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신적인,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변주곡에 관해
지난달 9월 27일에 아트센터 인천에서 열린 예프게니 코롤리오프 피아노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공연을 본 지가 벌써 한 달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유들로 인해 이제서야 후기를 쓸 물리적, 심적 여유가 생겼는데 다행히도 그날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음에 감사해야 할 듯하다.
오늘의 글은 후기에 앞선 곡에 대한 전초 작업으로, 곡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해 볼 예정이다.
굳이 이렇게 내용을 분리하는 이유는 후기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음악 그 자체에 대한 내용만 얻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은 엄격하게 분리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특히 후기에서 음악적인 내용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최대한 노력해 보려고 한다.
사실 이 내용을 리사이틀 전에 작성하여 혹여나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공연 전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을 미리 전달했다면 좋았겠지만, 여러 현실적인 사정이 겹쳐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여담이지만 해당 리사이틀을 본 사람이라면 프로그램북의 설명이 꽤 알차고 유익하니,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아리아와 다양한 변주들(Aria mit verschiedenen Veränderungen)>, 통칭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Variationen)", BWV 988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 아니 그저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바흐가 남긴 건반악기 독주곡이다.
그 예술적 가치를 강조하기에 앞서, 물리적 규모 측면에서도 그가 남긴 단일 건반악기 독주곡 중에서 가장 장대하기도 한데, 연주자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전곡을 연주하는 데 도돌이표를 포함하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연주시간 때문에 연주자에게 이 곡을 무대에 올리거나 녹음을 하는 것은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음악 세계에서 가장 비중이 큰 작품인데 반해, 그 작곡 배경으로는 소박하다 못해 하찮게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인 즉 잘 알려진 이 곡의 부제인 "골드베르크"의 이름이 바로 이 곡을 위촉한 사람을 위해 연주하였던 쳄발로 연주자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위촉자인 카이저링크 백작은 날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바흐에게 자신을 위한 "자장가"의 작곡을 요청한 것이다.
바흐는 그렇게 백작의 불면증 치료를 위한 "자장가"를 완성했고, 백작에게 해당 곡을 밤마다 연주했던 그의 전속 연주자가 다름 아닌 "골드베르크"였다.
현대 기준으로도 테크닉적으로 상당히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이니 당대에도 그러했을 터, 골드베르크는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장장 일 년 가까이를 연습하였고, 매일 밤마다 연주하기 시작한 이후 백작의 불면증이 치료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맺는다.
그 작품성과 음악적 완성도, 음악사적 중요도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소박한 이 배경은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많은 음악학자들에게 의심을 샀고 검증을 거친 결과 여러 논란이 있었다.
그중 완전히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여전히 없지만 주로 회자되는 내용은 '카이저링크 백작의 불면증에 관한 내용은 후대에 추가 및 윤색된 것으로 의심된다', '연주자이자 헌정자로 알려진 골드베르크가 이 곡을 연주하기에 매우 어렸다', '그러나 바흐는 골드베르크의 연주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등인 것 같다.
물론 일련의 내용이 이 곡의 작품성을 훼손할 정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가질 것이기에 언급을 해보았다.
한 곡의 아리아와 30곡의 변주, 그리고 첫 아리아로의 회귀로 구성된 이 대곡은 상당히 혁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30개의 변주를 10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각 그룹의 마지막 곡인 세 번째 곡들을 카논으로 작곡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3의 배수 번째 변주에서 카논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리듬이 형성된다.
심지어 잘 보면 이들 카논에서 주제와 응답의 음정 차이를 1도씩 늘려가며 작곡했다. 3변주에서는 1도 차이, 6변주에서는 2도 차이... 이런 식이다
이렇게 견고하게 세워진 열 개의 토대 위에, 두 개의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그러나 마냥 감상적이지만은 않은 자유 변주들이 나머지를 채운다. 물론 이들 변주들에도 내재된 규칙이 있는데, 이는 후에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너무나도 건축적인 접근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곡을 듣고 있자면 파르테논 신전의 순수하고 절제된 조형미가 절로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즉흥 연주의 주요 레퍼토리로 애용되었을 정도로 가벼운 음악적 유희에 불과했던 장르인 변주곡에 이런 엄격한 논리를 적용해야 했던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러한 점 때문에, 오히려 이 곡을 한때는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그 둘 모두 높은 완성도는 당연히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논리 구조가 너무나도 확실하고 뚜렷하게 전달되지만, 되려 논리가 너무 직선적이고 기계적인데다 그 논리를 강요하는 모양이 심지어 폭력적이게까지 느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변주곡이라는 장르와도 잘 섞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파르테논에 있어 인간이 개입될 여지는 오로지 신화 내용을 담은 장식과 조각들에 한정된다. 장식을 제외하고 나면 하중을 지지하는 구조체, 그것도 하중의 경로가 그대로 구조체에 드러나는, 정직하다 못해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기둥-보 구조만 남는다.
물론 이제는 그 신전이 원래는 대리석의 순백색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특유한 순수성은 여전히 나에게 아름다운 감정보다는 불편한 감정만 전달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흐의 음악과 파르테논 신전 모두 신적이다. 각각 음악의 이데아(ιδεα)와 건축의 이데아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모든 음들이 마치 원래 늘 그 위치에 있었고, 그 자리에, 그 형태로 존재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모든 요소들은 내재된 논리에 의해 또한 끊임없이 반복되며, 그 논리가 유효한 한에서 영원히, 또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정지하여 음악에서 시간의 개념을 제거한 채 그 자체로 영원불멸한 신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바흐의 음악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무한한 신의 앞에서 한없이 겸허한 한 인간으로서 작곡가 바흐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흐의 음악에서 인간적 감동을 느끼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바흐의 수난곡은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으며, 바흐의 작품에 담긴 수많은 종교적 은유를 이해하지 않고도 바흐의 음악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나에게 이러한 인간적 감정의 체험에 관한 부분에 관한 것들을 설명해낼 요량은 없는 듯하다. 누구든 그런 능력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예술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의 경험적 판단에 있어서도 타인이 한 개인에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오로지 이성 판단의 영역뿐이다.
오로지 바흐의 음악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형태로 분석하고 전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성적으로 바흐의 음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무관한 것이 아니다.
바흐 음악의 모든 이성적, 신적 본성은, 인간성과 대립하거나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완벽하게 합치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바흐의 음악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상호 불가분적인 것이다. 모든 훌륭한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내가 바흐의 음악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이 바흐의 음악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과연 당신이 그의 <푸가의 기법>에 대해, 그 속에 담긴 테크닉적 정수를 인지하고 이해하지 않고서 그 작품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 곡은 형편없는 곡인가?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파르테논에 대해서 오해했던 것과 같이, 나는 그의 음악에 인간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그 측면이 그의 음악을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그 어떤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닌 오로지 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보편적 만인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곡의 인간성에 대해 언급할 때 주로 나오는 논거가 마지막 변주인 Quodlibet에서 깨지는 카논 규칙인데, 그것이 주요한 요소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변칙으로써 의미가 있을 뿐이지,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 자체에서 이 작품의 신성과 인간성 모두 그 모습이 동시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카이저링크 백작을 위한 것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이런 연유에서 여전히 나는 바흐의 작품 중에서 이성적으로 완벽한 <푸가의 기법>이나 <음악의 헌정> 등 최만년의 작품들을 더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이 변주곡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 있는 분석을 하고 난 다음에 나는 위의 깨달음의 입각하여 다음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곡은 대부분의 경우 "형편없게"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오해하기 쉬웠다는 사실을.
시간이 허하지 않아 다음에 이어 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