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양귀비와 형태의 수수께끼

'호라이즌과 피상성 그리고 두께와 의미'

by 아란도




어느 날 텃밭 주변을 걷다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때 나는 낭독회에서 읽고 있는 <즐거운 학문>을 머리에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이 나에게 온 것이었다. 내가 머금고 있지만, 그 생각은 오래전부터 나에게 해석을 강요하는 중이었고 그 해석에 맞닿아 있는 것은 니체의 <즐거운 학문>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강요와 해석을 연결하는 문제였다. 나는 드디어 수수께끼를 풀었을까? 하나를 풀면 그다음 또 다른 수수께끼가 생겨나곤 한다. 적어도 나는 성실하게 그 문제를 직면해오고 있었던 셈이었다. 번번이 이렇게 마주칠 때마다 수수께끼로 되돌아가서 해석을 연결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텃밭 농장을 산책하였었다. 초록빛을 품은 연두의 색상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석처럼 군데군데 박힌 꽃들이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내가 양귀비 꽃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바로 전달되는 한 가지 생각은 그때 바로 나에게 연결되었다.


꽃양귀비꽃을 보는 순간, 지금 나에게 피상적으로 보이는 저 형태가 전부로구나! 싶었다. 꽃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꽃양귀비 꽃은 이미 완성되었다.


이 꽃양귀비 꽃은 그때에만 존재하는 것! 다시 보면 그 꽃이 그 꽃은 아니다. 사진이라는 형태에 그때의 꽃양귀비를 숨긴 것


피상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순간에 완성된다. 이것이야말로 양자역학이 아니겠는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느 쪽으로든 결정되지 않았지만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본 순간에 내 안의 무엇인가와 만나서 그 양귀비 꽃은 나에게 절대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그 양귀비 꽃은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형태란 무엇인가? 윤곽선을 가진 사물은 모두 그것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형태를 갖는다는 것은 안으로 무엇인가를 감추었다는 의미이다. 피상적인 것은 형태를 갖고서 윤곽선을 드러낸다. 이 윤곽선은 일출의 진행 과정과 흡사하다. 이 윤곽선이야말로 안으로 무엇을 밀어 넣은 후 생명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윤곽선은 인체의 실루엣과도 같다. 피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이 개체로 독립을 할 수 있고, 독립한 것만이 완전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일출은,
night -> astronomical twilight -> nautical twilight -> civil twilight -> sunrise -> horizon ->day로 구성된다고 한다.


일출 진행 과정을 다시 풀어 설명하면 이러하다.

밤 -> 천체상에서 알 수 있는 여명 상태 -> 바다의 한복판에서 선원들만이 느끼는 여명 상태 ->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여명 상태 -> 일출 -> 수평선 또는 지평선의 가느다란 선으로 보이는 여운(박명)을 남기고 순간 날이 밝아짐. 일몰의 진행 과정은 역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여명의 순간에 어떤 '선'의 형태가 드러나고 경계를 가르는 그 순간이 바로 생명의 '윤곽선'과 유사하다. 블랙홀의 'event horizon - 사상의 지평선' 역시 여명의 순간에 나타나는 '선' 같은 경계선이다.


꽃양귀비



형태란 윤곽선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주이다. 이 윤곽선은 피부와는 또 다르다. '마르코프 블랭킷 Markov blanket'이 세포와 세포를 연결하여 열고 닫는 숨 쉬는 피부(스킨) 막이라면, 윤곽선은 그 피부 위에 떠 있는 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출 시에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호라이즌처럼 말이다.


형태에 대한 지각과 이 지각이 예술적 체험과 연결되려면, 그것의 완성 순간에 대해 감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 형태가 순간에 깊이를 감추었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인들의 피상적 삶에는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이 깃들어 있다. 상상력은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는 서사이며 서사는 두께가 있다. 두께가 있는 것은 깊이가 있다.


피상적인 것을 감싸고 있는 두께는 깊이를 숨기고 있다. 표면/피부(스킨)의 이면에 감추어진 서사들이 있다.

형태는 표면 위에 떠서 표면을 보호한다. 형태는 표면의 아우라다. 표면은 깊은 서사를 감추고 있다.






식물은 식물의 서사를, 동물은 동물의 서사를, 그것은 곧 구조다. 구조의 서사를 감추고서 피상적으로 드러난 형태는 시스템을 드러낸다. 움직임이자 활동이다. 인간은 인간의 서사를 피상적인 것 안에 감춘다. 생명의 구조를 감춘다. 그리고 움직임 활동 시스템을 오히려 드러낸다.


인간의 두께는 정신/서사/이야기이다. 깊이가 의미를 드러낸다. 피상적인 것의 깊이는 곧 의미다. 예술작품에서 깊이를 보면 그것이 바로 의미다. 그런데 그것은 형태가 완성되었을 때만 드러난다. 형태가 없으면 깊이도 없다. 어떤 것을 가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자신이 창조한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형태의 구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형태가 드러나자 거기에 생명성이 불어넣어 진 것이다. 생명성은 곧 독립된 개체이므로 완전성이다. 형태가 만들어졌기에 어떤 것을 그 안에 가둘 수 있게 된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 그 순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때 그 자신 안에 또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그 자신 안에서 연결되는 의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포스 신화를 믿는 것은 거기에서 그들의 상상력의 세계인 깊이를 느끼기 때문이며, 그때 그 깊이에서 의미를 전달받기 때문일 것이다. 신체라는 깊이가 바로 의미로 통하기 때문이다. 신체는 의미를 가두고 있다.










표면(피부) 곧 마코프 블랭킷은 형태에 의해 보호된다. 깊이와 본질은 표면의 이면에 감추어진 것이다. 피상적인 것에서 깊이를 보면 그것은 '의미'다. 피상적인 것은 깊이를 숨기고 있고, 그렇게 숨겨진 깊이를 보면 본질을 보는 것이며, 본질을 발견하면 의미가 튀어나온다.


그것이 예술의 형태가 아닐까? 의미로 다가올 때 그것은 각별해진다. 각별함은 특별함이다. 예술에서, 각별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때에는 그 자신에게 어떤 의미도 생성되지 않는다. 특별함에 대해 우리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데 예술은 '특별함'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의미는 '특별함'에 있지 보편성에 있지 않다. 니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꽃의 본래적 형태. 꽃이 벌을 불러들이지! 벌이 꽃을 찾아 날아와야지! 니체는 이를 '원격 조정'이라고..., 단, 거리의 문제가 있다고.

#피그말리온Pygmalion_갈라테아Galatea_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