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김명인 교수님의 회성록(지나온 삶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회고록이 아닌 회성록이라 부제를 붙였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교수직에 몸담고 계셨는데, 마침 동생이 졸업한 학교라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수업도 듣고 친하게 지냈던 교수님이라고 한다. 내가 읽은 책 작가가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라니 신기했다.
1979년 박정희 사망 후 내려진 계엄령과 45년 후 2024년 윤의 계엄령 사이에 1958년생 엘리트 운동권 대학생이 어떻게 공안사건에 휘말렸고, 출옥 후 출판사 편집장 및 문학평론가로 살면서 직선제와 IMF와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함께했으며,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건강이 악화되어 투병까지 하는 와중에 재심을 통해 과거 공안사건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됐는 기록한 500페이지짜리 책이다. 운동권 사상의 거의 끝판왕급이며, 국문학 전공에 평론가로 활동하시고 교수 일까지 오래 하셔서 그런지 무척 어려운 단어로 문장을 쓰신다. 그럼에도 한 노장의 인생사는 몹시 흥미롭게 흘러가고, 어떤 부분은 꽤나 현장감/박진감 있게 써주셔서 읽는 데에 큰 부담은 없었다. (다 읽고 나서 따로 빌려놓은 두꺼운 서양사 관련 벽돌책을 잠깐 읽었는데, 워낙 어려운 문장들을 읽고 나니 다른 벽돌책이 수월하게 읽히는 기적적인 장점도 있다.)
학생운동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민주화의 단맛만 누리고 배때기에 기름이 잔뜩 껴서 알량한 부채의식만 안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꼭 한 번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아, 어떤 지점에선 엘리트의 오만한 관점이 느껴지고, 어떤 지점에선 엄청난 꼰대스러움도 느껴지긴 하지만 (나에게는) 감내 가능한 정도였다. 상아탑으로 피신해서 90년대에 벌어진 그 수많은 변절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따름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초중고 시절 월사금도 못 내고 겨우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악착같이 공부해서 서울대에 진학한 선생님은(77학번), 당시 사회 분위기에 걸맞게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77 언더'라는 비밀 조직에 참여하여 실질적인 학생운동의 지도부에서 서울대 내의 학생운동 역량을 강화시키고,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하는 데에 몰두했다. 그러다 박정희가 죽고, 짧은 서울의 봄 이후에 광주 학살이 벌어져 신군부가 집권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1980년 5월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학생처장 이수성의 설득으로 서울역에 모인 10만 명의 학생들을 해산시켜 신군부에게 틈을 줘서 광주에서의 시민 학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유시민 선생님이 아직도 안타까워하는 그 유명한 사건) 당시 선생님도 현장에 함께하셨다고 한다. 본인은 당시 실망을 많이 했고, 광주에서의 일이 평생의 부채로 남을 만큼 충격이 컸던지라, 그때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뒤로 계속 '언더'에서 암약하던 선생님은, 1981년 학내 시위에서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의식화가 너무 강력하게 된 똑똑한 학생이 본인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쓴 글은 당시 엄혹한 상황에서 파격적인 주장이었고(좌익 혁명!!),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공안 당국의 관심을 끌어 결국 체포되었다. 이 선언문은 지금 읽어보면 물론 그 표현들이 과격하고 급진적이지만 '음 그래, 구구절절 맞는 말만 했는데?'라는 생각만 드는 명문이다.
회현동 시경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물고문을 받으며 배후가 누구냐고 아무리 파고든들 본인의 날카로운 사상임을 숨길 수 없었고, 조직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그리하여 선생님은 그 악명 높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옮겨져 그 유명한 이근안에게 조사를 받는다. 왜소하고 허여멀건한 학생이라 그런지 이근안이 심한 고문을 하진 않았고 잘 대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박처원 대공수사처 처장도("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며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거짓으로 은폐하려던 자) 선생님에게 전향을 권유하는 등 조사관들을 악마화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칠성판에 묶고 얼굴에 수건을 깔아 물을 붓거나, 척추가 녹을 때까지 전기를 흘려보내거나, 일주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 등의 심한 고문이 아니었을 뿐, 충분한 신체적 고통을 주는 고문이 이어지긴 했다. 고문자는 조사 후에도 간이침대를 놓고 조사실에서 같이 머물렀고, 24시간 내내 고문을 하진 않다 보니 선생님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했듯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은 상태로 고문자에게 친밀감까지 느끼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근안이 선생님의 손목 관절을 돌려 뽑은 이후(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조직에 대해 다 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숲 속의 안개처럼 흐릿하다는 이근안의 감상에 따라 '무림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고(이근안은 무림, 학림, 부림 등 수풀 남자를 붙여서 공안사건 작명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반공법/국가보안법 등의 위반으로 관련자들이 투옥되며, 선생님도 3년간의 옥살이를 시작한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운동권에 투신하여 역사에 작게나마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을까? 군부 정권에서의 투쟁사를 읽다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다. 부모님은 대학을 보내놓고 데모하지 말라고 말리셨겠지만 귀가 얇아서 '불량한' 선배들의 의식화 교육에 어영부영 따라다니고, 어설픈 정의감에 거리로 나가 돌을 던졌을 것 같다. 하지만 맷집이 연약해서 체포되면 조금의 육체적 고통도 못 참고 아는 정보를 다 불어 버렸겠지...
옥살이 이야기도 자세하게 서술해 놓으셨다. 당시 '애인'이었던 같은 학교 약대 여학생이 헌신적으로 옥바라지를 해주셔서 3년 동안 300권의 다양한 책을 읽었고, 출옥 후 선생님은 출판사에 편집주간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 출판사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풀빛출판사다.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으로도 유명하며, 나병식 풀빛 대표가 구속되게 한 <한국민중사> 또한 그렇다고 한다.) 선생님은 저 책들의 출간에 모두 관여했으며 특히 <넘어넘어>의 출간에 관여한 것은 큰 영광이라고 말한다.
7년간의 출판사 근무 중 역사는 계속 흘러갔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성취했지만 노태우의 집권으로 크게 실망하고, 출판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평론 일을 천직으로 삼게 된다. 아내분은 약국을 개업했고, 선생님은 셔터맨으로도 잠시 생활했다. 의약분업 이전의 약국 개업은 몇 년만 돈을 벌면 작은 빌딩 하나는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박사를 거친 건 돈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사실이 큰 이유다.
그렇게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김영삼 정권과 IMF를 거쳐 김대중 정권까지 오면서, 더 이상 예전 학생운동의 투쟁방식이 먹히지 않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했고, 선생님은 무기력을 느끼는 와중에 인하대 교수로 취임한다. 20년 가까이 학생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강의-행정-연구에 표면적으로는 열심히 임했지만 과거와 같은 열정은 없었고,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기득권층의 민중 배제에 이를 갈기만 했다. 박근혜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권에 기대를 해봤지만, 아마추어와 같은 정권에서 선생님이 기대하던 수구 보수세력 타파, 신자유주의의 부작용 해소, 민주주의의 강화와 같은 지상 과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탓에 실망만 커졌다.
그리고 윤이 등장해 황당한 계엄과 함께 퇴장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가 남긴 유명한 문구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가진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되풀이된다고 언급한 적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말이다."를 인용하면서, 선생님은 "스물한살의 내란 때에 나는 울었고, 예순여섯살의 내란 때에 나는 웃었다"고 한다.
역시 두 번 겪어본 짬은 다르구나... 난 첫 번째 계엄이라 그날 새벽까지 공포에 떨었나 보다.
한국 현대사에서 전면에 등장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맡진 않았지만, 그 이면에서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주신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장암에 걸렸다가 치료했고, 자가면역질환에 고생하시고, 암이 간에 전이되어 또 항암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별로 좋진 않으시지만, 이제 교수직도 정년퇴임하시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셨으니 남은 생애 행복만 누리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