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오마주와 의미의 의미

by 아란도


확률이란 무엇인가. 최초의 우연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필연은 어떨 때 그 자신에게 전달되는가.


짜장면 먹고 싶다 했더니 짜장면집에 들어섰는데 그걸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이런 순간들을 우리 인생에 대입해 본다면, 얼마나 아찔한 순간인가!


의미를 알고 싶어서 의미에 평생 목을 맸는데, 떡하니 의미에 대해서 구구절절 알려주는 책이 나타났다. 이걸 모르고 지나갔다면 어쩔 뻔했는가! 눈앞에 두고도, 읽으면서도 모르고 지나갔다면 어쩔 뻔했는가! 이보다 더 억울하고 아찔한 일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기적이란 멀리 있지 않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그 순간들마다 기적이다. 왜냐하면 그때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미는 방향성이다.


이러한 지시와 방향성은 모두 화살표와 같다. 그것은 일방향을 가리키며, 일의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방향성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라는 '구조론'의 말과도 연결된다. 언어의 다름은 해석의 문제이지만, 의미는 서로를 연결시킨다. 그리고 반복되며 의미를 발생하며 자기를 이끈다.


의미가 발생하면 의미는 무한 증식하며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버린다. 순간 통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통함은 계속 증식해 나간다. 의미의 증식은 단편적이고 파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그 자신의 담론을 연결시킨다.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의미의 의미를 느끼는 환희감의 환각은 그리 길지가 않다. 순간에 섬광처럼 와서 금세 번개처럼 이어버리고는 이내 빅뱅의 순간처럼 한 점으로 응축되어 사라진다. 다 잡아내지 못한 그 이어짐의 연결이 생각이 안 나서 뇌가 근질근질하다. 기억해내려 할수록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이미 그 순간은 흔적도 없다. 기록하는 동안 미처 기록하지 못한 부분은 기억에서 지워진 듯 백지다.


그러나 또 연결될 것이다.


의미를 이해하느라 오히려 무의미해져 버린 시간들에서 다시 의미를 발견하기까지는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그저 의미라고 말하는 것과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아는 것은 다르다고 여긴다. 어떤 단어들을 무의식적으로 쓰는 것과 그 단어에 대해 아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연결의 문제이다. 연결되지 않고 끊어진 채로 있는 것, 경험들이 단독으로만 있는 것. 그것은 어떻게, 어디에서 연결되는가. 나는 이러한 형태가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여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는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림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문구는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가 동시에 아득한 차원 안으로 사람을 밀어 넣는 힘이 있다. 나는 바로 그러한 것을 직관했었고 그것에 대해 썼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는 '의미의 의미' 그러니까 '메타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의미는 직관되는 것이지 다른 그 무엇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서 가치가 발생한다. 가치의 발생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자기에게 오는 것이지 자기가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자기에게 불현듯 찾아온 바로 그것은 직관이다. 그 직관이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면 그 직관은 고차원을 연다. 즉 성능이 좋은 직관이다.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 직관의 성능을 향상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인간이 의미를 지각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삶의 과정이 정신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축적의 연결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의미의 의미'다. 의미가 다른 의미와 연결되는 것에서 오는 그 현상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어떤 현상을 표현한 말이다. 어떤 상태에 관한 압축적 설명이다. 그 압축을 그때는 바로 다 알 것 같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압축 파일은 우리가 바로 그 안의 것을 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그 압축파일 주소 또는 위치를 알았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압축을 풀어야만 한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삶 또는 그 자신의 길이 되는 것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