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
표지가 잘 빠졌다. 내가 흑백을 좋아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도 적당히 괜찮게 읽었다. 읽기 전부터 느낌이 좋은 소설이라 기대가 컸다. 초반부엔 방탈출카페에 들어간 바이러스(코로나 아닌 가상의) 시대의 부적응자가 그 방의 테마를 덤덤히 서술하고, 조기준이라는 사람의 사연을 별도의 챕터로 교차해서 서술한다. 납치되어 전쟁이 발발했다는 거짓말로 가스라이팅 당하며 오랫동안 격리된 삶을 살아온 소년의 이야기가 좀 흥미롭다 싶었는데… 소재로 80년대의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민교육헌장이 등장해서 몹시 고루하다. 80년대생인 내가 느끼기에도 그렇다.
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만 그랬는지 다른 학교들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자 교육을 엄청 많이 받았다. 애국가, 국기에 대한 맹세, 국민교육헌장 모두 한자로 외워서 시험을 봤다. 내가 국민교육헌장을 무려 한자로 다 외웠다고 말하면 아내는 '나이 속인 거 아니냐'며 나를 놀린다. (진짜 그랬다구)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참 전체주의적 문구 아닌가?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도 만만치 않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 사랑의 결실로 아이가 생겼는데, 왜 그 아이를 갑자기 국가와 민족이 나타나서 자기가 써먹겠다고 사명을 심어주고 충성을 강요하는 걸까. 아이도 동의하지 않았고, 부모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냥 태어났을 뿐이다.
그래 뭐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던 시대니까 그런 주제로 풀어나가려나 했는데…
이건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수록 조기준이라는 인물의 사연이 조기준 본인, 잠시 탈출한 그를 본 사람, 조기준이 만들었을지 모르는 가상인물 등 다양한 관점에서 왜곡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너무 꼬아놓으니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반전의 묘미를 느끼고 싶은데 조금 느낌이 온다 싶으면 그놈의 80년대 공격이 훅 들어온다. 게다가 현재 시점의 서술자의 사연이 끼어드니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3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에 중구난방으로 펼쳐져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방탈출카페에서 다양한 단서를 찾는 것처럼 독자를 정신없게 만들려는 작가님의 의도라면 기꺼이 이용당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겹겹이 쌓인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니 유쾌하지 않다. 읽는 내가 뭔가 고상한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건가? 내 문해력이 부족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잘못은 아니다. 아니 매끈한 표지 디자인과 작가의 이름값에 속아서 아무 소설이나 마구 읽어대는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