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4

권태는 사태파악, 무엇이 권태인가

by 아란도


나눠야 할 대화는 무궁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잘 풀릴지는 늘 모호하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인 대화로 만남은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언제부턴가 '단도직입적인 대화'에 익숙하게 되었으나, 거기에는 타자가 자신을 타자로 서 있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대화는 늘 타자를 향하고 있으나 대화는 이너서클이 형성이 되지 않으면 구천을 헤매는 원혼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화의 딜레마는 사람을 신중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신중함은 일정한 선과 벽을 만들어 차단하는 특성을 내재하고 있으니 이는 또 사람과의 단절감을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안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이들로서의 타자와의 대화는 불능일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서도 자기 밖에서도 교집합에 교집합을 거듭하여 얻어낸 교집합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극히 위태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온전히 드러내는 그 포지션으로 가고자 한다면 죽음에 맞서는 용기가 때로는 필요하다. 그러함에도 그것에서 스스로를 타자화하거나 한 발치 떨어져 있는 시선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단도직입적인 대화'는 언제라도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은 외로워지는 것이다. 대응하기 애매한 것들에서 한 발치 떨어져 교집합으로 이동하여 타자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념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이다. 가깝고도 먼 얘기처럼 서로의 마음들은 방황한다. 어떤 것들은 어느 때는 내 피부에 그대로 느껴지고 또 어느 때는 나와는 먼 얘기처럼 부유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신선함과 피곤함은 내 머릿속에서 다툰다. 우리가 알아야 할 얘기들, 대처해야만 하는 사건들의 일상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도 달라진다. 자기 안의 타자와 싸우고 현실에서의 타자를 멀리하고 타자로의 위치에 서 있는 이들을 타자로서 대한다. 여기에는 모두 의지가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허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자기의 포지션을 결정하는 게 권태에 의한 것 혹은 눈치 살피기이거나 무력함이라면 그것 자체를 타자로 대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자신 안에 있지만 분명 낯선 것이다. 낯선 감정이 그 자신을 점령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이거다. 이 감정들이 그 자신을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분리된 거기에서 바로 보아야 할 것은 분열이다. 분열은 자기를 나눈다. 나누어서 보이기에 오히려 객관적이다. 권태에 빠진 자기를 자기가 보는 것. 무력한 그 자신을 자기가 보는 것. 이쯤 되면 권태는 사태파악이다. 무엇이 권태인가! 권태 상태는 그 자신이 권태로운지도 모른 채로 권태로 빨려 들어간다. 어쩌면 권태는 '허무'에서 비롯되는 것일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켜켜이 쌓인 사진을 보며, 그 모든 순간이 권태였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순간을 나는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일까. 권태와 싸우고 권태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순간들에서, 짙게 배어 있는 그 느낌은 허무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허무에 둘러싸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텅 비어 초점이 없는 하늘에 움직이는 구름이 주는 그 막연함, 이리저리 바람결에 흔들리는 강아지 풀이 퍼트리는 철렁함, 무심하게 그 자리에서 풍경이 되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한가함은 텅 비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텅 비어 있는 그 권태로운 느낌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오후의 빛에서 그리고 멍할 정도의 한적함이 주는 정적으로부터(모든 소리는 이때 배경이 될 뿐이다), 새소리, 아무렇게나 돋아나 있는 풀,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 그 배경으로부터.


* 2019/04/27




*사진은 2023/05/13

문득 드는 생각, 켜켜이 쌓인 사진을 보며, 그 모든 순간이 권태였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순간을 나는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일까


권태로운 하늘, 권태로운 느낌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빛에서... 그리고 한적함, 새소리, 아무렇게나 돋아나 있는 풀,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의 배경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