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입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계절이다. 어느 계절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만은, 여름은 그중에서도 더위와 습도와 그리고 장마가 한데 어우러지면 유독 더 입맛이 왔다 갔다 한다.
이럴 땐 능산적인 자연을 적극적으로 삶에 끌어와야 한다. 이를테면, 냉장고 안에 방치되고 있어 아슬아슬한 상태에 내몰리고 있는 채소와 텃밭에서 장마를 이겨내며 탱탱하게 자라고 있는 채소들의 대비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때 어떤 의욕이 번득이며 일어선다. 누운 몸을 벌떡 일으켜 냉장고 안의 아슬한 상태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오래된 붉은 파프리카 하나, 다소 방치된 껍질 벗긴 당근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연이어서 싱싱한 가지를 꺼낸다. 그와 더불어 아삭아삭한 아삭이 고추도 꺼낸다.
이 모든 채소들을 하나로 만들 요리가 필요하다. 텃밭의 싱싱함으로 파프리카와 당근에게 생명을 부여하여야 한다. 이토록 아슬한 긴박함에서 구원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볶음밥'이라는 하나의 단일체에 의해서 구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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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비가 온다. 왕창 찡그리고 내려앉은 자정의 표정이 풀어지고 이내 소낙비가 내린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빗소리가 조용한 새벽녘을 두드린다. 이 시간 이전에는 <형이상학>을 낭독했다. 그때 내 안에 들어온 말은 '모든 것'과 '모든 것들'이란 말의 쓰임의 차이였다.
접속사나 부사나 부연설명의 늘어짐이나 예시들은 매끄럽게 연결되면 노랫가락처럼 흐르며, 쉼표를 주기도 하고 글에 운치와 멋을 주어 여유를 준다. 단지 책 <형이상학>은 이 모든 것들의 실험장이기는 하나, 최초의 실험장이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딱딱하다.
어쩌면 니체는 그랬기에 이 무의미한 말들에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니체는 자기 문체를 완성하였는지도 모른다. 한계라는 것은 '끝단'이 드러나는 것이다. 끝단이 드러나야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독립된 개체라는 의미다. 옷은 끝단이 마무리되어야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밖으로 나올 때 독립된 개별자가 된다. "각각 하나로 있다는 뜻에서 보편적이기 때문인데, 예컨대 사람, 말, 신은 각각 하나이니, 그것들은 모두 생명체인 탓이다." 하나의 형태로 있을 때, 각각 하나이다. 태어남은 개별자로서의 끝단이 드러난 것이므로 개체로 독립된 것이다.
볶음밥은 하나이며 전체이다. 이때 각각의 채소들은 볶음밥에 대해 "여러 내재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 어떤 하나이고, 특히 그 부분들은 가능적으로 그 안에 들어 있고, 그렇지 않을 때, 채소들은 완전한 상태에 있다."
채소들은 각각으로서는 완전한 독립된 개체이다. 그러나 볶음밥이란 전체에 있어서는 부분이다. 부분으로서의 단일 채소는 그 자신은 될 수 있어도 전체로서의 볶음밥은 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독립된 개별자이지만, 반면에 '연속적이며 한계를 가진 것'으로서 하나의 전체인데, 그에 속해 있는 부분들인 팔과 다리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되지 못한다."
볶음밥과 소크라테스에서, 볶음밥에 들어가는 채소들은 완전한 개체가 되는 반면에, 소크라테스의 팔과 다리는 소크라테스라는 실체를 벗어나 독립된 개체가 되지 못하고 묶여 있다. 왜 그럴까? "실체에 해당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분할을 허용하지 않는 한에서 '하나'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실체이지만, 볶음밥은 하나의 실체로 간주하는 유사실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음식에서 볶음밥이 무한(다채로움으로 읽자) 변주가 가능하고 상상력을 가중시키는 음식이 될 수 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나인 척할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것을 모아서, 이질적인 것들을 불러 모아서 '하나'로 행세할 수 있는 음식이 볶음밥이다.
볶음밥에 들어가는 다양한 채소들은 '채소들 전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채소들 전부'라고 읽어야 할까? 아마도 이것을 해석하자면 이러할 것이다. "위치에 따라 아무 차이가 나지 않으면 '전부'라고 불리고, 위치에 따라 차이가 나면 '전체'라고 불린다."
위치라는 말은 '위상의 차이'를 말할 것이다. 각각의 채소들은 위상의 차이가 있다. 서로 다른 '게노스(연속적 생성)'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각각 다른 게노스적 형태를 가진 것들은 '전체'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 채소들 전체를 냄비에 넣어라"
반면 채소들 중에서 특정한 감자를 썰어 놓았다면, 감자는 똑같은 감자이지 서로 게노스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럴 때는 게노스 차이가 없으므로, '전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감자 전부를 냄비에 넣어라"
위상차가 있으면 '전체'라고 말해야 하고, 위상차가 없으면 '전부'라고 말해야 한다.
"본성에 의해 있는 것들이 기술에 의해 있는 것들보다 더 그런 성질을 갖는데, 전체성은 일종의 '단일성'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위에서 인용한 이 문장의 부연 설명과도 같다. "실체에 해당하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분할을 허용하지 않는 한에서 '하나'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본성에 의해 있는 것들이 곧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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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애초에 나에게 들어온 말들인 '모든 것'과 '모든 것들'로 되돌아가야 한다.
볶음밥의 '모든 것'이란 말은 볶음밥의 전부를 하나로 취급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분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볶음밥의 실체를 다룬다는 의미에 근접할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볶음밥이 문화로서 실체를 획득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즉 단일체로 취급하여 하나의 실체로 접근하는 것일 것이다. "한국의 볶음밥과 볶음밥 문화", 여기서 볶음밥은 단일 명사로 행세한다.
반면 볶음밥의 '모든 것들'은 볶음밥의 여러 종류를 의미할 수도 있고, 볶음밥의 재료들과 레시피적 접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은 "나뉘어 있는 개별적인 것들"로 취급되기에 그러하다. "각 지역의 각각의 볶음밥" , "아무개 볶음밥과 또아무개 볶음밥...", "어떤 볶음밥에 들어가는 재료들", 여기서 볶음밥은 개별자로 행세한다.
볶음밥은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서의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여러 개별적인 것들의 모임으로서 '모든 것들'이기도 하다. 볶음밥은 유사 단일적 실체를 이룬다. 볶음밥을 파헤치면 그 안에 볶음밥은 없다. 다양한 재료를 한데 모아서 '볶음'이라는 조리방식을 거친 후 하나인 것처럼 단일한 음식이 된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볶음밥'처럼 유사한 단일체로 행세하는 음식은 의외로 많다. 비빔밥도 있고, 찌개도 있고, 탕도 있고, 국수도 있고 등등으로 하나의 고유 명사로 행세하는 음식은 이미 그 자체로 실체를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볶음밥이란 말도 비빔밥이란 말도 탕이라는 말도 찌개라는 말도 국수라는 말도 분할을 허용하지 않는 한에서 교유명사화 된 것이다. 볶음밥이란 명사는 분할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 A 씨의 팔과 다리는 분할될 수 없는 것이어서 실체이지만, 볶음밥은 명칭에서 분할될 수 없음을 획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볶음밥 자체는 분할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것들을 모아서 '볶음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성에 의해 있는 것들'과 볶음밥의 차이이다. 그렇기에 볶음밥은 유사본성을 '언어'로 획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의 축적에 의해 언어로 이루어진 명칭에 의해 볶음밥은 유사실체를 획득한 것이다. 곧 정신문화로서 실체를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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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채소들의 위상차에 의해, 당근을 맨 처음 볶고, 그다음 가지를 넣고, 그다음 파프리카를 넣고 그다음 밥을 넣고 그다음 미나리를 넣었다. 이렇게 채소를 단계별 투입하여 볶음은 이 위상차를 조절하여 단일한 식감의 강도로 맞추는 일이다.
스팸과 채소의 대비는 오히려 각각의 채소들을 하나의 단일체로 볼 수 있을 만큼의 위상차가 난다. 그러므로 스팸은 채소의 볶기와는 조리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굽기와 튀기기의 중간 정도의 조리 방식으로 스팸을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채소 볶음밥과 스팸을 섞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 이 볶음밥이 덮밥이 되려면, 달걀은 또 다른 조리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전 부치기보다는 완화된 방식의 익히기로 지단을 부쳐내어야 한다. 볶음밥은 이 달걀지단이라는 노오란 이불을 덮고서야 비로소 지단 볶음밥이 되었다. 지단은 그동안 고명으로 활약하다가 이번에는 메인이 되었다. 그토록 쟁쟁한 채소들! 보라색 가지와 아삭이 푸른 고추와 주황의 당근과 붉은 파프리카는 노오란 지단 아래 포근하게 모여 있다. 채소들은 아낌없이 볶음밥이 되어 자신들의 흔적을 알알이 새긴 채 입안의 미각에 의해서도 본래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오직 볶음밥의 맛이 우선할 뿐이다.
참으로 전체성을 잘 드러낸 음식이지 않은가? 볶음밥은! 그런데 이 전체성은 '볶음'과 '간'에 의해 새롭게 탄생할 때만이, 미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얼마나 제대로 된 맛의 조합인가? 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여러 개의 것이 하나로 행세할 때는 조율과 절제만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개는 무한(다채로움으로 읽자)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일 것이다. 볶음밥의 전체는 그렇게 변주의 다양성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노오란 지단 볶음밥의 가니쉬는 미나리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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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볶음밥 사진 올리려다, 형이상학과 연계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내 안에 들어온 말들에 대해 이해를 시도해 본다. 나는 볶음밥과 형이상학이 마음에 든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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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형이상학> 인용 부분은 " " 큰 따옴표로 표시함.
* p228~229와 주석 참고.
#형이상학_전체holon_전부pan_모든것들panta
*볶음밥 레시피는 영상에~~
#어쩌다보니_지단볶음밥
*글쓰고나서_도대체 이 글은 어디에 속해야 할까? 고민되었다. 형이상학? 텃밭사유? 아니면, 순간에 머무는 그곳에는? 형이상학으로 일단(?)은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