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분홍색 사선을 넣으면 여기 이 초록색이 더 완벽해 보일 거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있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요.
창작은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진행됩니다
1.
책을 준비하면서 만난 창작자 대다수는 자기 작품을 비전의 산물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만드는 과정에서 진화해나간 과정의 산물로 보았다.
2.
18세기 말부터 낭만주의가 무르익으며 ‘천재’라는 용어가 신과 같은 능력이 있는 이들, 즉 예술적 창조를 이끄는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예술가에게 신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이런 발상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다름 아닌 신이라는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천재는 단순한 모조품과 진정한 예술품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는 자연의 숭고함과 인간의 열등한 창조물이 있는데, 천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3.
창조의 가능성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 공간에서 시작된다.
4.
우리는 백지 위로 걸어 들어가 시작점을 찾고, 초고를 써내고, 퇴고를 거듭하며 더 멀리 나아간다. 창작자는 늘 만드는 과정에 있으며, 결코 완벽한 상태에는 이르지 못한다(그러나 더 많은 창작을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다). 그저 어떤 시점에 이르러 창작을 중단할 뿐이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글을 공유할 준비가 되면, 그 지점에서 창작은 멈춘다.
5.
빌은 작품 속 공간으로 들어가 창작을 진전시킨다. “예를 들어 ‘여기에 분홍색 사선을 넣으면 여기 이 초록색이 더 완벽해 보일 거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있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요. 창작은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진행됩니다.”
6.
필드는 ‘끌어당김’을 쫓아 창작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진척이 되면 객관적인 ‘편집자 관점’으로 그림을 살핀다. 이때 지금껏 해온 방식대로 더 나아갈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러고 나서 그림을 조금 더 그리고, 다시 편집자 관점으로 살피고, 수정하고, 이를 반복한다.
“반복하다 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 균형이 잡혀있는지 어긋났는지가 보여요.” “어느 정도 완성된 그림의 형태를 마침내 마주하면, 그건 놀라움으로 다가오나요?”
“아뇨, 놀라움은 아니에요. 인식이죠.”
7.
디자인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디자이너의 작업을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누군가 디자인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 앉아 있는 책상, 음식을 담은 접시, 손에 들고 있는 전화기까지 모두 다요. 누군가가 이것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결과로 만들어진 거예요. 어떻게 사용할지,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상적으로 기능할지, 느낌은 어떨지, 최적의 재료는 무엇일지, 만드는 데 어떤 자원이 필요할지, 지속 가능한 디자인인지 등을 고려한 결과인 거지요.”
8.
디자인은 만듦making을 통한 앎knowing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내가 만난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과정의 핵심은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한 깨달음에 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탐구 활동’이다. 따라서 디자인 과정에서 뜻밖의 발견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해묵은 생각을 재검토하게 되는 것은 일견 당연한 결과다.
9.
디자이너에게는 새로운 질문,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문제를 탐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레이더가 있다. 베이저트도 끝없는 호기심과 질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는 지금 이 방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디어가 생겨요. 사물을 관찰하기 때문이죠. 호기심이 저를 아이디어로 이끌어줘요. 매일 아내와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때마다 아이디어가 10~12개씩 생겨요. 곰곰이 생각해보고, 깊이 파헤쳐보고, 업무에 활용하거나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서 더 깊이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들이죠.” 베이저트는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으로 삶을 가득 채운다. 독창적인 질문으로 정형화된 대답을 넘어 훨씬 멀리 나아간다.
10.
제약은 상상력을 키우고 집중을 강화한다. 어떤 프로젝트든 예산, 인력, 일정, 관련 규제 등 현실적인 제약 조건이 있다. 이런 조건들은 디자이너가 주의를 집중하고 너무 방대한 가능성 사이에서 헤매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디자이너들은 이런 제약 조건이 불러오는 창조력을 여러 방식으로 진술하는데, 가장 흔한 표현은 ‘실패failing’다.
11.
이 책에서 소개된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 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확실할 때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창작자는 불확실함의 공간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배우고 익힌 창작 과정을 통해 발견에 이르게 되며, 이를 통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호하여 알지 못했던 삶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게 된다. 실행하고 이해한다. 불확실성에 들어가 발견을 이루고 다양한 재료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외연을 넓힌다. 즉흥적으로 창작하며 앎에 이른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창의성이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인생을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차차 삶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