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에게 아무리 유복하고 배부르고 편안한 환경이라도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 있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눈치를 보고 자랐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이셨고 어머니는 주부셨는데 나는 엄마 아빠가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해줬던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빠는 힘들게 돈을 벌었지만 엄마는 늘 쥐꼬리 월급이라며 화를 냈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늘 커다란 아파트에서 불을 다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곤 했다.
나는 집에 엄마 혼자 있을 때가 가장 싫었다. 엄마 혼자 있으면 분위기가 너무 음울하고 언제 또 소리를 칠지 걱정되어 긴장상태로 엄마 눈치만 살폈다. 이웃집 아줌마가 우리 집에 와 있기를 항상 간절히 바랬다. 그때는 분위기가 화기애애했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맛있는 삼겹살, 갈비, 고급 레스토랑을 가더라도 엄마는 늘 혼자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거나 시키더라도 모래 씹어먹듯 힘겹게 씹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집중하지 않았던 얘기를 갑자기 꺼냈다. 내 성적 결과가 반에서 10등 안에도 못 들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늘 눈치가 보였다. 돼지갈비가 모래알 같기도 하고 소화불량은 자주 앓았다. 그래서 어딜 놀러 간다 해서 딱히 신났던 적이 없다.
엄마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싫어했다. 아버지는 교사이지, 의사나 교수,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월급을 받는 날이 제일 불편했다고 한다. 쥐꼬리 월급이라며 소리를 질렀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참거나 못 견디면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함부로 싸우면 안 됐다. 엄마가 칼을 들고 덤벼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울며 겨자 먹기로 참아야 했다. 엄마의 화풀이는 모조리 내가 감당했다. 삼촌이 대학 교수가 되자 너는 서울대에 가서 삼촌보다 더 똑똑한 교수가 되라고 했다.
이건 나에게도 적용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 90점을 맞았다. 100점이 아니었기에 엄마의 잔소리를 어느 정도 들을 것도 예상했지만 그래도 높은 점수인 게 자랑스러웠다. 집에 가자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엄마에게 내가 받아쓰기 90점 맞았다하자 왜 100점이 아니냐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성적 강박은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학교에서도 항상 위축되고 집에서 비로소 편해졌지만 성적이 안 좋은 날은 집에 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렇다고 늦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건 일종의 일탈로서 내 인생이 거지가 될 것이라는 걸 암시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사회에서 45점을 맞은 기억이 난다. 평소 80점 이상은 받아야만 했던 내가 45점을 맞은걸 보자 어린 나이에도 절벽에 내 몰린 기분이었다. 천만다행히 도 그 성적은 엄마한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항상 엄마가 하는 비교였다. 내가 성적 못 받아서 혼나는 것보다 다른 애들보다 못해서 혼나는 게 제일 견디기 힘들었고 그때는 나도 따졌다. 따지면 엄마는 화를 내는 기색조차 없이 얘가 무슨 소리하는 거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90점을 받으면 누구는 몇 점 맞았어? 는 항상 뒤따라왔다. 내가 점수를 못 받으면 누구는 100점 맞았다더라. 내가 공부를 안 하면 누구는 매일 몇 시간씩 한다더라.
반대로 내가 성적을 잘 못 받았어도 다른 애가 나보다 못 받았으면 나는 칭찬을 받았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서,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었다는 이유로 칭찬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오직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칭찬받았다.
이런 성향은 중학교 때 극심해졌다. 중1 첫 중간고사 때 평균 88점을 맞았는데 아이들이 왜 이렇게 잘 봤냐고 했다. 나는 자랑스러워서 엄마한테 그걸 말했다. 엄마는 갑자기 조용히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나는 엄마가 왜 저러지? 하고는 영어 과외를 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가시려 하자 엄마가 방에서 나왔다. 엄마 표정을 보니 울었던 흔적이 있었다. 엄마가 울었던 이유는 90점을 못 넘어서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다음 기말고사에서 평균 89점을 맞자 나는 책상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애들이 내가 왜 우는지 알자 어떤 애는 재수 없다고 했다. 내가 중간고사 때 엄마가 울었다고 털어놓자 애들이 너네 엄마 왜 그러냐?라고 했다. 그때부터 엄마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엄마가 이웃집 아줌마한테 우리 아들은 책 매일 50쪽밖에 안 읽는다고 하자 이웃집 아줌마가 그래도 그 정도 읽는 게 어디냐고 했다.
이런 성적에 대한 강박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성적에 관해 직접적으로 터치를 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네가 머리가 좋으니까 너의 머리면 옆집 누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든지, 너는 무조건 서울대 갈 수 있다라든지 중학교 때 이 정도 성적(전교 중상위권)이면 고교 때 열심히 하면 서울대 감이다라든지, 너의 영어실력은 이미 웬만한 고교생을 뛰어넘는다는지, 사촌동생 누구를 대며 걔 별것도 아니잖아?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내가 아버지한테 난 고려대 가면 어떨 거 같아?라고 묻자 서울대 가야지라고 하셨다. 나 정도면 대학 교수도 쉽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아버지의 언어습관은 요즘도 있다. 내가 대학 과제를 했는데 그 과제 분량이 100쪽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건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누구나 100쪽은 넘게 되어있다. 그런데 100쪽 이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건 과제가 아니라 논문 수준인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오직 공부만이 최고고 공부 못하는 인생은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건 아니다.
아버지는 지금 중학교 중상위권으로도 충분히 서울대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중학교 때 나는 서울대 갈까 카이스트 갈까, 의대 갈까, 경찰대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공부를 열심히 못했고 성적은 그저 그런 수준으로 머물렀다.
게다가 나는 내가 똑똑하다는 근거도 없으면서 공부 못하는 애들을 속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마음이 강했다. 사실 이건 내가 일부러 무시했던 건 아니고, 나를 괴롭히던 애들에게 저항할 수 없어서 나 혼자 위안을 삼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실제로 내 친구 중엔 공부 못하는 애들도 많았고 난 걔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공부 잘해야만 한다는 신념은 분명해서 친한 친구들이 공부를 못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을 했다. 사실 그렇게 큰 일도 아닌데.
나는 어릴 때부터 체질적으로 약했고 소심했다. 훗날 원장님께 그 이유를 들어보니 엄마는 공포가 심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한다. 그리고 집안에서 늘 싸우는 모습만 보고, 항상 눈치를 보고, 엄마가 소리 지를 것을 걱정하니 너의 소심함이나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라 했다.
*학교에서 기가 죽고 혼자 조용하게 있는 것은, 부정적인 가정환경의 영향이 아주 크다.
나는 학교 다닐 때 항상 눈치를 보곤 했고, 강한 아이, 약한 아이를 먼저 분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강한 아이라고 판단하면 걔가 무슨 말을 하든 늘 주눅이 들고 목소리도 떨었다. 그래서 나는 좋은 괴롭힘의 표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3까지 괴롭힘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초6은 지옥 그 자체였다. 애들이 툭하면 불러서 레슬링을 했고 때로는 그게 잘못돼서 허리가 아파서 고생했다.
아니면 재킷을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구타하고는 여자화장실에 밀어 넣기도 했다. 그때 여자애들 비명이 들렸다. 아니면 돌아가는 의자에 앉혀놓고 여러 명이서 죽어라 돌렸다. 머리를 얻어맞고 너무 어지러워서 원통했다. 수학여행에서도 옷을 벗기거나 아니면 친구와 얘기하면서 나한테 비비탄을 쐈다.
그런 초6을 거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면 강한 아이에게 맘에 들까 고민하다 보니 거짓말을 하거나 맘에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기세가 약해서 늘 맞았고 나랑 잠바가 같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는 등 모멸감은 계속 들었다.
그때 나름 학원도 다니고 부모님 강압도 있었으므로 성적은 어느 정도 내고 있었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떠올랐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해도, 나는 늘 욕을 먹었고 맞았고 괴롭힘 당했고, 무시만 당하자 나는 그때부터 공부를 잘하면 뭐해? 어차피 항상 무시당하는데. 공부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라는 생각이 점점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공부를 해도 별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계속 들었고 훗날 내가 엘리트가 된들 그게 그렇게 의미가 있나?라는 회의에 빠졌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못하더라도 인기가 많은 아이가 보였고 나에 대한 무시나 괴롭힘은 반복되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런 나를 모르고 미래가 확실하지도 않은 공부로 자꾸 날 몰아붙이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현재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저 성적만으로 악바리를 질러대는 엄마를 보며 점점 화가 나고 모든 게 지겨워졌다.
고1에 소위 외고를 들어갔으나 나는 이미 공부에 대한 기대를 다 접어버렸고, 공부보단 뭔가 더 중요한 게 있을 거란 기대, 그리고 예전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따돌림,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나는 자꾸 일진 행세를 하며 센척했다. 그리고 공부 집중도는 떨어졌다.
그 당시에 나는 엄마가 인간적으로도 모자란 거 같다는 인식을 했다. 엄마에겐 원칙이 없었다. 내가 혼나고 말고는 늘 엄마 기분에 좌우됐다. 엄마는 늘 방에 불을 끄고 잠만 잤으며, 이불속에서 공부해 학원가만 반복했다. 그리고 성적을 받는 날은 무지하게 칭찬하거나 무지하게 때렸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자신과 아버지를 늘 다른 가족과 비교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엄마는 집 밖에서는 소심 그 자체였다. 모임에서도 늘 가라앉아있었고 누가 말 걸면 두렵다는 듯이 회피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옆에 나에게 잔소리를 했다. 학부모의 봉사 같은 것도 엄마는 나가지 않았고, 나가더라도 잔뜩 긴장한 채 벌벌 떨고 실수했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 잘못된 걸 얘기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때로는 울부짖었다. 엄마는 대화가 전혀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아빠한테 털어놓자 아빠는 엄마한테 화를 냈고 엄마는 분해서 나를 발로 찼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 공부에 대한 회의, 대인관계 공포, 과거에 대한 분노 등으로 나는 고교 때 외톨이가 되어버렸고 결국 자퇴했다.
과거에 어머니와 아버지 모습을 제가 예전에 느꼈고, 어떻게 심리적 증상이 나타났는지 쓰려면 본의 아니게 어머니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쓸 수밖에 없었네요 ㅎㅎ
제 부모님은 현재 저한테 과거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과해주셨고, 요새도 제가 갑자기 짜증을 낼 때마다 묵묵히 참아주시는 고마운 분들입니다 ㅎㅎ
그리고 제가 부모님을 원망한 게 제가 도리에 맞지 않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니까 지금은 부모님께 엄청나게 죄송하게 생각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부모님한테 항상 웃고 잘해드리려고 노력합니다 ㅎㅎ 이제 제가 못 해 드리면 제가 잘못하는 입장이 될 만큼 부모님은 최선을 다 해주시니까요. 그래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ㅎㅎ
*심리치료에서 환경치료가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부모가 자신들의 지난날을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예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과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녀가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모든 게 풀어지거나 용서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 보냈는데, 한순간 모든 게 풀어지길 바란다면, 이 또한 부모의 오만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사과를 받아도 언제든지 화낼 수가 있다. 이번에는 부모가 잘못한 게 없는대도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다. 조금이라도 부모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불같이 화를 낸다. 이때 부모는 절대로 자녀와 부딪히며 똑같이 싸우면 안 된다. 자신들이 지난 세월 동안 자녀를 힘들게 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녀가 화를 내면 사과하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
그리고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 자녀도 인지를 하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과거완 달리 현재는 많이 변했다고. 부모님이 나를 위해 사과하고 용서하고 행동에 변화가 왔다고. 이걸 느끼는 순간, 자녀도 가슴에 진 응어리가 풀어진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을 인지하고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지 않는다.
때문에 부모는 반드시 자녀가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는 이 기간을 이겨내야 한다.
인내하고 참고 사과해야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어긋나게 된다.
때문에 심리치료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심리치료는 상담사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부모도 함께 반드시 자녀를 위해 도와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