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맨사 하비
지구는 작지 않지만 거의 끝없이 이어진다. 유려히 흐르는 운문들의 서사시다.
지구를 하루에 16바퀴씩 도는 우주정거장에서 다양한 실험과 지구 관측을 진행하며 같은 궤도를 도는 6명의 우주인이 보내는 하룻 동안의 이야기. 2024년 부커상 수상작.
각 챕터의 제목은 궤도 1부터 시작해서 궤도 16으로 끝난다. sf 소설일 것 같은 주제이지만 배경이 우주일 뿐, 사람의 이야기이다.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궤도를 도니까 지구에서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인간의 삶 따위 다 잊고 그 안에서의 스스로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인물들. 그러나 지구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관조하기도 한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전쟁이 끊이지 않고 서로 죽이는 세상 아닌가.
(우주선 내에서)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압도적인 시선과 아름다운 문장에 계속 정신을 빼앗긴다.
지구 바깥을 돌며 바라본 모습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렸는지, 작가님이 직접 우주선에 타서 지구를 몇 바퀴 돌면서 바라보는 풍경을 그대로 문장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했다.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우주 개척을 위해 탐험을 떠나겠지만, 작가도 꼭 포함시키면 좋겠다. 그러면 지구에 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이 쓴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지구 위의, 우주선 안의 인간이 등장하지 않고 오롯이 지구의 풍경만을 아름답게 그려낸 부분 전체를 가져와봤다.
궤도 15
이들은 남극 빙붕을 떠나 보이지 않는 무의 땅을 가로질러 어둠 속에서 북동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다. 아래로 밤에 잠긴 인도양이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지구의 존재는 어렴풋하다. 대기권에 희미하게 둘린 주황빛 선으로 저기 지구가 있음을 짐작한다. 저곳에 지구가, 친밀하고 충직한 달이 있다. 대기권 너머로 별들이 보여서 지구는 마치 바깥 테두리가 유리로 만들어진 것도 같고, 아니면 지구가 유리 돔 속에 들어 있는 것도 같다. 우주선이 끝없이 새로워지는 지평선을 향해 궤도를 도는 동안 수십억 별들은 세차게 위로 돌진하는 듯하다.
어쩌면 지금 유일한 존재는 이 우주선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암석을 둘러 고요하게 미끄러져 간다. 어쩌면 초창기 탐험가들도 이랬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바다에서, 아직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해안과 몇천 마일 떨어져 몇 개월을 있다 보면 지구와의 친밀함으로 충만해졌으리라. 지구에 자신들만 있다는 그런 느낌. 그리고 잠깐의 평화를 누렸을 것이다.
이곳 시계는 새벽 3시를 막 지났다. 저 아래 수십, 수백 마일 떨어진 검은 하늘에서 번개가 느리게 번쩍인다. 새틴 같은 어둠은 먹구름을 만나 뽀얗게 변한다. 적도가 가까워진다. 비명을 지르는 별, 거대한 베들레헴의 빛이 나타난다. 이들이 그걸 따라간다기보다 그것이 이들을 향해 다가온다. 여명의 파동이 밤을 뒤편으로 몰아내고, 구름은 (소멸한 태풍의 잔해는) 보라색과 복숭아색으로 물든 사나운 봉우리다.
갑작스러운 햇빛이 심벌즈 소리처럼 챙챙 요란하게 퍼진다. 몇 분 후 이들은 바다에서 몰디브, 스리랑카, 인도 끝자락이 아침빛에 무르익는 곳으로 들어선다. 만나르만의 얕은 바닷물과 모래톱. 오른쪽으로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해안이 있다. 바닷물은 모래와 조류와 산호와 식물성 플랑크톤 때문에 다채로운 녹색으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에서 벗어난 먹구름이 한 조각 굴러들어와 평소라면 평온할 풍경이 피로하고 불안해 보인다. 인도 동부 해안을 올라가다 보면 구름은 듬성듬성해진다. 아침이 짙어지다가 잠깐 선명해진다. 이내 실안개가 벵골만으로 이동한다. 구름은 여러 가닥으로 성글어진다. 토사가 쌓인 갠지스강 어귀는 방글라데시로 이어진다. 짙은 흙빛 평원과 황토색 강, 1000마일 능선이 이어지는 진홍색 골짜기. 히말라야산맥은 서서히 서리로 뒤덮이고, 에베레스트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다. 그 너머 지구를 덮고 있는 것들은 선명한 갈색의 티베트고원, 빙하, 흐르는 강, 사파이어색으로 얼어붙은 호수들이다.
더 위로 올라와 중국의 크고 높은 산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주자이거우 계곡의 멋진 가을 단풍이 희미한 적갈색 점으로 보인다. 고비사막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모래 속에서 물의 흐름을, 흙빛 속에서 담녹색·연보라색·레몬색·진홍색을 보고, 건조한 땅을 기름이 쏟아진 응달로 표현하고, 협곡을 진주조개로 그리는 화가의 거침없는 붓놀림이 보인다. 그 위를 지나 북쪽 궤도로 진입하면 오후의 북한이 나오고 더 위로 가면 홋카이도다. 일본은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가닥이다. 열여섯 시간 전에 지났던 열한 번째 전 궤도에서는 내려가는 길에 이 지점을 지났지만, 이번에는 올라가는 길에 스쳐 지난다. 태평양 해령을 따라 펼쳐진 러시아 섬들을 가로질러 베링해를 건넌다. 이제 육지는 비단 조각처럼 미끄러져 멀어진다.
궤도를 돌다 보면 대륙을 등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구 정상을 오르고 넘어간다. 넓고 또렷한 호를 그리며 북태평양도 오르고 건넌다. 이들의 궤도는 지구 주위를 일직선으로 돌게 되어 있지만, 지구의 자전 때문에 그 경로가 북극권 한계선 가장자리부터 남쪽 바다까지 위아래로 큰 기복을 그리며 도는 것처럼 나타난다. 최북단에 이른 지금부터는 다시 하강한다. 저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부드럽고 아삭한 얼음 사탕은 알래스카다. 구름 한 점 없이도 하얗고 똑 부러질 것만 같은 사탕. 구름이 더 아래 남쪽에서 뭉치면 온통 보이는 풍경은 부빙과 구름으로 이뤄진 액체 소용돌이뿐이다. 알래스카반도가 긴 꼬리를 남긴다. 육지와 피오르와 작은 만이 얼핏 보인다. 산맥의 등뼈. 가늘어지는 부빙. 왼편으로 보이는 캐나다 해안은 바다라기보다 아무렇게나 난도질당해 조각난 땅 같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세상 반대편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머나멀어서 닿지 않는 그런 곳. 그런데 이제 이들은 대륙들이 웃자란 정원처럼 서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있다. 아시아와 오스트랄라시아는 하나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이에 있는 섬들로 이어져 있다. 러시아와 알래스카도 그렇게 맞닿아 있다. 물 한 방울도 둘을 갈라놓지 않는다. 팡파르 소리도 없이 유럽과 아시아가 만난다. 대륙들과 나라들이 잇따른다. 지구는 작지 않지만 거의 끝없이 이어진다. 유려히 흐르는 운문들의 서사시다. 상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타래가 풀리듯 바다가 다가오고, 계속 다가오고 다가오고 다가오는 동안에도, 윤기 나는 파란색을 제외하면 육지는 물론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도, 아는 나라들이 죄다 우주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처럼 보일 때도 다른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다른 무언가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러다 육지가 다시 나타나면 정신을 빼앗아 간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육지가 있지’ 하고 생각하고, 그러다 또 바다가 나타나면 꿈속의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바다가 있지’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질의 꿈에 싸여 나중에는 출구를 찾을 수 없고 빠져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저 100마일 깊숙이 꿈속에서 떠다니고 회전하고 비행한다.
저기서 밤이 끝나 가고 있다. 멀리 동쪽에서 지평선이 부예진다. 이곳은 아직이지만, 이들이 저곳을 바짝 쫓는다. 아래에는 태평양이 있다. 뒤틀린 곡선을 그리며 멀어지는 것은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봉우리들이다. 줌 렌즈로 들여다보면 아주 멀리 바다에 있는 땅덩어리 위에 새겨진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가, 흰색으로 날카롭게 경계 지어진 해안선이, 그을린 관목 지대의 잿빛이 보인다. 바하칼리포르니아의 비옥한 해안 평야와 중앙아메리카의 앙상한 목도 역시 비뚜름하게 멀어진다.
지구를 이렇게 빠르게 지나치다 보면 가끔 지치고 어리둥절해질 때가 있다. 대륙 하나를 지나친 지 15분도 되지 않아 다음 대륙을 통과한다. 사라져 버린 대륙을 떨쳐 내기 힘들 때도 있다. 왔다가 떠나간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삶이, 그 감각이 가시지 않고 남는다. 대륙들이 열차 창밖의 벌판과 마을처럼 휙휙 지나간다. 낮과 밤, 계절과 별, 민주주의와 독재. 멈추지 않는 트레드밀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밤에 잠잘 때가 유일하다. 그러나 잠잘 때조차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듯 지구의 회전을 느낄 수 있다. 거기 있음을 느낀다. 일곱 시간의 밤을 뚫고 나오는 낮을 빠짐없이 느낀다. 활기찬 별들과 바다의 기운과 비틀대는 빛을 피부로 느낀다. 만일 지구가 1초라도 자기 궤도에서 멈춘다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화들짝 놀라 일어날 것이다.
동이 트고 어느덧 40분이 지났다. 이제 동쪽에서부터 밤의 그림자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왼쪽으로 보이는 얼룩 정도로, 크지 않다. 파란색이 보라색으로 바뀌지만 그게 다다. 초록색도 보라색으로, 흰색도 보라색으로, 아메리카 대륙 또는 남은 게 뭐든 모두 보라색으로 변한다. 아니, 아메리카는 사라지고 없다. 밤이 지구의 푸른 직물을 풀어헤친다. 다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적도를 넘는다. 달은 어슴푸레하고 한층 더 토실해졌다. 명암 경계선이 갑자기 불쾌해진 듯 지구 표면에서 낮의 빛을 쓸어 버리고, 어디선가 별들이 스노드롭 꽃송이처럼 만개한다. 우주비행사들은 자면서도 난데없는 밤의 무게를 느낀다. 누군가 지구의 커다란 전구를 꺼 버렸다. 모두 좀 더 곤히 잠든다.
이제 바다다. 남태평양의 에콰도르와 페루 앞바다에 있는 키토와 리마, 두 도시가 육지를 예고한다. 1000마일의 번개가 해안을 치고, 2000마일의 비구름이 바다 위에 자리를 잡고, 4000마일의 산등성이가 성벽을 이룬다. 어떤 도시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한가운데, 주황색 점들이 점점이 박힌 1000마일의 조각보는 열대 우림이 불타는 곳들이다. 불은 안데스산맥 자락까지 이어진다. 브라질 동부를 넘어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까지 내려가고, 거기서 궤도는 불타는 대륙을 건넌다. 저 아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1200만 명이 살아간다. 중심부가 교외로, 농지로, 암흑으로, 강의 어귀로, 바다로, 그리고 높이 있는 남극권으로 이어진다.
지구 맨 아래 밤의 땅은 황혼에 잠긴 남극점의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지만, 이 극지방의 하늘은 짙고 은하로 가득하다. 은하수의 심장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 강력하고 매혹적인지 어떤 날 밤에는 궤도가 지구와 떨어져 저 은하수를 향해, 저기 깊고 밀도 높은 별들 속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별이 각자의 빛을 발하니 더 이상 어둡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아프리카 최남단까지 2000마일쯤 육지 없이 남대서양을 한참 지난다. 그러나 만일 선원들이 계속 내다보며 시야에 적응했다면 공허함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절대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위안만을 받았을 것이다. 이번 밤 동안 우주선은 한참이나 세상에 파묻힌 채 나아간다.
갈고리 모양 발톱 같은 케이프타운의 불빛은 수천 마일 펼쳐지는 대륙의 시작 또는 끝을 가리킨다. 상행 궤도는 케이프타운 해안 위로 올라가 모잠비크, 탄자니아, 케냐, 소말리아를 지난다. 달빛 비치는 밤의 아프리카는 탁한 갈색이다. 구름은 드문드문 끼어 있고 대륙 전역에서 번갯불이 번쩍인다. 도시 불빛은 조심스럽고 듬성듬성하다. 여기 마푸투가, 저기 하라레가, 저 멀리 루사카가, 앞에는 몸바사가 있다. 이 도시들은 저마다 태피스트리 직물에 얹어진 작은 금화 더미다. 야간 조명이 깔린 도로나 무분별하게 뻗쳐 나가는 도시 무엇과도 이어져 있지 않다. 허공 속으로 기우는 지구 위 인간의 아름답고 포근한 빈곤. 추락할 것 같다가도 그때마다 더 많은 땅이 나타나고, 그렇게 아덴만을 건너 중동을 향해 그 흔적을 따라간다.
아라비아해 살랄라의 불빛, 잔잔하게 소용돌이치는 사막에 부는 날카로운 소리. 조금 전까지는 아부다비, 도하, 무스카트가 먼 해안을 장식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태양이 또 한 번 떠오르고 은빛 검이 밤을 푹 찌른다. 선원들이 우주에 있는 동안 수천 번의 일출이 있었고 그중 수백 번은 이들이 직접 지켜봤다. 지금 깨어 있다면 수면실에서 나와 또 한 번의 일출을 봤으리라. 어떻게 이곳 풍경은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면서도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가. 이들은 돔 창문의 셔터를 올리고 자신들이 진공 우주 속에 외딴 머리와 몸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호흡할 수 있게 산소가 있는 작은 공간에 이들이 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사함이 밀려온다. 어떤 말이나 생각도 그와 견줄 수 없다. 그래서 잠시 눈을 감는다. 지구는 여전히 생생하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구체의 형태로 이들의 눈꺼풀 안쪽에 존재한다. 단순히 잔상인지 아니면 지구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정신의 투영물인지는 알 수 없다.
해가 뜰 때마다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일출은 매번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빛의 칼날이 벤 자리에서 태양이 찰나의 완전한 별로 터져 나와 양동이를 뒤집은 것처럼 빛을 쏟아내어 지구가 빛에 잠길 때마다, 순식간에 밤이 낮이 될 때마다, 지구가 잠수하는 생물처럼 우주로 가라앉아 깊은 우주에서 날마다 또 다른 하루를 발견할 때마다, 90분마다 돌아오는 하루, 무한히 공급되는 새날을 발견할 때마다 이들은 놀란다.
새벽빛에 표백된 오만만의 도시들이 뒤에 남겨진다. 장밋빛 산들, 연보랏빛 사막, 그 위로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이 나온다. 둥그렇고 희미한 구름 뭉치는 달이다. 카자흐스탄을 지날 때면 자신들이 저곳에서 지구를 떠나왔으며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이 제대로 실감 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유리창을 검게 그을리는 화염에 싸여 대기권을 뚫고 날아가, 부디 열 차폐막이 버텨 주고 낙하산과 역추력 장치가 제구실을 하고 수천 개 부품이 움직이고 작동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대기권이라고 부르는, 일렁이는 저 선을 이들이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게 쉽사리 와닿지 않는다. 맹렬히 불타는 캡슐 속에서 열기와 충격을 견디고 재빠르게 보조 낙하산을 펼치고 내려가 카자흐스탄 평원의 수풀과 야생마들을 보게 된다는 게 말이다.
선원들이 자는 동안 우주선은 꼬박 90분이 걸려 지구를 한 바퀴 더 돌았다. 오늘 열여섯 번 도는 궤도 중 열다섯 번째 궤도였다. 이제 오른쪽을 바라보면 눈 덮인 히말라야산맥이 도로처럼 쭉 뻗은 풍경이 펼쳐진다. 광활하고 탁 트인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산맥 남쪽으로는 도시 라호르와 뉴델리가 있는데, 찬란한 낮의 햇살에 풍경이 하얗게 바래 사라지고 마치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광막한 지형에 삼켜진다. 산맥만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러시아는 아침이 한창이다. 지구는 날카로운 빛을 받아 또 한 번 칠흑 같은 우주 속 유리구슬이 된다. 인접한 별들과 행성들을 더는 볼 수 없게 된 지금, 지구는 상실감에 빠졌고 연약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의 존재가 되어 있다. 지구의 흠 없는 표면 위에는 깨뜨러질 게 아무것도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들은 궤도를 한 번 돌 때마다 서쪽으로 몇 도씩 이동할 것이고, 90분이 지나 궤도가 다시 북쪽을 향하게 되면 새 하루가 밝는 동유럽 위를 건널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나날 중 또 한 번의 새날이 시작된다. 지구는 파란 고리 모양이고 눈으로 뒤덮여 있다. 궤도는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북극권 한계선의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너머 북극점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러시아에서 내려와 5000마일간 이어지는 태평양 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