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로 캠핑을 떠났다. 캠핑장은 키 큰 소나무들이 포진되어 있는 그 아래에 있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캠핑장은 요정들이 사는 마을처럼 보였다. 밤에는 더욱 그러했다. 작은 데크들이 긴 다리로 소나무 숲 아래에 있는 모양을 보니 요정들의 마을 같았던 것이다. 그럼 우리도 이제 요정이 되어 볼 시간이다.
캠핑장 주인장의 살림집 정원 역시 요정들의 놀이터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가을을 담고서 허물어져 가는 정원 안의 사물들의 풍경을 담았다. 그리고 이내 담장 한편에 핀 이 꽃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동영상이 순간 펼쳐졌다. 그때 스치는 것은 인화문 접시들에 새겨진 꽃문양이었다. 그 꽃문양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이 꽃과 겹쳐졌다. 둘의 모양과 크기까지 똑같다고 생각되었다. 지금은 가을 초입이라 꽃잎들이 떨어져서 이 꽃은 듬성듬성한 모습이었지만 겹쳐지는 것에서 보자면, 꽃잎들이 떨어진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분청 인화문 접시에 새겨진 꽃문양을 대체적으로 국화문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암만 봐도 인화문 접시에 박힌 작은 꽃들이 이 꽃과 똑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이 꽃을 보자마자 바로 어떤 설렘이 느껴졌고 동시에 인화문 접시에 새겨진 꽃들이 일제히 살아나서 휘돌며 피어나는 영상이 머릿속에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바로 어떤 공간과 시간에 접속했던 것일까. 그 세계는 비현실의 공간이지만 그 순간에는 실재하는 바로 그런 세계였다고 여긴다. 이 꽃과 인화문 접시에 찍힌 그 꽃이 중첩되어 하나의 공간에서 겹쳐졌기 때문이다. 그 공간은 어디인가? 바로 내 머릿속일까? 아니면, 아니면 어떤 '사이'일까?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지는 바로 그런 어떤 틈과도 같은 그런 '사이 공간'일까.
취나물 꽃으로 그 휘도는 느낌을 표현해 보았다. 물론 3D 입체로 표현할 수는 없고 평면 사진으로만이다.
어쩌면 이러한 체험은 '양자 역학'적 체험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아니 지구 안에서 우리가 통념상으로 알고 있는 그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방해벽이 없는 곳, 바로 빈 공간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인화문 접시에 찍힌 꽃이 이 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비슷한 다른 꽃들과 대조해 보아도, 역시 이 꽃이 가장 적당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저 내 심증일 뿐인 것이다.
이 꽃 이름을 캠핑장 주인장이신 할아버지께 여쭈어보았다.
"아 그거이 취나물 꽃이라요. 그냥 놔뒀더니 그리 꽃이 피었네! 그려"
"헉! 취나물 꽃이라고요? 오~ 처음 봅니다. 취나물도 꽃이 피는군요"
나는 바로 그때 혼자 신이 났다. 왜 기분이 좋아졌을까. 취나물 꽃이라는 답변에 나는 뭔가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나는 나물이나 뭐 이런 거 말고... 내가 모르는 종류의 무엇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저 꽃에 대해서는 백지상태에서 꽃 이름을 접하게 되었다. 그렇구나! 취나물 꽃이었다니, 뭔가 아귀가 맞는 느낌이었다.
취나물은 우리나라 산에 흔하고, 예전에 가마가 있는 곳에도 취나물은 흔했을 것이고, 꽃문양을 새긴 장인은 취나물 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꽃의 모양도 단순 명료하고 하얀 꽃잎들이 기억하기에도 좋다. 이보다 더 적합한 꽃이 있었을까? 크기도 적당하다. 왜 하필 그리 작은 꽃문양을 반복적으로 선택했을까?
인화문 접시에 새겨진 꽃 모양을 보면 정말 꽃들이 뭉쳐서 피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하나 그리듯이 새기거나 도장으로 찍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인화문 접시꽃문양은 '인화문 기법印花紋技法'으로 도장처럼 찍은 것이다. 그 역시 복제 방식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복사기법 또는 판화기법일 것이다. 실제로 눈으로 보는 취나물 꽃과 취나물 꽃무리의 모습을 인화문 접시에 새겨진 꽃문양과 비교해 보자면, 인화문 접시의 꽃문양과 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구성은, 마치 눈으로 본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취나물 꽃
취나물 꽃은 산자락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작은 마당 정원에서도 그리 튀지 않으면서도 오묘하게 하얀 꽃잎들은 눈에 바로 들어온다.
인화문 접시에 찍힌 꽃은 어떤 꽃일까? 대한 내 개인적인 심증과 취향을 떠나서 그저 이런 연상 작용이 나에게 불쑥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화문 접시에 새겨진 꽃문양이 취나물 꽃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러한 조우는 만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순간 머릿속에 펼쳐진 그것을 포착하여 본 것이지만 그 강렬한 환희감은 잊히지 않는다.
취나물 꽃
* 인화문 기법印花紋技法 / 인화문은 고려 상감기법에서 이어진 장식 기법 중의 하나이다. 도자기를 빚을 때, 미리 문양을 새겨 만든 '도장'으로 점토(기물)에 문양을 찍으면, 문양 자리만 공간이 생긴다. 백토가 문양 안에 가득 채워지도록 백토를 바른다(감입嵌入). 백토가 마르면 백토를 긁어낸다. 문양에만 흰 백토가 채워지게 된다. 그 후 유약을 발라서 굽는다. 인화문은 무늬를 만드는 기법 중의 하나이며, 꽃문양과 우점문을 주로 사용한다.
*우점문雨點文 / 빗방울 떨어지는 형상과 같이 점선을 집합한 무늬. 무수한 점을 찍어 기물의 면을 채우거나 또는 띠를 두른 듯이 보이도록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