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읽을 때마다 실패가 없는 이기호 작가님이 11년 만에 출간한 장편. 500페이지가 넘는데도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다. 책을 읽다가 아이한테 "아빠 읽는 책 제목 봐라? 이시봉이 어떤 존재일 것 같아?" "글쎄...아저씨?" "땡" "음...프랑스 사람?" "땡" "에이 그럼 뭔데?"
작가님이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 이시봉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본견의 자전적 소설은 결코 아니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 이시습(여동생은 이시현, 강아지는 이시봉이다)은 그 충격에 방황하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하고 스무 살이 되자 매일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을 마시고 새벽에 이시봉을 산책시키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런 시습에게 누군가 찾아와서 이시봉이 사실은 엄청나게 희귀한 순종 비숑 프리제고, 자신에게 비싼 값에 팔라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이시봉의 조상이 스페인 왕실에서 사랑받다가 왕실과 함께 몰락하는 과정과 이시봉을 팔라고 제안하는 사람이 왜 이시봉에게 집착하게 됐는지 그의 프랑스 유학시절을 교차하며 확장된다.
강아지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없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가족/친구의 지지가 있으면 헤쳐나갈 수 있으며,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얻을 수 없는 가치들이 참 많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작가님은 대하소설로 쓰려다가 많이 잘라냈다고 하신다.
가족의 죽음으로 생긴 구멍을 전형적인 소재나 특이한 사건으로 메꾸는 구조의 소설들이 참 많지만, 읽을 때마다 느낀다. 가족 놔두고 아빠가 젊은 나이에 먼저 가버리면 절대 안 된다. 물론 반대 케이스도 일어나면 안 되고. 남은 가족들이 너무 고통받는다.
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아서 (강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많진 않다. 기껏해야 영유아기 시절 나만 바라보며 눈을 빛내던 아이와, 연애 초기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보고 싶다고 하던 지금의 아내가 줬던 사랑 정도? 이제 둘 다 나이가 들어가며 더 이상 그렇게 압도적인 사랑을 쏟아주진 않는다. 그래서 다들 자식 독립하면 강아지를 키우나 보다. 나도 늙어서 외롭고 집안의 침묵을 견딜 수 없으면 강아지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미 집에서 하층민으로서 여러 역할을 맡고 있는데, 강아지까지 키우면 또 얼마나 많은 일이 늘어나서 내 시간을 빼앗길까 생각하니 썩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아,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 참 재미있다. 장편소설을 이 정도로 잘 뽑아내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