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사유와 의미

되어감과 이미지 만들기

by 아란도



나는 늘 되어감의 상태에 있었다. 사람은 그 자신 말고 그 무엇이 되어가고자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들뢰즈의 '이미지'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되어가는 상태를 '이미지'라고 말했고, 된 상태를 '이미지를 만들었다'라고 했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미지'다. 우리는 이미지를 욕망한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작가의 이미지다. 그렇다면 어떤 직이나 업은 결국은 '이미지'일 것이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자신을 희생시켜서 얻는 결과다. 하지만 역으로 희생시켜 얻은 결과는 우리의 잠재성으로 이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있는 것을 변환하여 현실화하도록 우리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자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가능성인 '신체'다. 우리는 신체를 소진시켜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한다. 무엇을 얻으려 함인가? 그것은 잠재되어 있는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그것을 '해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잠재태는 비존재이기도 하다. 존재이지만 존재가 아직 아닌 존재. 이미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을 얻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복적으로 소진하는 것이다.


같은 자세로 몇 시간씩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때로는 무작정 걸으며 생각을 정돈하고 리셋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차를 마시며 사색하거나 직관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골똘한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소일거리로 텃밭 가꾸며 생각은 저 혼자서 비상할 때도 있다. 캠핑을 하며 불멍과 풀멍, 구름멍, 바람멍을 하며 동시에 '차멍茶'을 하기도 한다.


모든 '멍 때리기'로의 이행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이때 우리의 사유는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넘나들어 무언가와 무언가를 연결하여 '의미'를 발생하도록 한다. 그때 우리는 '유레카'를 외치기도 한다. 다시 살펴보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 것들. 그 사소한 것은 어떤 메커니즘이 아주 단순한 것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이 단순성에 덧 씌워진 복잡성을 제거하고 나면 그때 드러나는 것에 의해 우리는 최초의 실마리를 붙잡게 된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도 단순화된다. 불필요한 혼잡과 중복을 걷어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우리가 글을 다듬는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 작업일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그것에 대해 반복적 시도를 한다. 신체가 공부하는 것이다. 신체가 공부한 것들이 바로 그 자신의 앎이 된다. 이렇게 신체를 공부시켜 우리는 깊이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직관과 앎을 연결시켜 세계를 확장한다. 바로 그것으로 글을 쓰거나 어떤 것에 활용한다.









'신체사유'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 대한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는 행위들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왜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 그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일 바로 그것이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어떤 것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미지는 신체의 반복적 행위로 만들어진다. 몸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밖으로 이끌어 내는 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그것은 '되어감'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 되어감의 이미지는 반복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형식을 통해서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공'이 휘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질량 있는 어떤 물체가 시공에 나타났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의 신체도 질량 있는 어떤 물질이다. 이 물질이 우리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휘어 있는 시공은 항상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이 그 처음은 아닐 것이다. 처음과 되돌아온 처음은 차이가 있다.


만약 그 자신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고 친다면, 출발할 때의 그 자신의 시선은 자기 앞을 보지만, 한 바퀴 도는 동안 점차로 그 자신은 그 자신의 뒤통수를 보게 된다. 자기 자신이 보는 방향이 바뀌어 있다. 출발은 앞을 보았지만 한 바퀴 되돌아오면 그 자신의 뒤통수를 보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신체를 움직여 사유하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자 신체사유를 하는 것이다. 이에 의미는 그렇게 발생한다. 우리가 우리의 뒤통수를 보는 순간에 무엇인가는 튀어나온다. 의미다. 의미는 우리가 신체사유를 통하여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그 과정의 맞바꿈을 통하여 일어난다. 자리바꿈이다.








어떤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의미가 튀어나온다. 이 의미가 우리 신체 안에 갇혀 있던 잠재태다. 많은 작가들이 다루고 쓰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의 '의미'다. 그 의미의 다발들은 다양한 변주를 통하여 각색되어 다채롭게 흩어져 시가 되고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된다. 창작이다.


사람이 되어감에 있어서, 신체가 무엇을 만들어 그 신체의 소진과 맞바꿈 하는가? 에 대한 사유가 전제되지 않을 때, 인간은 허무를 경험하게 된다.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허무에 직면하는 인간의 상태일 것이다. 신체는 자기 가능성을 소진하여 무엇과 맞바꾸었는데, 정작 '자아 ego'는 그것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아찔하다.


그러므로 '되어 감 being'이란 자아가 그것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투여하는 일이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자아가 이 프로젝트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려면 자아 스스로의 각성이 필요하다. 소진된 신체에 자아의 비참함을 보상하려면 자아가 이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일깨움이 필요하다. 때로는 자아는 다 팽개치고 싶어 한다. 그럴 때 너무 다그치지 말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놀고 싶다면 놀게 해야 한다. 그 노는 시간이 어떤 정돈 그러니까 그 혼돈의 시간은 변환의 시간이기도 하며, 전환을 향하여 마음먹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정렬을 할 수도 있거나 그 '정렬整列'을 자각하기도 한다.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사용한다는 그것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