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 Part II

by 김아소

아니, 우리가 그렇게 헤어졌는 줄 알았다. 다음날 소희가 퀭한 얼굴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월요일부터 소맥을 들이붓고는 새벽 1시가 넘어 들어간데다, 오전에는 머리에 김 나게 기획안을 써다 바쳤는데, 그 프로젝트 진행을 이제껏 아무것도 안 한 옆 부서에서 맡게 되었다는 분통 터지는 소식을 오후 늦게 듣고 난 후여서, '야근은 너나 해라, 난 못한다'며 짐을 싸던 찰나 소희한테서 연락이 왔다. 고작 24시간 만에 만난 그녀였는데 그 사이 2년 4개월은 늙어있었다. 피부가 말라빠진 시래기처럼 푸석거렸고 다크서클은 광대 이남까지 영토확장에 성공해 있었다.


"너 뭔 일 있냐? 얼굴이 왜 이래, 하루 사이에?"


"나 있잖아, 미쳤나 봐. 아마 내가 너무 외롭고, 삶은 매일 똑같고, 예전의 나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치이면서 살고 있어서 말이야..."


얘기를 하면서도 소희는 반쯤 정신이 나가 보였다. 술을 먹을 게 아니라 약을 먹이고 재워야 하는 게 아닐까.


"뭔데?"


"...... 어제 너희랑 헤어지고 정환이가 집에 데려다줬어. 바람에 벚꽃잎이 날리고, 새하얀 카펫이 깔린 길을 걸었지. 우린 다 취했었잖아...."


"야, 설마 너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매일 하시던 말 기억나?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 뒤돌아보면 이 순간들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빛났을 거라던 말. 우린 그때 야유했을 거야. 입시에 짓눌린 끔찍한 삶이 가장 빛난다니. 아름다울 게 참 없다 그랬지. 선생님들은 너네가 어른이 되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그랬는데, 그게 사실이었더라고. 너무 슬프지 않냐, 가장 빛날 때는 뭔지도 모르고 삶을 흘려보내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 순간이 가장 빛났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거야. 한 번도 온전히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누려보지 못하는 거지. 그렇게 빛나던 순간들이 이제는 너무 멀어져서 잡으려 해 봤자 손가락 사이로 다 흩어져버려. 빛나던 그때의 나를 기억조차 못하는 거야. 그렇게 기계적으로 살아지고 있었구나, 나란 존재는. 그걸 어제 그 하얀 길 위에서 깨달았어."


"...... 그래서?"


"사실 동창 애들 만나서 '박소희 좋아하던 남자애들 많았지.' 하며 띄워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참 씁쓸했거든. 그때의 나에 비교하면 현재의 나는 남자친구도 없고, 연애도 잘 안되고, 나이 먹었다고 이젠 소개팅도 안 들어오잖아. 과거의 나에 비교당해서 상대적 박탈감만 커진달까. 그런데 정환이가 그때 내가 좋아했던 노래를 얘기했을 때, 10년 넘게 나를 기억하고 간직해 준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사실 좀 놀랐어. 정작 그걸 적어놓은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이야."


난 목 안이 말라와서 안주를 집어 드는 것도 잊은 채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소희는.


"다행이었지."


'다행'이라고 말하며 소희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는 그녀의 입매가 이상하게 쓸쓸해 보였다.


"뭐가?"


"어제 밤은 안 추웠잖아. 봄바람은 시원했고, 벚꽃잎은 머리 위로 쏟아지고.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서 밤새 이야기할 수 있는 날씨였어. 정환이는 언젠가 나를 만나면 꼭 그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고 했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다고.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렇게 오랜 시간 기억했다가 벚꽃비가 내리는 봄밤에 나만을 위해 불러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던 거야."


"...... 너 괜찮냐?"


소희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냐. 이젠 연애나 사랑은 포기해야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런 감정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다가, 몇 년 만에 설레게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손끝도 댈 수가 없어. 왜 이제야 얘기했냐고, 왜 미리 찾아오지 않았냐고, 뭐 좋다고 그렇게 일찍 결혼했냐고 수없이 원망하게 되는데 괜찮을 리가. 하루 종일 그 애의 노래랑 말들이 머리에서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어. 나 미친 것 같아."


소희는 왼손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테이블 조명에 그림자가 져서 그녀의 눈이 1미리는 더 안으로 꺼진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죽을 때까지 몰랐던 것보단 나을 거야."


정환이가 자기의 첫사랑을 그냥 무덤까지 가져갔으면 이런 번뇌는 없었을 거다. 소희는 그냥 그제와 같은 어제, 어제와 같은 오늘을 기계적으로 살아내고 있겠지. 다 타버려서 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심장에서 아직 타오를 뭔가가 남아있다는 걸 알려줬으니 그 얼마나 달콤한 번뇌란 말인가. 물론 그 달콤함은 거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