 거 같다고 하셨죠?”

“네.”

“바로 그거예요. 그걸 여자 친구가 알아야 해요.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남자 친구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또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해요. 지금 여자 친구는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진호 씨가 여자 친구에게 벗어나려면, 숨는 게 아니라, 여자 친구가 스스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깨닫고 행동에 변화가 와야 하는 거예요. 이게 되지 않으면, 서로 숨고 찾는 게 계속 반복될 거예요. 정말로 누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내담자는 고민에 빠졌다. 여자 친구에게 도망치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터였다.


“알겠습니다. 한번 설득해 볼게요.”

“그래요. 내가 너무 힘들어서 상담소에 가봤는데, 상담소에서 말하길, 나와 너 둘 다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 가서 상담을 받고 우리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이렇게 말해보세요.”

“네….”

그렇게 내담자는 첫 상담을 마치고 상담소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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