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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대를 사는 이, 친구

친구랑 잘 놀았다는 이야기...

by 아란도



사진을 간추리고 정리하다가 ai로 사진 변환, 차라리 동화 속으로 들어가자. 나의 생일도 지나고 너의 생일도 다 지난 마당에 아무 때나 만나면 어때. 사람은 어느덧 어중간한 시기에 당도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과거의 힘이 자기를 당기고 미래의 힘이 자기를 당길 때, 모쪼록 선택을 해야 함을 자각한다. 부모는 과거이고 그 자신은 현재이고 또 다른 그 무엇은 미래다. 그때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와 회한의 무게를 사람은 어느 정도 가지고 산다. 노년은 신체가 점점 변형이 되어 간다. 허리는 구부러지고 점점 걷기는 힘들어지고 기억은 더 과거로만 향하고, 현재는 버거움 그 자체다. 자기 신체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삶도 죽음도 아닌 그 사이에 갇혀서 지낸다. 아직 당도해보지 않은 그 시간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모두가 다 똑같은 감당은 아니지만 누구나 일정 부분 고통을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받아들이기까지는 분노와 원망 애처로움이라는 눈물의 강을 건넌 이후일 것이다. 사람의 일생이 이토록 애잔하고도 가혹하다. 그래도 우리는 웃는다.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고 웃는다. 모든 사람은 다 각자의 시간대를 살았다. 다만 순차적으로 늙어갈 뿐이다. 우리 엄마도 너의 엄마도 언젠가는 우리처럼 웃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주는 고통을 무화시켜 보는 것이다. 그 자신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서, 그 역시 각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랑하는 이의 인생과 노년과 그렇게 점점 스러져 간다는 것을 나 스스로부터 받아들이고 마음먹었을 때, 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일생을 받아들인 것, 그것은 더 먼 훗날에 올 회한과 고통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담보하고 있을 테다. 그렇게 애상함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비가역적인 인간의 삶을 보는 슬픔이다. 그 무엇도 다시 되돌려 줄 수 없는 슬픔, 신체의 스러짐을 버거워하는 당사자보다 더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아직 더 젊은 자의 비애, 이러한 것이 때로는 서운함으로 비쳐져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과거와 마주설 수 없다. 엄마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걸어보려 하는 시간들, 친구의 오랜 시간도 나의 서투른 시간도 그저 평안하기를, 추사백 술 한 잔에 담아 본다. 예산 사과로 만든 추사백은 한 때 유행하다가 요즘은 주춤하다고 하였다. 너와 나는 살짝 도수가 부담되어 얼음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은 대접에 얼음을 담아 주고 리큐르 글라스를 주었다. 이 묘한 대비가 무겁지 않았다. 리큐르 글라스에 얼을 채우고 추사를 부우니 맛이 딱! 되었다. 간이 잘 맞는 시원한 조개탕과 잘 어울렸다. 다음에 기회 되면 이곳에 와서 또 추사백을 마셔야겠지. 이곳이 3차였다. 쇼핑하듯 간단하게 마시며 모처럼 거리를 걸으며 네온사인 일광욕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이 엄마한테 다녀오느라 밤 9시 반 밖에 시간이 되지 않았다. 친구는 금요일 저녁은 엄마를 언니가 와서 밤에 돌봐 주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였다. 그래 시간 맞추기 어려운데 아무 때면 어떠냐. 볼 수 있을 때 보자. 그러자 4차까지 가게 되었다. 집에 오는 길에 이미 해가 떴다. 혹여 여름날은 4시까지만 마시자고 했다. 해가 뜨니 모든 게 어설프게 다가왔다. 초췌한 모습과 아침 일출은 너무나 상반되었다. 밤의 장막 속에서 갑자기 훤한 빛으로 나오니 일말의 허거덕! 함이 있었다. 이것에는 어떤 데자뷔가 있었다. 너와 나의 기억이 함께 하는 것이다. 뭐 우리 만의 해방구라고 해 두자. 같은 시간대를 살지만, 현재는 짧아서 그 순간만 기억한다. 현재를 동시에 공유하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해방구 안에서만 공존한다. 앞으로는 거의 동시성을 갖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러니 해방구 기억만 업그레이드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이 역시 애잔하다네~ 친구여!


~^^
낮달, 아침달, 시간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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