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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쁜파크 Dec 08. 2023

The End

<햄릿>


© comparefibre, 출처 Unsplash

처음으로 낭독 독서 모임을 진행했다. 매주 월요일 밤 10시 줌에서 열명 남짓의 사람들과 1시간가량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읽었다. 아니, 한 명씩 돌아가며 <햄릿>의 대사를 내게 읽어주는 듯했다. 4주의 낭독이 진행되어 갈수록 각자의 목소리 개성이 파악되고 대사마다 고유함도 살아나면서 낭독해주는 대사를 듣는 따뜻함이 커졌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그리 좋아하던데 '이런 느낌이었을까' 낭독을 들으니 새삼 와닿는다.



한 달의 낭독이 마무리되던 주 토요일은 <햄릿> 팟캐스트 녹음이 있었다. 이번 팟캐스트에선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부담감을 누르며 준비한 자료를 읽다가 지하철 환승역을 지나칠 뻔했다. 허둥지둥 뛰어내려 사람 많은 잠실역을 걷는데, 유독 심한 긴장과 말하기 부끄러운 탓에 어렵게 느껴지던 팟캐스트 녹음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죽음이 이제 오면 장래엔 아니 올 테고, 지금 오지 않는다면 장래에 올 테고, 지금이 아니라 해도 앞으로 반드시 올 것이네. 준비가 제일 중요하지.

p.212 <햄릿> 문학동네


<햄릿> 마지막 5막에서는 누구든 죽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며,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남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인생에 죽음이라는 끝이 있듯, 크고 작은 모든 일에도 끝이 있다.


젖 먹이며 아이들 키우던 시기에는 잠만 좀 푹 자봤으면 좋겠다 바랬는데 그 시기도 끝났고, 기저귀만 떼도 짐이 크게 줄 것 같고 이유식 떼면 어디서든 편하게 일반식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시기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때는 인생 최대의 멘붕을 겪듯이 보냈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학령기, 청소년기가 되니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현재 아이들의 모습을 더 응시하게 된다. 많이 큰 것 같은 현재의 모습도 끝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기에.


© markusspiske, 출처 Unsplash


아이를 임신해서 뱃속의 아이와 교감하며 유일하게 한 몸으로 지내는 일은 대체될 수 없는 값진 시간이다. 하지만 아이 출산 후 아이를 재우고,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 크면서 아이의 학습을 봐주는 일 등은 엄마가 아니어도 누군가에 의해 대체가 가능하다. 그럼 대체되지 않은 엄마로서의 가치는 무얼까?


요즘 알레르기 프리 베이킹을 하면서 일반 빵에 들어가는 밀가루, 달걀, 우유, 버터 등을 대체할 식품을 찾는다. 밀가루 대체제, 달걀 대체제로 쌀가루, 두부, 병아리콩, 사과 식초 등을 사용하지만 일반 빵만큼 폭신하게 부풀거나 쭉 늘어나는 식감은 없다. 하지만 그 대체제만의 역할로 비건, 글루텐 프리 빵이 그럴싸하게 만들어진다.  


아이가 알레르기로 일반 빵을 먹지 못하고 음식이 극히 제한되어 있지만 '그래도, 괜찮구나.'라는 생각을 품도록 도와주는 것, 밖에서 열심히 일상을 보내고 왔지만 큰 성과 없이 빈손으로 허탈하게 돌아올 때, '그 빈손도 괜찮다.'라는 힘을 갖게 해 주는 부분은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0대 회사 생활을 할 때,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 주는 유독 바빴다. 진행 중인 M&A 케이스들이 어떤 상황이고 무슨 일정이 있는지 등을 리스트 업 하고 나의 자리를 대신해 줄 사람에게 세세히 설명하는 업무가 평소의 바쁜 상황에 더해진 만큼 휴가 전은 특히 분주했다. 그렇게 떠난 1주일 휴가 후, 다시 돌아온 나의 자리에는 1주일간의 업무가 쌓여 있지만 내가 없다고 크게 잘못된 일은 없었다.


첫째 육아휴직 후 결국 퇴사를 결정했을 때,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오랜만에 회사에 갔다. 여러 층을 돌며 인사를 드리는 도중, "에이스가 나가면 어떻게 해."라는 말을 들었다. 4학년 2학기 때 시작한 나의 사회생활이 마무리되는 섭섭한 마음에 위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내 자리는 잘 대체되고 회사도 아주 잘 돌아갈 것을 안다.


<햄릿> 속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5막에서 덴마크 왕족이 모두 죽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햄릿의 선왕에 이어 왕이 된 숙부 클로디어스, 왕위를 계승할 수도 있었던 햄릿, 그리고 다시 왕좌를 놓고 정치적 고민을 했을 왕비 거트루드까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왕족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도 왕좌는 대체된다. 폴란드에서 승전하여 계란껍데기만한 작은 땅을 얻은 후, 자국으로 돌아가던 노르웨이의 포틴브래스가 덴마크의 새 국왕으로 선출된다. 한 나라의 왕도 대체되는데 대체되지 않을 지위가 있을까.


The readiness is all. 준비가 제일 중요하지.

한번 던져진 세상의 끝을 죽음으로 상기시키니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 나갈지 그 끝을 준비하는 것이 전부라는 영어 원문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연말이라는 끝이 있기에 며칠 남지 않은 23년의 시간이 더 아쉽고, 여전히 무릎에 앉아 나의 품에 안기는 아이와의 포옹도 끝이 있기에 애틋하고, 지겨운 학교 생활도 졸업이라는 끝이 있기에 한정된 경험이 소중하다.


엄지작가와 함께하는 팟캐스트가 얼마나 지속될지, 사정상 내가 먼저 그만둘지, 어떤 식으로든 마지막은 있을 테다. 우리의 팟캐스트가 멈춰도 크게 변할 건 없고, 내가 있던 자리는 다시 채워지겠지. 잠실역으로 들어오는 2호선으로 갈아타고 나니 멈춰도 변할 것 없는 자리지만 나다운 느낌이 깃들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팟캐스트 녹음을 위해 모인 우리의 책 수다가 더 값지게 다가온다.


And most importantly, you must be realistic. If you overplay your role, you defeat the whole purpose of theater, which is to represent real life.

3막 2장 <Hamlet>


연극은 인생이며, 극장은 우리 인생을 담은 소우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 셰익스피어. 그는 <햄릿>에서 '쥐덫'을 연기하려는 배우들에게 자신의 인생관을 담은 조언을 한다. overplay 하면 인생을 대표하는 연극 전체도 망칠 수 있다고.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나의 자리이지만 나의 느낌과 이야기는 대체되지 않고 남을 것이기에 과장하지 않고 나다운 모습으로 내게 주어진 역을 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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