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문명의 세계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아픔, 병, 늙음, 눈물이 없다. 만인은 만인의 소유이므로 개인 간의 친밀한 관계도 없다. 어느 특정 한 명을 너무 사랑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이 큰 걱정거리다. 연인, 친구, 가족이 없고, 가족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이름은 특히 불경스러우며 상스러운 단어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어머니로 그려진 인물이 등장한다. 문명 세계에 살던 '린다'가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휴가를 떠났다가 그곳에서 길을 잃어 문명 세계로 돌아오지 못한 채 혼자 남게 되었고 아들 '존'을 낳았다.
훗날, 아들을 데리고 문명 세계로 다시 돌아오게 된 린다는 파크 레인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존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낀다. 이때, 병원 간호사는 여덟 살 된 일란성 쌍둥이들을 데리고 죽음에 대해 길들이기 훈련 중이었다. 아이들은 임종을 맞이하는 병원을 마음껏 뛰어 돌아다니고, 지퍼 찾기 놀이를 하면서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다. 간호사는 예닐곱 달 정도 길들이기를 해 왔고 존의 행동이 그동안의 훈련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에게 말을 해야 하나? 정신을 차리고 품위를 지키라고? 이곳이 어디인지 그에게 상기시키고, 순진하고 불쌍한 아이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를? 마치 죽음이 어떤 무서운 사건이라도 된다는 듯,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간이 한 명이라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듯, 이렇게 역겨울 정도로 울부짖고 소란을 떨어서 그들이 지금까지 행한 죽음에 길들이는 훈련을 몽땅 헛수고로 만들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행동은 죽음에 관해서 아이들에게 지극히 위험한 편견을 불어넣고, 그들을 불안하게 함으로써 철저히 그릇되고 반사회적인 면으로 반응하게끔 만들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Should she speak to him? Try to bring him back to a sense of decency? Remind him of where he was? Of what fatal mischief he might do to these poor innocents? Undoing all their wholesome death-conditioning with this disgusting outcry – as though death were something terrible, as though anyone mattered as much as all that! It might give them the most disastrous ideas about the subject, might upset them into reacting in the entirely wrong, the utterly anti-social way.
p. 315, <멋진 신세계> 소담 출판사/ p.181, <Brave New World> Penguin Random House
간호사가 말한 영어 원문을 보면 'as though death were something terrible'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뜻하는 가정법으로 표현되어, 이 세계에서 죽음은 큰 사건도 아니고 죽음을 슬퍼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 없음이 더더욱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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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며 어린 시절 엄마 무릎에 앉아 엄마가 불러주던 노래를 기억하고 함께 보냈던 순간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존의 모습에 마음을 보태고 싶었다. 고독에 관해서, 밤하늘에 관해서, 깊고 어두운 암흑에 관해서, 그리고 죽음에 관해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표현할 수 없었던 존의 쓸쓸함이 크게 다가오던 장면이었다. 존을 보며 내가 겪은 죽음에 대해 나누고 싶어졌다.
10여 년 전, 둘째 딸을 출산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가족의 죽음을 접했다.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며 새벽에 울먹이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서 잠도 같이 자며 독립하기 전까지 쭉 함께 생활했는데 가끔씩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죽을 수 있을까 말씀하시곤 했었다. 병치레 없이 건강히 지내시던 여든의 할머니께 결혼할 사람이라고 남편과 절을 올렸을 때 손녀사위를 반가이 맞이해 주셨고, 그 후 태어난 첫 증손녀를 보셨다. '애가 어떻게 이라고 이삐다냐~~~.' 할머니의 얼굴엔 증소녀를 바라보는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남쪽으로 350km 떨어진 시골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나의 갓난 둘째와 나의 할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례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문득 몇 주전 꿈에 오셨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둘째 출산 후 정신없이 네 식구의 삶에 적응하던 시기에 수유하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우리 방으로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누워 있는 둘째를 보고는 안아 보시더니 포대기로 업으셨다. 그렇게 갓난 둘째를 업고 있는 할머니를 지켜보다 잠에서 깼다. 이게 무슨 꿈이지, 갑자기 왜 할머니가 우리 애를 업고 계셨지, 아이가 아프거나 안 좋은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를 걱정이 생겼는데, 몇 주 후 할머니는 긴 생을 마감하셨다.
할머니는 이 세상을 마무리하시기 전에 얼굴 한번 못 본 증손녀를 안아 보시려고 꿈에 오셨다. 나를 업어 재우셨던 것처럼, 꿈에서라도 우리 둘째를 업어 보셨다. 그 꿈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생각지도 못했던 할머니의 마음이 잊혀질 수 없는 스토리가 되어 남는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전혀 쓸모가 없다. 오래된 책도 그래서 쓸모가 없고, 특히나 아름다운 것들은 더 그렇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면 특히 더 그렇죠. 아름다움은 마음을 끄는 힘이 있는데, 우린 사람들이 옛것에 끌리는 걸 원하지 않아요. 우린 그들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Particularly when they’re beautiful. Beauty’s attractive, and we don’t want people to be attracted by old things. We want them to like the new ones.
p.331, <멋진 신세계> 소담 출판사/ p.192, <Brave New World> Penguin Random House
당시 89세 우리 할머니와 20개월 우리 첫째.
어머니를 잃은 존의 장면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게 되었고 90세 할머니의 야위고 주름진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전해 받는다. 오래전 사셨던 분을 통해 받은 가치가 이 세계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 집 둘째에게로 전해져 또 다른 아름다움이 생겨 날 거란 기대가 생긴다.
모처럼 할머니를 추억하니, 소설 속 멋진 신세계에서는 필요 없다고 했던 눈물이 글썽여졌다. 할머니! 할머니가 업어 보셨던 그 갓난 애가 벌써 10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