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 9장/ 거짓말쟁이들에 관하여- 중간과 마지막 부분
자기 기억력이 충분히 든든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될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다.
언어학자들은 '거짓을 말하다(dire mensonge)'와 '거짓말하다(mentir)'를 구분한다. 구분에 따르면 '거짓을 말하다'는 진실이 아닌데 진실인 줄 알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하다'는 자기가 아는 것과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쓰는 말이다. '거짓말하다'의 라틴어 어원은 '자기 양심을 거슬러서 그렇게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중심 틀과 내용 전체를 지어내던가 진짜 핵심을 감추거나 바꿔 놓는다. 원래 일의 핵심을 감추거나 바꾸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면 그들은 당황하지 않기가 어렵다.
원래 상태의 일이 가장 먼저 기억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의식과 지식을 통해 각인되어 있는 터에 지어낸 것을 그것이 밀어내며 그 사람 머리에 떠오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어낸 허구는 그 자리에서 단단히 버틸 힘이 없어 이리저리 밀리게 되고, 처음 알았던 진짜 상황이 매번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와 가짜였건 왜곡된 것이었건 갖다 붙인 조각들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의 경우 허구성을 흔들어 대는 정반대의 기억이 작용하지 않는 까닭에 앞의 경우보다 실수를 저지를 염려는 덜 해도 될 듯싶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원래 어디를 쥐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내용 없이 텅 빈 것인 까닭에 아주 단단히 기억해 둔 것이 아니면, 기억에서 늘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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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을 나는 여러 번 경험했다.
자기들이 협상 중인 사업에 얼마나 유리할 것인가 혹은 눈앞에 버티고 선 고관대작들의 비위를 얼마나 맞춰 줄 것인가에 따라 '말 바꾸는 일'을 직업 삼아 하는 자들이 난처해지는 경우를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진실과 양심을 상황에 종속시키려 하지만, 상황 자체가 이리저리 바뀌게 되어 있어, 그들의 말 역시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같은 사물을 두고도 어떤 때는 잿빛이라 하고 어떤 때는 노랗다고 하게 된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말하는 일이 생긴다.
사람들이 서로 모순되는 이 말들을 들고 와 비교해 보는 일이 어쩌다 생긴다면 그 멋진 기술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의 말이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뒤얽히는 일이 자주 있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말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한 가지 주제를 두고 그때마다 만들어 낸 그 많은 외양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기억력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내 시대의 적잖은 사람들이 이 그럴싸한 수완으로 이름난 이들을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평판은 그럴싸할지 모르지만, 실제 소득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 수완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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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공작의 대사 프란체스코 타베르나를 이런 방식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자랑하곤 했다.
이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프랑수아 1세는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 밀려났다. 그래서 이탈리아 정세와 밀라노 공국의 상황을 수시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밀라노 공작 옆에 붙여 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인물은, 겉으로는 개인 사업차 와 있는 민간인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대사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었다. 이 일에 적합한 인물이 밀라노의 귀족이자 왕실 시종이었던 '메르베유'라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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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공작의 상황은 이러했다.
황제 카를로스의 조카딸이자 덴마크 왕의 딸이며, 현재 로렌 지방의 상속녀가 된 미망인과 결혼 계약을 협의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카를 황제에게 더 종속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어떤 실제적인 관계를 갖거나 협의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상당한 불이익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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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 프랑수와 1세는 메르베유를 민간인으로 위장(실제로는 대사직함)시켜서 밀라노 공작 옆에 있도록 하였다. 메르베유는 대사직과 관련된 비밀 신임장과 교서, 겉으로 내세울 목적의 개인 사업에서 공작이 편의를 봐줄 프랑수아 1세의 추천장을 가지고 밀라노 공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메르베유가 밀라노 공작 옆에 너무 오래 머물다 보니, 카를 황제가 눈치를 채게 되었다.
이에 밀라노 공작은 어떤 살인 사건을 핑계 삼아 이틀 만에 재판을 뚝딱 해치운 뒤 한밤중에 메르베유의 목을 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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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공작은 자신의 일을 해명할 대사(프란체스코)를 프랑스에 보냈다. 그 이전에 프랑수와 1세는 사건의 해명을 요구하며, 기독교 세계 내 모든 군주와 밀라노 공작에까지 이미 직접 서한을 보낸 터였다.
아침 집무 시간에 대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경은 몇 가지 그럴싸한 이유를 열거하면서 자신의 밀라노 공작은 '메르베유'가 민간인 신분의 귀족이자 개인 사업차 밀라노에 온 밀라노의 신민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점을 논변의 토대로 삼으려 했다.
그 사람은 그 밖의 다른 어떤 인물로도 행세한 적이 없다면서, 그가 프랑스 왕실에서 일했다는 사실도, 왕이 그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하물며 그를 대사로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푸랑수아 1세는 여러 가지 반박과 질문으로 프란체스코 대사를 압박하면서 갖가지 책임을 추궁하다, 마침내 남의눈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야밤을 틈타 처형한 사실을 두고 그를 몰아붙였다.
그러자 당황한 이 불쌍한 친구는 짐짓 당당하게 그런 처형을 대낮에 집행한다는 것이 국왕 폐하를 존경하는 공작으로서는 몹시 송구한 일이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스스로 이렇게 뒤집어 놓았으니 그의 낯빛이 어땠을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프랑수아 1세 같이 눈치가 예리한 분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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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율리우스 2세는 영국 왕에게 프란체스코 대사를 보내 프랑스 왕과 맞서 싸우도록 부추기려 했다.
대사가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자, 영국 왕은 그에 답하면서 프랑스 왕처럼 강한 상대와 싸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채비를 해야 하는 어려움을 길게 설명하며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자 대사는 자기도 나름대로 그 점을 고려해 봤으며, 교황에게 직접 말씀드린 바 있다는 식으로 적절치 않게 대꾸했다.
자신을 즉각 전쟁으로 끌어넣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 그 소임과는 영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영국 왕은 대사가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나중에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교황은 그의 재산을 몰수했고, 그는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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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화는 잘 이해되지가 않았다. 문장을 뚫고 들어가 단락 구별하며 연결한 후에야 겨우 사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 유럽의 정세를 파악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위의 예화는 내가 재구성하여 단락을 연결하였다. 내가 파악한 이 사건은 요지는 이러하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는 정치적 경쟁자였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국왕과 밀라노 공작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지만, 황제 자리는 카를 5세에게 돌아갔다. 푸랑수아 1세는 밀라노 공국에서도 밀려났다.
이에 프랑수와 1세가 밀라노 공작 옆에 이를테면 세작(메르베유)을 심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카를 5세가 이를 눈치채게 되었고 당황한 밀라노 공작은 메르베유를 죽였다.
여기까지 보면 그때까지는 밀라노 공국이 프랑수아 1세의 영향력 안에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메르베유가 세작인지 알면서도 밀라노 공작은 메르베유를 옆에 두었던 것이지 않을까. 푸랑수와 1세를 저버리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밀라노 공작은 프란체스코 대사를 보내 프랑수아를 속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설계한 프랑수아 1세는 그 말에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프란체스카 대사에게 자백을 받아 내었다.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아마도 프란체스코 대사는 이탈리아로 되돌아갔던 모양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프란체스코 대사를 영국 왕에게 보내서 프랑스와 싸우도록 부추기라고 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 대사는 부추기기는커녕 영국 왕이 갖가지 이유를 대자, 이해한다는 식이 반응을 보이며 교황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한다.
자신을 프랑수아 1세와 맞서라고 부추기려고 온 사람의 태도 치고는 프란체스코의 대사의 말은 미심쩍었다. 그래서 영국 왕은 이 대사가 프랑수아 1세 편이라는 것을 침작하고, 교황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교황은 프란체스코의 재산을 몰수했다. 목숨만 겨우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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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화에서 몽테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말 바꾸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말로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 당시에 이런 형태의 사람들이 더러 또는 빈번하게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프란체스코 대사가 프랑스에 왔을 때, 얼떨결에 푸랑수아 1세에게 자백을 해버린 뒤, 프랑수아 1세에게 포섭 및 회유된 듯싶다. 그러니 영국 왕에게 그렇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일 거다.
내 생각에는 이 모든 일을 주도한 것은 프랑수아 1세라고 보인다. 그런데 왜 프란체스코 대사가 중간에서 독박 쓴 것 같을까? 프란체스코 대사가 밀라노 공작의 대사 역할을 잘해서 끝까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이 공작의 목숨은 붙어 있었을까?
그리고 몽테뉴는 프랑스인이다. 그가 프랑수아 1세를 말할 때는 상당히 푸랑수아 1세 편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 같다. 몽테뉴의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수아 1세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면서 무관 귀족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몽테뉴가 프랑수아 1세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것 같다.
그렇다면 몽테뉴가 말 바꾸는 일이 직업인 이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 또는 그 자신이 갖는 생각은, "내 시대의 점잖은 사람들아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평판은 그럴싸하여도 실제 소득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 수완이다"라는 것인 듯하다. 쓸데없는 야심 갖지 마라! 인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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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랑수아 1세는 르네상스 문화를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도입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후원하였고 여생을 보낼 저택을 제공했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와 여려 그림을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했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문화의 기틀을 다졌다. 그의 아들 앙리 2세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딸, 카트린 드 메디치와 결혼을 시켰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반대가 심했다. 메디치 가문은 상업가일 뿐이라며 반대했다. 프랑수아 1세는 절대로 카트린이 왕비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귀족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첫째 아들이 죽었고 앙리 2세가 왕세자가 되었다. 카트린은 프랑스 왕실에서 이방인이었다. 프랑스아 1세와 시누이만이 카트린의 편이 되어 주었다. 카트린은 메디치 가문이 천하다며 온갖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지금 우리 생각으로는 뭔 그런 일이!이지만, 그 당시 프랑스는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문화가 아니었다.
남편 앙리 2세가 죽고 아들이 왕이 되자 카트린은 실권을 잡았다. 카트린에 의해 식탁에 포크가 사용되었고 향수가 소개되었고 이탈리아 문화가 프랑스에 안착되었다. 프랑스 궁정문화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와 카트린이 낳은 아들들은 왕이 되었지만 모두 죽고 '발루아 왕조'는 몰락하게 된다. 앙리 4세 '부르봉 왕조'가 시작된다.
그러나 카트린의 딸들이 계속하여 왕비가 되면서 카트린의 혈통으로 이어졌고 유럽 왕실 전역으로 퍼졌다. 아들에서는 대가 끊겨 몰락했지만 딸 쪽으로는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과 브루봉 왕조가 만나 프랑스 문화가 만들어졌다.
아마도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가지 않고 합스부르크 왕조로 시집갔더라면 유럽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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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이 갓난아기 때 부모가 모두 죽었다. 카트린은 메디치 가문의 상속녀였다. 카트린의 보호자 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하였고 신임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우르비노 공작령과 피렌체의 실권을 당시 세 살에 불과했던 어린 카트린에게서 몰수"했다.
메디치 가문의 일원인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이 신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카트린의 인생에 화근의 씨앗이었다. 그 이전까지 교황과 합스부르크 왕조간의 유대 관계는 더없이 돈독했다. 클레멘스 7세는 수백 년 전 십자군 전쟁 시기 교황권이 유럽을 호령하던 중세적 사고에 묶여 있었다.
클레멘스 7세의 이전 교황들은 당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매우 두터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처럼 끈끈한 분위기를 클레멘스 7세는 한 큐에 날려버렸다.
클레멘스 7세는 커진 황제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해 그의 적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황제와 적대관계로 돌변했다. 카를 5세의 앙숙인 프랑수아 1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았다. 가장 결정타는 잉글랜드까지 끌어들여 제국을 사방에서 포위해 버린 코냑 동맹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카를 5세의 분노를 유발했고, 1527년에 온 로마가 쑥대밭이 되는 대사건이 터졌다. 로마가 제국군에 점령당한 반년간 산탄젤로 성에 피신해 유폐되다시피 한 클레멘스 7세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상황이 수습 불가 지경에 이르자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항복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배상금을 메꾸고 교황령을 재건하며 카를 5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출신지인 피렌체를 공격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당연히 경악했고, 충격에 빠졌다. 이런 사태를 맞고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메디치의 카트린은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다. 신변의 안전을 위해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불똥이 옮겨 붙은 그녀는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오베르뉴를 뺀 땅과 작위를 대부분 잃고 몰락했다. 그 결과 대외적 가치가 크게 폭락했으나, 그나마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아직 클레멘스 7세의 중요한 결혼 동맹용 말로 남아있었다.
결국 그녀는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하고 있던 클레멘스 7세의 중매로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게 되었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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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치세 당시 위그노 전쟁 30년이 있었다. 카트린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화합하려는 입장이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안 되는 문제였다. 앙리 4세 때 프랑스 전역이 황폐화된 후 봉합하게 되었다.
"카트린은 프랑스 전역을 휩쓴 위그노 전쟁 당시, 파리에서 수천 명의 위그노들을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었으나, 20세기부터의 시각으로는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카트린이 대학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가장 큰 원인은 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처럼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의 시선과는 다르게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학살자로만 알려져 있는 편이다."<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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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시대는 카트린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대략 맛만 보았다. 이제 <에세> 읽을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