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11월엔 무얼 하느라 바빠서 독후감을 하나도 안 쓰고 연말연시가 되어서야 부랴부랴 늦은 결산을 하냐면,
야구 시즌이 끝났지만 WBC 국대 대표팀 평가전이 있어서 보러 갔었고, 친척 동생 결혼식이 있었고, 생일이 있어 가족들과 식사를 함께 했고, 동률옹의 콘서트에 다녀왔고, 신라 금관이 한 자리에 모인다길래 경주월드도 갈 겸 경주에 다녀왔고, 친한 친구의 형님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여 위로를 해주고 왔다.
회사에 불을 뿜고 싶은 일이 많아서 <하우스 오브 드래곤> 두 시즌을 몰아보면서 드래곤들의 불뿜기에 동참했고, 엄청 재밌다는 후기를 보고 <더 베어>를 몰아보고 있다.
이러니까 책을 읽을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없다. 회사만 안 다니면 모두 다 할 수 있을 텐데, 대신 돈이 없어서 빌빌거리겠지...
어딘가에 수록된 작가의 <최애의 아이>라는 소설을 읽고 토악질이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한데 난 또 이 책을 집어들었을까. 분명 똥처럼 생겼지만 꼭 찍어먹어 봐야 똥인지 알 수 있다는 이상한 고집이 생긴 걸까. 대상 수상작인 <사과와 링고>는 또 끔찍한 결말을 보여준다. 그냥 차라리 정유정 작가님처럼 살인을 해라. 왜 자꾸 작품 안에서 아기나 고양이 같은 약한 존재들을 죽이면서 주인공의 고통을 정당화시키는 것인가.
'안온/다정/무해'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 한국문학 독자들에게 아이돌 덕후 출신에 덕후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대상을 안겨주며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문학상 심사위원들. 언젠가 언급한 적 있지만, 소설도 팔기 위한 상품이니 소비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종이책이나 이북을 사서 읽는 2-30대 여성들의 입맛에 딱 맞는 작가가 등장하니까 여기저기에서 힘을 실어주고 있는 모양새다.
다른 작품들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빛 나의 희망 성해나 작가님 말고는 문단에 주목할 만한 신예 작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기성 작가들도 소설에서 힘이 빠지고 있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작가의 다른 작품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궁금해서 빌려온 책. 글 잘 쓰는 아이돌 덕후가 쓴 순수문학과 웹소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작품들이 가득 실려있고, 몇몇 작품은 역시나 불쾌한 설정과 사건과 표현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 K-pop의 시대를 충실히 반영한 조류에 거부감이 드는 내가 이상한 독자일까.
문제적 작가의 문제적 작품들을 읽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정신이 혼미해져 있는데, 책 말미의 평론을 보고는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 이걸 이렇게 해석해서 의미를 부여하다니 정말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끝도 없이 말을 지어낼 수 있구나...
앞으로 나오는 작품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눈 질끈 감고 외면하고 싶은데, 과연 (마케팅) 기대주를 찾은 출판계가 허락해 줄지 모르겠다.
이 작가님도 참 꾸준하다. 꾸준히 피를 흘리고 인체를 난도질하고 터뜨리고 괴물로 만들어낸다. 전에 읽었던 작품 서너 권도 딱 '잔혹환상동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다.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자살하는 장면을 여과 없이 찍은 스너프 필름을 쉬지 않고 보면 뇌 구조가 바뀌는 등 정신이 피폐해진다고 하는데, 이 작가님의 작품들이 글로 풀어낸 스너프 필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만 읽어야지...
이희주/조예은 두 작가의 책을 월초에 읽었다가 소설에 대한 애정이 확 식어버렸다.
이젠 교수님이자 문학상 심사위원인 중견 작가가 되신 선생님의 (초)단편 모음집. 문단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소설들을 읽느라 작가님의 작품을 읽은 게 언제인지 잘 기억도 안 난다. 11편의 짧은 작품들을 모은 얇은 책이라 부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 <냉장고>부터 서늘하다. 중학생인 주인공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수준급 야구 실력으로 재능을 뽐내지만, 유일한 보호자인 할아버지의 죽음과 비윤리적인 야구부 코치의 방문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아직 어른이 되려면 몇 년은 남은 청소년에게 너무 가혹한 현실을 집어던지는 것 아닌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나머지 10편의 작품들을 읽다 보니 '차라리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소설들이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엄혹한 현실의 파국들이 먹구름처럼 밀려온다. 감정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필체가 이어지며,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좌절하고 엎어지고 길을 잃는다. 김애란 작가님이 사회 현상을 넓은 시선으로 조망하는 느낌이라면, 편혜영 작가님은 비극에 돋보기를 대고 다큐멘터리처럼 바라보게 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그토록 천착하는 안온/다정/무해 따위 필요 없다는 자신감이 20페이지가량 되는 짧은 작품들 내내 가득 들어차 있다. 실패하는 인물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손길도 건네지 않는다. '어른의 미래'라니, 이토록 역설적인 제목이 있을까?
가끔 뉴스를 보면 영화나 드라마보다 현실이 가장 공포스러울 때가 많은데, 소설에서 현실을 픽션/논픽션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그려내니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젊은 독자들이여, 무해한 위로는 쇼츠에서 고양이 동영상이나 보면 충분하니 이 책을 읽고 현실의 서늘함을 느껴보시게나.
슬로번 스릴러(Slow-burn thriller)라는 책 소개와 같이, 아주 천천히 서사를 쌓아나간다. 큰 캠핑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반라 가문의 손녀 바바라가 실종되는데, 14년 전 그녀의 오빠 베어도 실종되어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다. 분량이 거의 700페이지 가량 되는데 읽다 보면 휙휙 잘 넘어간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말이 뭐였더라...가문의 끔찍한 비밀에 치가 떨려 스스로 실종을 꾸며낸 거였나... 이래서 바로바로 기록을 남겨놔야 하는데...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중 정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최고의 작품인 <더 로드>. 내 인생 가장 암흑기였던 20대 중반에 읽고 너무나도 우울한 문체와 내용에 괜히 나도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집에 책이 있지만 다시 그 회색빛 세상에 들어갈 용기가 없어 다시 펼치지 못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쯤인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하비에르 바르뎀의 정말 말도 안 되는 연기에 압도당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을 코맥 매카시가 썼다는 사실을...
도서관 서가를 배회하다가 신작 소설 중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디자인의 책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 것이다! 으아니.. 이 영화가 원작소설이 있었어? 하고 책을 꺼냈는데... <더 로드>를 읽을 때의 그 회색빛 배경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의 붉은빛 사막 배경이 어쩐지 통하는 느낌이 있더라니... 괜히 반가운 느낌에 빌려서 읽었다.
영화에서 항상 사건 현장에 늦게 오고, 뭔가 보여줄 것 같은데 보여주지 못하고 그냥 안톤(하비에르 바르뎀)과 르웰린(조시 브롤린)의 추격전을 관망하는 듯한 역할에 그쳐서 '대체 저 역할은 왜 있는 걸까? 의문이었던 보안관(토미 리 존스)은 책을 읽어보니 소설의 화자였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더 로드>를 읽을 땐 느끼지 못했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을 땐 인물들의 대화를 구분하는 따옴표 등의 기호가 하나도 없어서 고역이었다. 그리고 번역가 황유원 님이 역자의 말에서 번역이 정말 어려웠다고 했는데, 읽기 편한 문장들은 아니었다. 다음 예시를 보자. 이 정도면 작가가 대놓고 번역가 죽어봐라! 한 거 아닌가?
Then he picked up his airtank and the stun- gun and walked out the door and got into the deputy's car and started the engine and backed around and pulled out and headed up the road.
그러고 나서 그는 공기통과 전기충격총을 집어 들고 문을 나서서 부보안관의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후진해서 방향을 틀더니 도로로 나가 길을 따라 달려갔다.
He latched the case and fastened the straps and buckled them and rose and shouldered the rifle and then picked up the case and the machinepistol and took his bearings by his shadow and set out.
그는 케이스를 잠그고 끈을 조여 버클을 채운 다음 일어나서 소총을 어깨에 메고 나서 케이스와 기관단총을 집어 들고 자신의 그림자로 방향을 가늠한 뒤 출발했다.
대체 왜 이러냐고 Gemini에게 물어봤다. 다른 소설 읽듯이 편하게 디비 누워서 후룩후룩 책장 넘기려고 한 독자라서 죄송합니다 매카시 선생님... 그나마 읽을 수 있게 해 주신 번역가 황유원 님 감사합니다...
Q: 코맥 매카시는 왜 자기 작품에 그토록 많은 'and'를 사용한 거야?
A: 코맥 매카시가 작품에서 'and'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다접속법(Polysyndeton)'이라는 의도적인 문학적 장치입니다. 그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ㆍ성경적이고 서사적인 리듬 부여 - 매카시는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의 문체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and'를 반복함으로써 문장에 고대 서사시나 성경과 같은 장엄하고 엄숙한 리듬을 부여하여, 이야기를 단순한 소설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신화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ㆍ행동의 연속성과 속도감 - 쉼표(,) 대신 'and'를 사용하면 독자가 쉬지 않고 문장을 읽게 됩니다. 이는 사건이 숨 쉴 틈 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긴박감을 조성하며, 행동의 흐름을 끊지 않고 묘사하여 현장감을 극대화합니다.
ㆍ객관적 서술 (가치 판단 배제) - '그래서(so)'나 '그러나(but)'와 같은 접속사는 앞뒤 문장에 인과관계나 대조를 부여하지만, '그리고(and)'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합니다. 이는 작가가 사건에 개입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고, 일어난 일들을 평등하고 무심하게 보여줌으로써 매카시 특유의 냉혹하고 황량한 세계관을 강조합니다.
ㆍ압도적인 현실감 - 세부 사항이나 행동을 'and'로 계속 쌓아 올림으로써(accumulating effect), 독자가 그 상황의 물리적 실체와 무게감을 그대로 느끼게 만듭니다.
매카시 본인의 말: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의 역할은 독자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독특한 문체는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도전을 제시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합니다.
책을 읽고 나니 코엔 형제가 얼마나 연출을 잘했고, 배우들이 훌륭한 연기를 했으며, 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영화 보는 게 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 매체를 모두 즐기는 나 자신 칭찬한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었다. (삼체라고!?)
속았다. (아무데나 삼체 가져다 붙이지 말라고...)
양자역학 설정 기반으로(그녀는 여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만 다룬다. 삼체를 읽지 않고 읽으면 그럭저럭 재미있는 sf 소설이지만, 삼체를 읽은 후 출판사의 카피 문구에 속아서 이 책을 읽는다면 ‘이게 프리퀄이라고?‘라는 의문만 남는다.
알츠하이머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 읽었던 에릭 시걸의 <프라이즈>였다. 노벨상을 탄 젊은 천재가 기억을 잃게 되어 낙담하는데, 치매라고만 알고 있었던 증상이 알츠하이머라는 이름이 따로 있던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에릭 시걸은 <러브 스토리>의 작가로 유명하다.)
기억을 잃어 점점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게 되고 퇴행을 하며 가족을 힘들게 하다 결국 세상을 떠나는 무서운 병은 아직도 치료제가 없다. (회사 미국 본사에서 조현병 치료제로 승인받은 약이 알츠하이머에도 효과가 있는지 임상시험 중이라고 한다... 제발!!)
대만의 저명한 언어학자인 저자는 대학교 수학 교수인 남편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가난한 유학생 시절을 거쳐 딸을 다 키워내고 연구자로서의 업적도 많이 쌓았다. 이제 남은 노년을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데...
남편이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을 놓지 않고 있던 저자는 남편의 증상이 심각해짐에 따라 결국 집에서 전담 보호자가 된다. 딸은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없기에, 노년 보호자가 노년 환자를 돌보는 비극이 시작됐다. 낮밤의 개념도 잘 모르고 잠드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남편 때문에 절대적으로 잠이 부족하게 된 아내는 돌봄 노동에 시달리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녹초가 되어 우울증에도 걸리게 된다.
저자가 정말 대단한 게 증상이 점점 심각해져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요양원에 보내기 전까지 무려 4년간 남편을 돌본 것이다. 심지어 중간에 남편을 데리고 해외여행까지 다녀왔다. 70살 노인이 자기보다 큰 남편을 데리고... 사랑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 아닌가.
돌봄 노동은 모두 집에 남겨진 여성들의 몫이 된다고 꼬집은 많은 책들이 있는데, 국가에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저자가 처한 상황이 나나 내 부모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저 상황에 처하면 얼마나 막막할까? 그래서 심심치 않게 동반자살을 하는 사람들 뉴스도 나오고... 책을 읽고 아내에게 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기억을 잃게 되면 그냥 요양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아주 빠른 작별로 부탁해! 괜히 나 돌본다고 집에서 낑낑대봤자 사서 고생이라고. 기억을 잃어서 책을 읽거나 영화/드라마를 보거나 대화를 나누고 여행을 다니는 활동을 할 수 없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고.
모든 판자가 낡아서 교체된 테세우스의 배는 아직도 테세우스가 타고 온 그 배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정체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테세우스의 배' 질문을 알츠하이머 환자에게도 던질 수 있겠다. 아내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법적으로는 여전히 남편이긴 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유기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문을 가질 때 철학 책을 읽어야 하는데...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주변인이나 악역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형식의 소설은 문학의 대가가 쓸수록 그 맛을 잘 살리는 것 같다. 지금 당장 내가 읽었다고 기억하는 책만 생각해도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 바바라 킹솔버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매들린 밀러 <키르케> <아킬레우스의 노래> 등 여러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도 그 목록에 추가할 차례다.
<제임스>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등장인물인 흑인 노예 '짐'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소설이다. '흔한 대체역사물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야기의 흡인력이 대단하며 서사가 빠르게 진행되며, 노예의 진정한 해방은 사용하는 말과 읽고 쓰는 글로 인해 생겨난다는 작가의 사상이 잘 반영되어 페이지를 덮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넘치는 책이다.
미국에서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학교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라 정규 교육 과정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하던데, N-word가 200번 넘게 등장한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의 원작에서 사람들은 그저 어수룩하고 멍청한 조롱거리로 생각할 수 있는 짐. 저자는 이 소설에서 짐을 고도로 지적이며 읽고 쓸 줄 아는 인물로, 다른 흑인들에게 백인들 앞에서 어떤 말투와 태도를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가르치는 교육자로 그려낸다. 특히 언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방식이 인상 깊다. 흑인들끼리 은밀하게 대화할 때는 자연스러운 말투를 쓰다가도, 백인이 나타나면 말투를 dumb down 한다. (Slave filter라는 깔끔한 설명) 심지어 헉과 둘이 여정을 떠나 가깝게 지내면서도 헉에게 정상적인 말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러다 백인에게 정면으로 맞설 때, 백인들이 쓰는 말투로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자 백인들이 신체적 위협보다도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사실을 더 두려워하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가 몰려온다.
'노예가 생각을 하고, 바른 말투를 구사하고, 글을 써? 감히?'라는 생각이 당시 백인들에겐 지배적이었다. 짐은 존 로크나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꿈속에서 토론을 하고, 백인들의 감시가 없는 틈을 타 책을 읽고, 탈출 후 도주하는 과정에서 동료 흑인에게 부탁해 몽당연필 하나를 훔쳐서 글을 쓴다. (그 연필 때문에 그 동료는 백인에게 맞아 죽기까지 한다.) 책과 글쓰기에 대한 짐의 경외심은 그것들이 그에게 유일하게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한 계절 내내 굶었다가 아플 때까지 특식을 먹는 사람 같았다. 그 책들은 일단 읽고 나면 내가 원하는 것도, 내게 필요한 것도 아니게 되었다. (중략) 나는 이미 논리적으로 깔끔한 거짓말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내 상황을 합리화하려고 노력하는 백인들이 들려준 여러 이야기에서 배운 교훈이었다. 나는 종교적 차이에 관한 관용을 다룬 볼테르의 생각을 높이 평가했고, 책에 몰입하면서는 내가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 전개 방식,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방식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고 나자 성경은 가장 흥미롭지 않은 책이 되었다. 성경책은 읽기 시작할 수도 없었고,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바탕으로 나는 내가 성경책을 적들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고, 여전히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압제자는 반드시 피해자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 거 아냐?” 헉이 물었다.
“권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뭐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헉이 자루를 쳐다보았다. “그 무거운 책으로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가져도 돼. 진짜 보물이 생기면 책이야 그냥 버리면 되니까.”
“지니가 든 램프 같은 거 말이죠?” 내가 말했다.
“맞아.” 헉이 말했다.
헉과 나는 잠시 침묵했다. 우리는 젖은 나뭇잎들 위에 누워 있었다. 헉에게 피로가 몰려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가볍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 위로 우거진 플라타너스 가지들 너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무껍질이 말리면서 벗겨지는 게 나는 항상 좋았다.
진심으로 책을 읽고 싶었다. 헉은 잠들었지만, 혹시라도 깨서 내가 책을 펼쳐 놓고 들여다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그런 위험은 감수할 수 없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실제로 책을 읽고 있는지 헉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 헉에게 들키면 책에 적힌 글자와 단어들이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그냥 바보처럼 쳐다보고 있었다고 주장하면 될 것이다. 헉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순간,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에 담긴 힘이 명료하게 현실로 느껴졌다. 내가 글을 볼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글 자체나 내가 글을 통해 배우는 내용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글자를 단순히 보고만 있는 건지, 읽고 있는 건지, 소리만 내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읽는 건 완전히 은밀한 일이었고, 완전히 자유로운 일이었으며, 따라서 완전히 체제 전복적인 일이었다.
나는 책이 담긴 자루를 내 쪽으로 끌어당겨 손을 넣어서 한 권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 책에 잠시 손을 그대로 올려두고 촉감을 즐겼다. 내 손가락으로 감싼 작고 두꺼운 책은 소설이었다. 소설은 읽어 본 적이 없었지만, 픽션이라는 개념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건 종교나 역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책을 자루에서 꺼냈다. 그리고 헉이 아직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고서 책을 펼쳤다. 책장의 냄새가 감격스럽게 느껴졌다.
'베스트팔렌이라는 지역에서...'
나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망할 강가의 어딘가에 있지 않았다. 미시시피강에 있지 않았다. 미주리주에 있지도 않았다.
내 첫 번째 글을 적었다. 이 글이 내가 쓴 글이고 판사의 서재에 있던 책에서 본 구절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짐이라고 불린다. 이름은 아직 고르지 못했다.
나를 붙잡고 있는 백인 포획자의 종교적인 설교에 따르면, 나는 함의 저주를 타고난 희생자다. 소위 주인이라고 불리는 백인들은 자신의 잔혹함과 탐욕을 인정하지 못하고, 도미니크회 수사의 거짓된 말에 기대어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나를 정의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과 내 마음이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히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물론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내가 이 종이 위에 긁어서 만들고 있는 이 자국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다. 만약 이 글자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삶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나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남북전쟁 시기에 묻혀있던 흑인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준 작가님께 먼 동방의 작은 나라의 독자가 감사 인사를 드린다. 단순히 유명한 소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과, 흑인의 시선과 언어로 바라본 것만이 이 작품의 가치가 아니다. 이야기의 재미도 보장한다. 원작 소설에서 헉을 미친 듯이 학대하던 핀을, 짐이... 그리고 짐은 헉의... (스포 방지)
BBC가 작가님과 인터뷰한 내용이 재미있어서 나의 친절한 Gemini에게 번역을 부탁하자 시키지도 않은 일도 해낸다. Slave filter가 적용된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해 낸 것이다. 문맥을 완전히 파악한 거잖아...
"내사 마 늙은 뼈다구 툇마루에 뉘고 저 소리나 다시 감시해야것소(I guess I jest gwyne set dese old bones down on dis heah porch.)"
오스카 수상작 '아메리칸 픽션'의 원작 소설 '이레이저'를 쓴 작가 퍼시벌 에버렛은 테니스를 치던 중 신작 '제임스(James)'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테니스 공을 코트 밖으로 엉뚱하게 날려 보낸 직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허클베리 핀'을 짐의 관점에서 쓴 소설이 있었던가?" 찾아보니 그런 책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직접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에버렛은 이 아이디어가 테니스 경기와는 무관하며, 그저 "대부분의 아이디어가 으레 그렇듯 불현듯 찾아온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평단은 이 소설을 "걸작"이라 평하며 그를 "절정의 기량에 오른 미국의 거장"이라 치켜세웠습니다.
이번 신작의 주인공은 1884년 마크 트웨인이 쓴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유명한 도망 노예 '짐'입니다. 원작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 달아난 소년 헉의 시점에서 서술됩니다. 짐 역시 다른 주인에게 팔려갈 처지에 놓이자 도망친 인물입니다. 헤밍웨이가 "미국 문학의 원류"라 극찬했던 원작에서 짐은 꽤 비중 있는 인물이지만, 헉에 비하면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습니다. 에버렛의 표현대로라면 원작 속의 짐은 "제대로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죠. 에버렛은 그런 그에게 비로소 목소리를 찾아주었습니다.
짐의 재해석 (Jim reimagined)
영국 출간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에버렛은 최근 미국의 인종 화합이 "뒷걸음질 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는 유색인종에 대한 경찰의 과잉 진압과 사망 사건이 놀라울 정도로 빈번하다며 이를 "린치"에 비유했고, 노예제의 유산이 여전히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에버렛은 짐(훔친 몽당연필로 자신의 이름을 '제임스'라 적으며 존재를 증명하는 인물)을 재해석해, 트웨인이 묘사했던 고정관념 속의 인물이 아닌 피와 살이 있는 인간으로 되살려냈습니다. 소설 '제임스' 속에서 그는 주체적인 인물입니다. 독자들은 그가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지, 국가와 인종차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꿈속에서 철학자들과 대담을 나눌 만큼 지적이고 현명합니다. 제임스는 자문합니다. "다른 노예들에게 글을 가르친 노예, 빗변의 정의와 아이러니의 의미, 심지어 '응보(retribution)'의 철자까지 아는 노예에게 그들은 과연 무슨 짓을 할까?"
에버렛은 관점의 변화를 위해 언어라는 강력한 장치를 사용합니다. 소설 속 흑인 노예들은 백인들 앞에서는 일부러 어눌한 사투리를 쓰며 우스꽝스럽고 어수룩한 척 연기합니다. "내사 마 늙은 뼈다구 툇마루에 뉘고 저 소리나 다시 감시해야것소(I guess I jest gwyne set dese old bones down on dis heah porch...)"하는 식이죠. 하지만 그들끼리 있을 때는 "예기적 아이러니(proleptic irony)" 같은 고차원적인 개념을 논할 만큼 유창하고 지적인 표준 영어를 구사합니다. 에버렛은 "노예든 수감자든 억압받는 이들은 억압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만의 소통 방식을 찾기 마련"이라며, 소설 속에서는 그것이 바로 '표준 영어'라고 설명합니다. 제임스는 이를 "노예 필터"라 부르며 딸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백인들은 우리가 특정 방식으로 말하길 기대하니,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게 우리 신상에 좋아. 열등감을 느낄 때 상처받는 건 결국 우리뿐이란다." 이는 스스로를 "병적으로 반어적인 작가"라 칭하는 에버렛다운 설정입니다. 소설 속 한 판사는 도망 노예인 제임스가 자신에게 총을 겨눴다는 사실보다, 그의 말투가 예상과 달리 너무나 유창하다는 사실에 더 공포를 느낍니다.
N으로 시작하는 단어 (The N-word)
트웨인의 원작은 반노예제 문학임에도 불구하고 흑인 비하 단어(N-word)가 200번 넘게 등장해,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기 까다로운 책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교육 과정에서 빠진 것은 물론 미국의 일부 학교에서는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죠. 에버렛은 금서 조치에는 반대하지만, "생각 없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내심 자신의 책도 금지되길 바란다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는 "미국의 주 정부가 책을 금지할 수는 있어도 예술을 막을 수는 없다"며, 책을 불태우거나 금지하는 것은 파시스트 정권이 타인을 통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트웨인의 원작에 대해서는 "청소년기 미국이 인종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마주하며 방랑하는 모습을 그려낸 훌륭한 소설"이라며, 헉이 짐을 '노예'이자 '친구'로 받아들이려 애쓰는 과정은 "놀라운 성취"라고 평가했습니다.
트웨인처럼 에버렛 역시 소설에 그 비하 단어를 사용합니다. 물론 원작만큼 빈번하진 않지만요. 그는 이것이 맥락과 의도의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쓰는 언어는 그 사람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는 "지뢰밭 입구에 '지뢰'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 아니겠냐"라고 반문합니다. 또한 그는 의도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누군가 악의를 담아 나를 그 단어로 부른다면 불쾌하겠지만, 흑인인 내가 그 단어를 쓰는 것과 내 학생들이 쓰는 것은 다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언어에 대한 감수성은 중요하지만, 요즘 우리는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미국의 인종 문제 (Race in America)
에버렛은 지금까지 24편의 소설을 썼고, 그중 다수가 미국의 인종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작 '더 트리스(The Trees)'는 과거와 현재의 린치 문제를 유머를 섞어 다뤘고, '이레이저'는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대 재생산하는 출판계를 풍자했습니다. 이번 '제임스' 역시 노예제와 인종적 편견에 맞서는 작품입니다. 에버렛은 현재 미국의 인종 분열 상황에 대해 다소 비관적입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기세가 등등하고, 양극단의 논리가 건전한 담론을 집어삼켰다고 우려합니다. 또한 노예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그것이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을 애써 외면하려는 세력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증조할머니 역시 노예였습니다. 그만큼 노예제는 시간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는 금전적 배상을 화해의 제스처로 보지만, 자신보다는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노에 대해서는 "격분과 의분은 다르다"며 선을 그었습니다. "물론 저도 화가 납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이런 일은 늘 반복되어 왔죠." 이는 관찰자로서의 작가적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그는 노예제와 불의가 결국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됨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대신 그는 또 다른 '자연'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플라이 낚시를 할 때, 흐르는 강물 속에 서 있으면 그곳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일하기 가장 좋은 장소"가 된다고 합니다.
K-SF소설의 흥행 보증 수표!
김초엽 작가님이나 천선란 작가님 새 책이 나오면 도서관만 이용하는 나로서는 책을 빌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가인데... 나는 SF 소설이라면 조금은 건조한 문체로 전문적인 과학지식이 등장하거나 스케일이 엄청나게 크거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마치 <삼체>와 같은)
그런데 K-SF 소설은 뭔가 신파 느낌이 난다. 안온-다정-무해한 좀비라니.. 달고 짠 일본 음식을 계속 먹다가 물려서 김치찌개가 간절해지는 느낌을 책을 읽으면서 받다니..
천선란 작가님은 항상 좀비 아포칼립스를 써보고 싶었다고 한다. 연작소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장편소설 아닌가! 소원성취 하셨고 베스트셀러 자리에도 올랐으니 축하합니다.
지구는 작지 않지만 거의 끝없이 이어진다. 유려히 흐르는 운문들의 서사시다.
지구를 하루에 16바퀴씩 도는 우주정거장에서 다양한 실험과 지구 관측을 진행하며 같은 궤도를 도는 6명의 우주인이 보내는 하룻 동안의 이야기. 각 챕터의 제목은 궤도 1부터 시작해서 궤도 16으로 끝난다. sf 소설일 것 같은 주제이지만 배경이 우주일 뿐, 사람의 이야기이다.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궤도를 도니까 지구에서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인간의 삶 따위 다 잊고 그 안에서의 스스로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인물들. 그러나 지구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관조하기도 한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전쟁이 끊이지 않고 서로 죽이는 세상이다.
(우주선 내에서)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압도적인 시선과 아름다운 문장에 계속 정신을 빼앗긴다.
지구 바깥을 돌며 바라본 모습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렸는지, 작가님이 직접 우주선에 타서 지구를 몇 바퀴 돌면서 바라보는 풍경을 그대로 문장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했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우주 개척을 위해 탐험을 떠나겠지만, 작가도 꼭 포함시키면 좋겠다. 그러면 지구에 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쓴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지구 위의, 우주선 안의 인간이 등장하지 않고 오롯이 지구의 풍경만을 아름답게 그려낸 부분 전체를 가져와봤다.
궤도 15
이들은 남극 빙붕을 떠나 보이지 않는 무의 땅을 가로질러 어둠 속에서 북동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다. 아래로 밤에 잠긴 인도양이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지구의 존재는 어렴풋하다. 대기권에 희미하게 둘린 주황빛 선으로 저기 지구가 있음을 짐작한다. 저곳에 지구가, 친밀하고 충직한 달이 있다. 대기권 너머로 별들이 보여서 지구는 마치 바깥 테두리가 유리로 만들어진 것도 같고, 아니면 지구가 유리 돔 속에 들어 있는 것도 같다. 우주선이 끝없이 새로워지는 지평선을 향해 궤도를 도는 동안 수십억 별들은 세차게 위로 돌진하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 유일한 존재는 이 우주선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암석을 둘러 고요하게 미끄러져 간다. 어쩌면 초창기 탐험가들도 이랬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바다에서, 아직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해안과 몇천 마일 떨어져 몇 개월을 있다 보면 지구와의 친밀함으로 충만해졌으리라. 지구에 자신들만 있다는 그런 느낌. 그리고 잠깐의 평화를 누렸을 것이다.
이곳 시계는 새벽 3시를 막 지났다. 저 아래 수십, 수백 마일 떨어진 검은 하늘에서 번개가 느리게 번쩍인다. 새틴 같은 어둠은 먹구름을 만나 뽀얗게 변한다. 적도가 가까워진다. 비명을 지르는 별, 거대한 베들레헴의 빛이 나타난다. 이들이 그걸 따라간다기보다 그것이 이들을 향해 다가온다. 여명의 파동이 밤을 뒤편으로 몰아내고, 구름은 (소멸한 태풍의 잔해는) 보라색과 복숭아색으로 물든 사나운 봉우리다.
갑작스러운 햇빛이 심벌즈 소리처럼 챙챙 요란하게 퍼진다. 몇 분 후 이들은 바다에서 몰디브, 스리랑카, 인도 끝자락이 아침빛에 무르익는 곳으로 들어선다. 만나르만의 얕은 바닷물과 모래톱. 오른쪽으로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해안이 있다. 바닷물은 모래와 조류와 산호와 식물성 플랑크톤 때문에 다채로운 녹색으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에서 벗어난 먹구름이 한 조각 굴러들어와 평소라면 평온할 풍경이 피로하고 불안해 보인다. 인도 동부 해안을 올라가다 보면 구름은 듬성듬성해진다. 아침이 짙어지다가 잠깐 선명해진다. 이내 실안개가 벵골만으로 이동한다. 구름은 여러 가닥으로 성글어진다. 토사가 쌓인 갠지스강 어귀는 방글라데시로 이어진다. 짙은 흙빛 평원과 황토색 강, 1000마일 능선이 이어지는 진홍색 골짜기. 히말라야산맥은 서서히 서리로 뒤덮이고, 에베레스트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다. 그 너머 지구를 덮고 있는 것들은 선명한 갈색의 티베트고원, 빙하, 흐르는 강, 사파이어색으로 얼어붙은 호수들이다.
더 위로 올라와 중국의 크고 높은 산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주자이거우 계곡의 멋진 가을 단풍이 희미한 적갈색 점으로 보인다. 고비사막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모래 속에서 물의 흐름을, 흙빛 속에서 담녹색·연보라색·레몬색·진홍색을 보고, 건조한 땅을 기름이 쏟아진 응달로 표현하고, 협곡을 진주조개로 그리는 화가의 거침없는 붓놀림이 보인다. 그 위를 지나 북쪽 궤도로 진입하면 오후의 북한이 나오고 더 위로 가면 홋카이도다. 일본은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가닥이다. 열여섯 시간 전에 지났던 열한 번째 전 궤도에서는 내려가는 길에 이 지점을 지났지만, 이번에는 올라가는 길에 스쳐 지난다. 태평양 해령을 따라 펼쳐진 러시아 섬들을 가로질러 베링해를 건넌다. 이제 육지는 비단 조각처럼 미끄러져 멀어진다.
궤도를 돌다 보면 대륙을 등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구 정상을 오르고 넘어간다. 넓고 또렷한 호를 그리며 북태평양도 오르고 건넌다. 이들의 궤도는 지구 주위를 일직선으로 돌게 되어 있지만, 지구의 자전 때문에 그 경로가 북극권 한계선 가장자리부터 남쪽 바다까지 위아래로 큰 기복을 그리며 도는 것처럼 나타난다. 최북단에 이른 지금부터는 다시 하강한다. 저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부드럽고 아삭한 얼음 사탕은 알래스카다. 구름 한 점 없이도 하얗고 똑 부러질 것만 같은 사탕. 구름이 더 아래 남쪽에서 뭉치면 온통 보이는 풍경은 부빙과 구름으로 이뤄진 액체 소용돌이뿐이다. 알래스카반도가 긴 꼬리를 남긴다. 육지와 피오르와 작은 만이 얼핏 보인다. 산맥의 등뼈. 가늘어지는 부빙. 왼편으로 보이는 캐나다 해안은 바다라기보다 아무렇게나 난도질당해 조각난 땅 같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세상 반대편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머나멀어서 닿지 않는 그런 곳. 그런데 이제 이들은 대륙들이 웃자란 정원처럼 서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있다. 아시아와 오스트랄라시아는 하나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이에 있는 섬들로 이어져 있다. 러시아와 알래스카도 그렇게 맞닿아 있다. 물 한 방울도 둘을 갈라놓지 않는다. 팡파르 소리도 없이 유럽과 아시아가 만난다. 대륙들과 나라들이 잇따른다. 지구는 작지 않지만 거의 끝없이 이어진다. 유려히 흐르는 운문들의 서사시다. 상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타래가 풀리듯 바다가 다가오고, 계속 다가오고 다가오고 다가오는 동안에도, 윤기 나는 파란색을 제외하면 육지는 물론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도, 아는 나라들이 죄다 우주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처럼 보일 때도 다른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다른 무언가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러다 육지가 다시 나타나면 정신을 빼앗아 간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육지가 있지’ 하고 생각하고, 그러다 또 바다가 나타나면 꿈속의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바다가 있지’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질의 꿈에 싸여 나중에는 출구를 찾을 수 없고 빠져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저 100마일 깊숙이 꿈속에서 떠다니고 회전하고 비행한다.
저기서 밤이 끝나 가고 있다. 멀리 동쪽에서 지평선이 부예진다. 이곳은 아직이지만, 이들이 저곳을 바짝 쫓는다. 아래에는 태평양이 있다. 뒤틀린 곡선을 그리며 멀어지는 것은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봉우리들이다. 줌 렌즈로 들여다보면 아주 멀리 바다에 있는 땅덩어리 위에 새겨진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가, 흰색으로 날카롭게 경계 지어진 해안선이, 그을린 관목 지대의 잿빛이 보인다. 바하칼리포르니아의 비옥한 해안 평야와 중앙아메리카의 앙상한 목도 역시 비뚜름하게 멀어진다.
지구를 이렇게 빠르게 지나치다 보면 가끔 지치고 어리둥절해질 때가 있다. 대륙 하나를 지나친 지 15분도 되지 않아 다음 대륙을 통과한다. 사라져 버린 대륙을 떨쳐 내기 힘들 때도 있다. 왔다가 떠나간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삶이, 그 감각이 가시지 않고 남는다. 대륙들이 열차 창밖의 벌판과 마을처럼 휙휙 지나간다. 낮과 밤, 계절과 별, 민주주의와 독재. 멈추지 않는 트레드밀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밤에 잠잘 때가 유일하다. 그러나 잠잘 때조차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듯 지구의 회전을 느낄 수 있다. 거기 있음을 느낀다. 일곱 시간의 밤을 뚫고 나오는 낮을 빠짐없이 느낀다. 활기찬 별들과 바다의 기운과 비틀대는 빛을 피부로 느낀다. 만일 지구가 1초라도 자기 궤도에서 멈춘다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화들짝 놀라 일어날 것이다.
동이 트고 어느덧 40분이 지났다. 이제 동쪽에서부터 밤의 그림자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왼쪽으로 보이는 얼룩 정도로, 크지 않다. 파란색이 보라색으로 바뀌지만 그게 다다. 초록색도 보라색으로, 흰색도 보라색으로, 아메리카 대륙 또는 남은 게 뭐든 모두 보라색으로 변한다. 아니, 아메리카는 사라지고 없다. 밤이 지구의 푸른 직물을 풀어헤친다.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적도를 넘는다. 달은 어슴푸레하고 한층 더 토실해졌다. 명암 경계선이 갑자기 불쾌해진 듯 지구 표면에서 낮의 빛을 쓸어 버리고, 어디선가 별들이 스노드롭 꽃송이처럼 만개한다. 우주비행사들은 자면서도 난데없는 밤의 무게를 느낀다. 누군가 지구의 커다란 전구를 꺼 버렸다. 모두 좀 더 곤히 잠든다.
이제 바다다. 남태평양의 에콰도르와 페루 앞바다에 있는 키토와 리마, 두 도시가 육지를 예고한다. 1000마일의 번개가 해안을 치고, 2000마일의 비구름이 바다 위에 자리를 잡고, 4000마일의 산등성이가 성벽을 이룬다. 어떤 도시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한가운데, 주황색 점들이 점점이 박힌 1000마일의 조각보는 열대 우림이 불타는 곳들이다. 불은 안데스산맥 자락까지 이어진다. 브라질 동부를 넘어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까지 내려가고, 거기서 궤도는 불타는 대륙을 건넌다. 저 아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1200만 명이 살아간다. 중심부가 교외로, 농지로, 암흑으로, 강의 어귀로, 바다로, 그리고 높이 있는 남극권으로 이어진다.
지구 맨 아래 밤의 땅은 황혼에 잠긴 남극점의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지만, 이 극지방의 하늘은 짙고 은하로 가득하다. 은하수의 심장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 강력하고 매혹적인지 어떤 날 밤에는 궤도가 지구와 떨어져 저 은하수를 향해, 저기 깊고 밀도 높은 별들 속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별이 각자의 빛을 발하니 더 이상 어둡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아프리카 최남단까지 2000마일쯤 육지 없이 남대서양을 한참 지난다. 그러나 만일 선원들이 계속 내다보며 시야에 적응했다면 공허함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절대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위안만을 받았을 것이다. 이번 밤 동안 우주선은 한참이나 세상에 파묻힌 채 나아간다.
갈고리 모양 발톱 같은 케이프타운의 불빛은 수천 마일 펼쳐지는 대륙의 시작 또는 끝을 가리킨다. 상행 궤도는 케이프타운 해안 위로 올라가 모잠비크, 탄자니아, 케냐, 소말리아를 지난다. 달빛 비치는 밤의 아프리카는 탁한 갈색이다. 구름은 드문드문 끼어 있고 대륙 전역에서 번갯불이 번쩍인다. 도시 불빛은 조심스럽고 듬성듬성하다. 여기 마푸투가, 저기 하라레가, 저 멀리 루사카가, 앞에는 몸바사가 있다. 이 도시들은 저마다 태피스트리 직물에 얹어진 작은 금화 더미다. 야간 조명이 깔린 도로나 무분별하게 뻗쳐 나가는 도시 무엇과도 이어져 있지 않다. 허공 속으로 기우는 지구 위 인간의 아름답고 포근한 빈곤. 추락할 것 같다가도 그때마다 더 많은 땅이 나타나고, 그렇게 아덴만을 건너 중동을 향해 그 흔적을 따라간다.
아라비아해 살랄라의 불빛, 잔잔하게 소용돌이치는 사막에 부는 날카로운 소리. 조금 전까지는 아부다비, 도하, 무스카트가 먼 해안을 장식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태양이 또 한 번 떠오르고 은빛 검이 밤을 푹 찌른다. 선원들이 우주에 있는 동안 수천 번의 일출이 있었고 그중 수백 번은 이들이 직접 지켜봤다. 지금 깨어 있다면 수면실에서 나와 또 한 번의 일출을 봤으리라. 어떻게 이곳 풍경은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면서도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가. 이들은 돔 창문의 셔터를 올리고 자신들이 진공 우주 속에 외딴 머리와 몸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호흡할 수 있게 산소가 있는 작은 공간에 이들이 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사함이 밀려온다. 어떤 말이나 생각도 그와 견줄 수 없다. 그래서 잠시 눈을 감는다. 지구는 여전히 생생하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구체의 형태로 이들의 눈꺼풀 안쪽에 존재한다. 단순히 잔상인지 아니면 지구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정신의 투영물인지는 알 수 없다.
해가 뜰 때마다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일출은 매번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빛의 칼날이 벤 자리에서 태양이 찰나의 완전한 별로 터져 나와 양동이를 뒤집은 것처럼 빛을 쏟아내어 지구가 빛에 잠길 때마다, 순식간에 밤이 낮이 될 때마다, 지구가 잠수하는 생물처럼 우주로 가라앉아 깊은 우주에서 날마다 또 다른 하루를 발견할 때마다, 90분마다 돌아오는 하루, 무한히 공급되는 새날을 발견할 때마다 이들은 놀란다.
새벽빛에 표백된 오만만의 도시들이 뒤에 남겨진다. 장밋빛 산들, 연보랏빛 사막, 그 위로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이 나온다. 둥그렇고 희미한 구름 뭉치는 달이다. 카자흐스탄을 지날 때면 자신들이 저곳에서 지구를 떠나왔으며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이 제대로 실감 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유리창을 검게 그을리는 화염에 싸여 대기권을 뚫고 날아가, 부디 열 차폐막이 버텨 주고 낙하산과 역추력 장치가 제구실을 하고 수천 개 부품이 움직이고 작동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대기권이라고 부르는, 일렁이는 저 선을 이들이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게 쉽사리 와닿지 않는다. 맹렬히 불타는 캡슐 속에서 열기와 충격을 견디고 재빠르게 보조 낙하산을 펼치고 내려가 카자흐스탄 평원의 수풀과 야생마들을 보게 된다는 게 말이다.
선원들이 자는 동안 우주선은 꼬박 90분이 걸려 지구를 한 바퀴 더 돌았다. 오늘 열여섯 번 도는 궤도 중 열다섯 번째 궤도였다. 이제 오른쪽을 바라보면 눈 덮인 히말라야산맥이 도로처럼 쭉 뻗은 풍경이 펼쳐진다. 광활하고 탁 트인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산맥 남쪽으로는 도시 라호르와 뉴델리가 있는데, 찬란한 낮의 햇살에 풍경이 하얗게 바래 사라지고 마치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광막한 지형에 삼켜진다. 산맥만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러시아는 아침이 한창이다. 지구는 날카로운 빛을 받아 또 한 번 칠흑 같은 우주 속 유리구슬이 된다. 인접한 별들과 행성들을 더는 볼 수 없게 된 지금, 지구는 상실감에 빠졌고 연약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의 존재가 되어 있다. 지구의 흠 없는 표면 위에는 깨뜨러질 게 아무것도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들은 궤도를 한 번 돌 때마다 서쪽으로 몇 도씩 이동할 것이고, 90분이 지나 궤도가 다시 북쪽을 향하게 되면 새 하루가 밝는 동유럽 위를 건널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나날 중 또 한 번의 새날이 시작된다. 지구는 파란 고리 모양이고 눈으로 뒤덮여 있다. 궤도는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북극권 한계선의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너머 북극점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러시아에서 내려와 5000마일간 이어지는 태평양 길로 향한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한화 담당 기자였던,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꽤나 공신력 있는 기자라고 인정받는 이상학 기자가 쓴 한화 이글스 이야기. 김태균과 류현진의 시절을 다 날려먹고, 매일 져도 경기 끝나면 '나는 행복합니다' 응원가를 부르는 보살 팬들을 보며 똑같이 꼴찌라고 그나마 서로에게 위안이 돼주던 갈매기와 독수리, 조류동맹 롯데와 한화.
그러나 한화는 2025 시즌 두 용병 투수의 활약으로 한국시리즈까지 높이 비상했고, 롯데는 95%의 가을야구 진출 확률을 부숴버리는 12연패로 팬들 마음을 부숴놓고 여전히 빌빌거린다. 21세기에 우승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인 팀,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이 1999년인 팀, 팬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팀, 야구를 모르던 아내에게 왜 이 팀을 응원해서 자기도 고통스럽게 만드냐며 원망받게 만드는 팀.. 롯데도 한화처럼 당당하게 치고 올라가서 긴 암흑기를 회고하는 이런 책이 언젠가 나올 수 있을까?
KBO 야구 시즌이 끝나니까 야구 관련 신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기에서 롯데 놈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지.
팀의 마무리 투수 김원중이 시즌 중에 뜬금 자서전을 출근했는데, 고작 32살이 자서전?이라고 고개를 갸웃하며 확인해 보니 이건 거의 화보집이라고 한다. 2030 여성들이 줄을 서서 산다고 한다. 그래, 2030 여성들 덕에 연간 관중에 1000만 명을 넘기도 하고 응원 문화도 많이 유해졌다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 새ㄲ가 화보집을 내고 난 이후 팀이 12연패를 했다. 백약이 무효했으니 어디에서라도 원인을 찾고 싶어서 까는 거라고 쉴드를 칠 수도 있는데, 세상 그 어느 선수가 시즌 중에 화보집을 낸 적이 있다면 가져와 봐라. 연아가? 박찬호가? 흥민이가? 저런 대 스타들도 시즌 중에는 경기에 집중하고 훈련에만 몰두한다. 지깟게 뭐라고 시즌 중에 저딴 돈벌이 놀음을 하냐고오오오!!!!!!!!!!!!!!!!! 소속사가 시켜도 선수 새ㄲ 본인이 '가을야구 진출하고 시즌 마무리 잘 한 다음에 발간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라고 제안하는 사회적 눈치 같은 거 없어? 누가 보면 뭐 매년 30세이브 넘게 하고 오승환처럼 한국시리즈 마지막 투수로 몇 번 세리머니도 해본 투수인 줄 알겠다 이 새ㄲ야. 아 쓰다 보니 개 열받네...
팀이 8연패까지 하고 그다음 경기에서 제발 연패 탈출 좀 하자고 선수들이 애써서 7회까지 7-3으로 앞서고 있다. 앞 투수들이 주자를 쌓아 8회 1사 만루가 됐다. 감독은 다급한 마음에 가장 믿을 만한 마무리를 올린다. 그런데 마무리는 여기에서 만루홈런을 처맞고 순식간에 동점이 된다. 9회에도 올라온 마무리는 또 볼질을 하다가 한 점을 더 줘 결국 역전까지 허용한다. 9회말에 겨우 동점을 만들고 연장까지 가서 빌빌대며 다른 투수들까지 다 소진해서 겨우 무승부를 만든다. 팀 연패 기간에 마무리가 5점을 줘? 후우...
이 마무리 투수의 블론이 한두 해도 아니라 심박수를 가라앉히고 온라인 교보문고에 책을 구경하러 갔다. 으아니 그런데 거기 이 화보집이 떡하니 예약구매 이벤트를 하고 있고, 여성팬들이 알콩달콩 댓글을 달고 있는 거다. 머릿속 퓨즈가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야구팬들이 왜 항상 화가 나있냐고? 다 이유가 있다... 상품 페이지의 리뷰인가 기대평에 분노의 댓글을 달았다. "7A78877 하던 팀이 오랜만에 선수들의 활약으로 3위까지 올라왔는데 위기에 빠져 8연패에 빠져있고 선수 본인은 5점 차 리드를 날리는 블론까지 하고 있는 와중에 이딴 화보집을 내는 게 프로선수의 자세 맞는지 심히 의문입니다." 살면서 처음 달아본 악플이었다. 다음 날 확인해 보니 팬들의 신고를 받았는지 댓글이 삭제되어 있었다. 결국 12연패까지 하고 나서 어수선한 팀은 그대로 7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7A788777이 됐다. A는 10위랍니다 데헷.
이래놓고 또 다음 시즌 개막하면 희망회로를 돌리면서 야구를 쳐 보고 있을 나 자신이 벌써부터 원망스럽다. 부모님이 물려준 팀도 아니고, 학연 지연도 전혀 없는데 왜 저 팀을 응원하게 돼서 이렇게 끝나지 않는 고통을 받게 된 건지...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먼저 과거로 돌아가 롯데팬 하지 말라고 나 자신을 뜯어말릴 거다. 롯데 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밤새 쓸 수 있지만 여기까지 써야지. 열심히 책이나 읽고 독후감이나 끄적거리며 우아하게 사는 지성인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극렬 롯빠 아재임을 인증한다.
염경엽 감독님은 2025 시즌 wire-to-wire(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모두 우승) 우승을 차지해 이젠 누구도 명장임을 부정할 수 없는 거물이 된 것 같다. 자서전은 거물이 됐다는 증거 아닌가! 기대한 것처럼 책의 초반은 본인의 실패담과 약간의 자랑이 첨가된 평범한 자서전이다. 그런데 실패를 겪고 우승 단장과 우승 감독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부분은 꽤나 좋은 교훈을 준다. 실무를 모두 꿰고 있는 사람이 절실하게 노력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 리더의 자리에 올라 확고한 의지를 갖고 조직원을 이끌어 결국 정상을 차지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엔 대놓고 자신이 확립한 리더십 원칙들을 소개한다. 우승팀 감독이라고 대충 누가 대필해서 낸 책 같지가 않다. 리더십 학습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좋은 책이다. 부럽다 LG... 롯데 감독은 원칙은커녕 뇌도 없어 보이는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