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11개월 : 나는 원래부터 이만큼 커 있었는 줄 알았다
11개월을 코앞에 둔 우리 아가가 스스로 컵을 기울여 물을 먹는 법을 터득했다. 아직은 많은 양을 흘리고는 있지만, 컵에 코를 박기만 하던 시절에 비하면 놀랄 만한 변화이다.
이유식으로 한 차례 고생을 한 이후에는 더 이상 식사시간에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치울 거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이유식을 먹여오고 있었다. 음식은 내가 수저에 담아 입 안까지 넣어주고, 물은 빨대컵에 담아서 주는 방식으로. 덕분에 이유식을 만들고, 먹이고, 치우며 날 고통스럽게 했던 일련의 식사 시간은 매우 간소화되었고 한동안 나는 다시 육아 황금기를 맛보는 듯했다.
그런데 아가는 하루가 다르게 할 줄 아는 게 늘어가고 있고, 동시에 본인이 직접 해보려는 욕구도 많아졌다. 먹는 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가는 우리의 숟가락질을 유심히 관찰하고, 컵으로 물 마시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본인이 하고 싶어 해서 숟가락과 물컵을 쥐어주면 처음에는 숟가락 위 밥알을 만지작 거리거나 물컵을 던져 버리고는 했다. 주변은 난장판이 되고 나는 아가에게 숟가락과 물컵을 쥐어준 내 탓을 하며 짜증을 억눌렀다.
우리 아가도 언젠가는 당연히 스스로 숟가락질을 하고 물컵을 마실 수 있게 성장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숟가락을 어떻게 기울여야 음식물이 떨어지지 않을지, 물컵을 어떻게 조심히 들어야 물을 흘리지 않고 끝까지 마실 수 있을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숙달에 이른다. 물을 쏟아보지 않고 물의 속성을 파악할 수는 없다. 결국 지금 물을 쏟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물을 쏟아가면서 물 마시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가가 펼쳐놓은 이 난장판이 오히려 대견하게 여겨진다. 아가는 아직 미숙한 손가락을 꼬물거려 가면서 완벽하게 숟가락질과 물 마시기를 해내는 높은 목표에 도전하고 있는거다. 벌써부터 도전에 거침이 없다. 엄마인 나였다면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을 때까지 섣불리 도전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하루 할 줄 아는 게 늘어가는 아가를 보며 나도 이렇게 조금씩 커왔겠구나 싶다. 나는 원래부터 엄마보다 똑똑하고 행동이 빠른 사람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나도 이맘때 수없이 흘리고 부딪히고 넘어져가면서 조금씩 성장해 온 거다. 지금은 내가 우리 엄마에게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알려주지만, 그 당시에는 엄마가 나에게 세상을 알려줬을 거다. 그 때의 엄마는 나에게 그 누구보다 전지전능한 존재였을 것이다. 우리 아가도 언젠가는 나보다 그때의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나에게 알려줄 거라 생각하니 뭉클하면서도 동시에 서럽다.
딸이면서 동시에 엄마가 된 지금, 나는 두 개의 자아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