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욕망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이되어 뒤섞인 채로 고여 있다. 지층에 석유와 가스가 고여있듯이 말이다. 그 바닥 에너지에 불을 붙이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다. 보통 4~50대만 되면 욕망의 거세를 스스로 단행하며 현재만을 본다. 그러니 미래가 불안해지는 것이다. 곧 죽어도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취해야 한다. 그럴 때 욕망은 불타오른다. 그 욕망을 탐욕이라 하며 종교는 현실 유지적 자제 장사를 한다.
하지만 보라, 욕망을 열정으로 변환하는 장치를 끊임없이 재설정하지 않는 이상, 욕망은 괴물 그 자체로 표면으로 나타나게 된다. 오징어 게임을 표절로 떡칠했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영화시장에서 표절이란 시장에 잠식될 때, 오히려 그 시장에 먹힐 때이다.
히어로물이 미국인을 열광시키고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삼킨 것은 다름이 아니다. 오히려 히어로물은 신화의 세계를 모티브로 삼았다. 오히려 신화적 세계를 영웅 이야기의 원천으로 끌고 왔다. 그렇다면 영웅물은 신화들을 표절하였거나 떡칠한 것이 된다. 또한 그들의 전성시대인 5~70년대의 문화를 표절한 셈이 된다.
왜 그럴까? 그들은 끝없이 과거로 회귀한다. 발생적 시작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영웅에게 서사를 덧씌우고 세계를 창조한다. 영웅 판타지 영화나 시리즈에서, 영웅의 탄생은 시뮬라크르 - 사건적이다. 들뢰즈는 이 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거의 서양 철학사를 이 관점에서 재정립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서양 영웅물의 각본 흐름에서 철학적인 모티브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긁어대는 장치로써 철학은 그렇게 녹아들어 가 있다. 이를테면 넷플릭스 시리즈 '반헬싱'은 죽음에 맞섰다. 그리고 지옥이란 세계를 창조하였고 그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원적인 세계라는 시선을 갖도록 만들었다. 인간의 공포와 정면으로 승부한 것이다.
인간의 공포는 내면에 있다. 그 내면을 다루자면 이원성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세계는 현실 세계와는 다르다. 우리는 정신 안에서 어떤 상상을 하고 또한 빈 공간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서 무엇인가와 조우하고 생성한다. 영화적 상상은 그 빈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일 것이다. 영화나 문학에서 다루는 빈 공간은 보여주거나 묘사를 하거나 해야 한다. 그럴 때 관객 또는 독자는 그 자신의 상상으로 몰입하게 된다.
좀비물들도 그렇다. 어떻든 이건 모두 인간의 내면의 공포를 극대화하여 표면화시킨 것이다. 그 작가들이나 세계를 구현시킨 감독들은 모두 인간의 기억으로 잠입하여 무엇인가를 꺼내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무한 복제된다. 그 안에서는 영화사들끼리 경쟁이 물론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시장이 확장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베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창의적인 베낌, 즉 세계의 재창조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들은 돈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자본주의의 돈을 대량으로 걷어 갔다. 그리고 거대 시장을 만들었다. 왜? 그럴까? 우리의 통념상의 인식에 반하는 이러한 기 현상적인 모순에 대해서 정면으로 응시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모순적 상황인데도 그것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모순적 상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 대한 원천적인 관심을 가져도 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영화 시장은 그동안 자본과 기술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이 영웅물 시장에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눈뜨고 베끼기만 잘해도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잘 안 된 것이다. 왜 그럴까? 상상력이 부족해서라고? 그럼 상상력이 뭔데? 이런 뒤집어보는 질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는 열정 그 자체다. 잠복된 에너지적인 그 무엇, 그것을 사용할 방법, 욕망을 열정으로 변환시킬 그 무엇, 시뮬라크르들의 사건은 의미를 동시에 발생시킨다. '기훈'에게 사건과 동시에 발생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영웅물들에는 바로 이것이 있다.
한편으로 할리우드 영웅물에서도 한 가지 특이점은 있다. 그건 바로 희생이란 테마다. 이 희생은 슈퍼맨식 봉사와는 또 다르다. 희생은 의미와 같이 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론 원 팀이다. 자기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팀의 의리다. 한국의 정서는 바닥 에너지에 이것이 아예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배신하고 죽이겠다고 난리부르스를 친다. 만들어진 정서와 원천적으로 탑재된 정서는 다르다.
한국인의 분노와 욕망은 여기서 원천적으로 뒤엉켜 있다. 그렇다면 그 뒤엉켜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욕망에 불을 지르면 된다. 아예 석유를 부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표면으로 기어 올라와 변양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 노인의 기억이 재현한 세계에서 피에로가 되었다면, 그 자신이 새로운 게임을 설계하면 될 일이다. 오징어 게임의 가능성, 아직 가 보지 않은 길로 열린 촉수는 다양하다. 생장점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해 본다. 한국적 영웅물이 만들어진다면, 판타지 세계의 복제는 더 자유롭게 일어난다. 서로의 세계를 좀 더 쉽게 넘나 든다. 한국적 서사가 녹아 있는 히어로의 탄생은 그 자체로 영화 시장의 확장이다. 어느 곳이 뜨면 어느 곳이 부진하지만, 공중에 떠도는 자본 시장에 국경이 어디 있을 것인가.
시뮬라크르들의 서사를 만들고 그 세계를 창조하여 이원적 세계를 머릿속에 공감각화 시키는 것. 시리즈 '그린 애로우'의 스타 시티에서 '오징어 게임'이 열리지 말란 법도 없으며, 그린 애로우와 협력한 팀플레이가 이루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물론 이건 현실적 문제는 있다. 각 영화사나 제작자들이 그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영웅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어떻든 한 세계를 만드는데, 그것은 모두 서사를 통해서이다. 한 세계가 만들어지려면 서로 연결되는 방대한 서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계는 신화의 세계처럼 공간감을 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의 깊이는 이 확장된 공간감에서 오는 것일 거다. 이것은 세계의 확장이다. 이 좁은 세상을 넓히는 효과를 준다. 고대인들처럼 현재의 우리는 영화적 세계에 덜 매몰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의 두께가 있으며, 더 다양한 문학적이며 영화적인 입체적인 세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대인들은 하나의 신화를 거대하게 만들었다면, 현대인은 다양한 세계를 거대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소재가 다양하고 기술적으로 풍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효과는 문학적 세계의 효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공간감의 확장을 일으킨다면 예술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텍스트는 그 자신의 읽기 힘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므로 더 힘든 과정이라고 여긴다.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시인의 시를 내 방식으로 패러디해 본다면,
" 누군가의 욕망을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한 번이라도 열정적인 사람이었느냐 "
누군가의 욕망이 어떤 결과물로 변양 되어 나타날 때, 우리는 환호하거나 경멸하거나 한다. 어떤 욕망을 열정으로 변환시키는 그 강도의 내면적 시간은 연탄이 뜨겁게 타는 시간만큼이나 뜨거울 것이다. 한국인의 저 밑바닥 에너지는 이글이글하다. 다 뒤섞여서 형체도 없는 무의미가 부글부글 댄다. 그것을 사용할 방법과 도구를 가진 자가 되는 것, 그것이 현재 한국인의 방향성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사건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순간에서 취하며 양쪽으로 분할한다는 의미다.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에 관한 것이지, 어느 한쪽만을 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적 세계의 창조야말로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