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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Aug 31. 2023

먹는 것에 진심

요즘 점심 한 끼를 정말 소중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결정해서 먹는다.


삼십 대까지는 평생 다이어트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는 살이 더 빠졌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힘들어서 살이 조금씩 빠지더니 삼십 대 중반에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었다. 빈혈도 있고 피부색이 흰 편이라 늘 잘 챙겨 먹으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그렇게 40년을 살다 보니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사십 대 중반부터 슬금슬금 살이 붇기 시작했다. 음식을 많이 먹는 편도 아니고 이전보다 특별히 더 먹는 것도 아닌데 체중계에 올라갈 때마다 이상하게 몸무게가 늘었다.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도 싫고 살이 찌는 것도 싫어서 사십 대 중반부터 식단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아침은 오트밀과 과일로 간단하게, 점심은 먹고 싶은 것으로 마음껏 먹고, 저녁은 샐러드나 단백질 위주로 먹었다. 이렇게 식단을 바꾸고 나니 몇 년째 표준 체중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점심 한 끼에 진심이 되었다.

 

아침에 먹는 오트밀은 배도 부르지 않고 맛있지도 않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차려먹을 시간도 없고 간단하면서 건강에도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서 찾은 절충안일 뿐이다. 저녁에 먹는 샐러드와 단백질 위주 식사도 처음에는 괜찮더니 한 두 달쯤 되니 물리기 시작했다. 건강하게 려면 저녁은 험블(humble)하게 먹어야 한다는 철학을 지키는 것일 뿐이다.

결국 남은 것은 점심 한 끼, 하루에 한 끼만 내 맘대로, 그리고 제대로 먹을 수 있으니 점심 한 끼에 진심이 되었다.


하루종일 고민을 해서 아주 신중하게 점심 메뉴를 고른다. 점심 한 끼를 만족스럽게 먹어야 저녁을 가볍게 먹을 수 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밍숭밍숭한 오트밀을 먹고 정오까지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대현동에 가서 볼 일을 보고 혼자 점심을 먹으려고 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에 집을 나설 때부터 설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열심히 고민을 후 고심해서 메뉴를 정했다.


고민고민해서 정한 점심 메뉴는 자장면이다.


사실 나는 검색을 잘하지 못한다. 열심히 검색을 해서 찾아간 식당은 대부분 실망을 안겨주곤 했다.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가 보면 식당 내부는 블로그 사진과 딴판이고 나오는 음식은 더욱더 딴판이었다. 그래서 식당을 정할 때 검색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지나가다가 찜해둔 곳이나 지인에게 추천받은 곳으로 정한다.


오늘 가기로 한 중국집은 예전부터 찜해 둔 곳이다. 근처를 지날 때마다 준비한 재료가 모두 소진되어서 금일 영업을 종료한다는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오후 3시밖에 안 되었는데 영업을 종료하면 점심 장사밖에 안 한다는 인데 자신감이 넘치는 식당의 음식 맛이 궁금했다. 메뉴가 자장면 단 한 가지인데 하루에 3시간만 영업을 는 주인장의 철학도 궁금했다. 영업시간이 짧으니 항상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몇 번을 지나쳤던 식당이다. 오늘은 꼭 그 집의 자장면을 먹어보고 싶었다.

혼자 가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점심 메뉴에 너무 진심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정확하게 11시 50분에 문을 열었고 메뉴는 정말 자장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신기하게도 주인장 혼자서 요리를 하면서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번호표를 받아서 기다라다가 음식이 나오면 손님이 직접 가져와서 먹고 다 먹으면 그릇을 통에 넣고 나가는 시스템이었다.


번호표를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주문을 받은 후 조리를 시작하기 때문에 15정도 기다려야 했고 드디어 나의 번호가 떠서 자장면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금방 만든 뜨끈뜨끈한 자장면이 내 눈앞에 있었다. 얼른 사진을 찍고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일반 중국집에서 먹는 자장면은 아니고 휴게소에서 파는 자장면과 비슷하달까, 심심하고 달달한 옛날 자장면인데 고기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고기 대신 감자, 버섯 등의 각종 야채가 큼직하게 썰어져 있어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대체 어떻게 볶은 것인지 자장면인데 기름 맛이 전혀 안 났다. 담백한 맛 때문에 야채와 춘장을 물에 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허겁지겁 자장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몸도 마음도 꽉 충전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지독한 감기를 앓아서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했더니 이렇게 맛있는 음식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집에 돌아와서 하루를 정리하면서 내일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다시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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