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혁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사무실에 출근했다. 밤에 잠을 잘 잤는지 컨디션이 괜찮은 편이다. 녹차를 한 잔 우려서 마시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니 딱히 급하게 처리할 일도 없고 회의도 없다.
점심을 먹자는 사람도 없다.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서 홀로 돈까스집에 들어간다. 성북동 기사식당 스타일의 돈까스를 옥수수수프와 함께 해치운다. 식당을 나서니 어느새 땅이 뜨겁게 데워졌다. 일교차가 15도씩 나는 이상한 봄이지만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라 조금 걸어도 좋다. 코엑스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점심시간의 활기를 느낀다.
이제 햇살이 뜨거워 코엑스 안으로 들어간다. 행선지는 별마당도서관. 얼마 전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홍보차 내한한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인터뷰를 봤는데, 앤 해서웨이가 별마당도서관에 꼭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가 언급할 정도로 유명해진 이곳엔 여기저기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저는 점심 먹고 가끔 가서 책을 들여다보고 온답니다 후후 부럽죠?'
신간 코너 앞에서 사진을 찍는 커플을 잠시 기다려주고, 어떤 책이 있는지 서가를 훑어본다. 이 책도 읽어야지... 어 이 작가도 신간을 냈네? 오 이 책은 무슨 내용일까... 하나하나 꺼내서 들춰보고 싶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마침 눈에 띄는 책은 문지혁 작가님의 <나이트 트레인>이다.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40대 남성인 주인공에게 따로 사는 아버지가 보낸 소포가 도착한다. 집을 정리하다가 버리기 뭐 한 아들의 물건들을 보내신 것. 청춘의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여있는 그 소포 사이에 사진 뭉치가 들어있다.
난 결혼 직전에 다 버렸는데... ㅎㅎㅎ
주인공이 대학교 2학년인 1999년, 당시 유럽 배낭여행 붐이 불었다. 주인공은 열심히 과외를 해서 돈을 모았다. 고등학교 시절 플라토닉한 2년 남짓한 연애를 했던 전 여자친구가 헤어지면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가 생각난다고 사 왔던 은반지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이 확실한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렇게 그는 3주 간의 수박 겉핥기식 호텔팩 배낭여행을 떠난다. 런던 - 암스테르담 - 프라하 - 빈 - 베니스 - 로마 - 융프라우 - 니스 - 파리등을 찍먹 하는 코스인데, 주인공은 그룹 내의 다른 무리들과는 다르게 남들 다 가는 곳은 잘 가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하는, 소설 내의 다른 캐릭터가 부르는 '댄디 뽀이~'였다. 혼자 있는 시간엔 습작 중이던 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 신입생 때도 집에 돈이 좀 있거나 부지런히 돈을 모은 친구들은 여름방학 때 유럽에 다녀왔다. 난 돈도 없었고, 마침 신입생은 무조건 배우로 참여해야 하는 연극동아리에 들어가 있었고, 여름방학 내내 땀 흘려 연습했다. 저녁엔 술을 마시거나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새까맣게 타서 돌아온 친구들은 나보다 조금 더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은 내 열등감이었으려나.
마치 모르도르 산에 가서 반지를 처리하려는 프로도처럼,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함께 보며 나눴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과 반지를 빈의 대관람차에 버리고 오겠다는 주인공의 다짐은, 관람차 안에서 미국인 관광객들 사진을 대신 찍어주느라 우습게 무너지고 만다.
여행에서 우연히 두 번 만난 한국 여자와 빈에서 영화처럼 썸을 탈 뻔도 했지만 빡빡한 다음 일정 때문에 작별을 고한다. 그냥 썸을 탔어야 하는 후회 때문인지, 여행 중에 자꾸만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반지는 니스의 바닷가에서 멀리 던져버린다.
여행은 정말 열악하고, 말만 호텔팩이지 실상 반은 야간열차에서 보내게 된다. 여행에 점점 지친 그는 미주신경성 실신 때문에 길에서 쓰러지지만 여행 동료들이 숙소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면서 돌봐주기도 한다. 특히 여행 동료인 여성 E가 정성스레 돌봐주는 것 같다. 회복 후 파리에서 루브르에 가지만 줄이 너무 길어 식겁한 그에게 E가 그냥 샹젤리제나 한 번 더 가자고 한다. 루이뷔통 매장 앞 카페에서 어떤 한국인이 그들에게 알바를 제안한다. 구매금액 제한 때문에 자신들은 못 하게 됐는데, 돈을 줄 테니까 대신 루이뷔통 매장에 가서 가방 몇 개를 사다 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들은 쉽게 몇십만 원을 벌었지만 지하철에서 장난으로 무임승차를 하는 바람에 벌금으로 돈을 다시 다 잃는다.
젊은 나날들, 어린 시절에 잠깐씩 느꼈던 그 시절의 유럽이 25년 만에 다시 사진으로 눈앞에 나타나서 추억에 잠긴 현재의 주인공. 그런데 버린 줄 알았던 반지가 아버지의 소포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하며 몇 가지 물건을 빼놓고 다 버리려고 아내와 함께 재활용품 수거장으로 간다. 다 버리고 수거장을 떠나려는데 그는 다시 망설이며 돌아가 그곳에 반지를 버리고 온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묻는 아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그의 아내는 다름 아닌... E였다.
작가님 장난꾸러기!
점심시간에 짬을 내 50분 만에 독파한 책이지만 동시대의 젊은 시절을 지나온 40대 마음을 충분히 잔잔하게 흔드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결말에서 안도감이 들며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책을 다시 서가에 꽂기 전 나도 인증샷을 하나 찍어 남겨놓고 다시 천천히 사무실로 걸어오니 1시가 됐다. 완벽한 점심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