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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베이커 Apr 30. 2024

[MEET] 김환기

수묵과 같은 추상으로 맑게 써 내려가는 서정 시

[MEET] 김환기 Kim Whanki ⓒ 2024. ART BAKER·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오늘 MEET 시리즈에서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1913-1974) 화백을 만나보겠습니다.




01 한국추상미술의 선두에 서서


김환기, 비행, circa 1950-1960s, Oil on canvas, 91 × 61 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화백은 한국적인 정취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세계인이 공감하는 색감과 조형미를 지닌 작품세계를 통하여 보는 이들을 감동과 명상의 세계로 이끕니다. 전통미를 현대화한 세련된 화면 구성으로 민족정서와 자연을 추구한 '조형 시(詩)'를 창조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Kim Whanki's scrapbook from the 1950s.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1930년대부터 가장 전위적인 활동 중 하나였던 추상미술을 시도하며 한국 모더니즘을 이끌었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  달, 백자, 학, 매화, 여인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모티브를 바탕으로 밀도 높고 풍요로운 구상 회화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점, 선, 면 등 순수하고 섬세한 조형적 요소를 통해 보다 보편적이며 내밀한 서정의 세계를 심화시켜 갔으며, 1960년대 후반 완전한 추상에 이르며 한국 근대 회화의 추상적인 흐름을 개척했습니다.




02 Kim Whanki in New York


김환기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긋는 '뉴욕파'의 활약상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영웅이었습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약 3년 간 프랑스에 머물던 파리시대, 파리파(École de Paris)의 일원이기도 했던 김환기 화백의 현장에서의 체험이 세계 미술계의 새 중심, 뉴욕을 동경하게 만들었을까요?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한국 대표 작가로 참여하여 명예상을 수상한 김환기 화백은 브라질에서 작업을 하려던 생각을 했으나 브라질의 더운 날씨에 이 생각을 접고 1963년 10월 20일, 뉴욕으로 향합니다. 어느 때나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 카멜을 마음껏 피울 수 있다는 점을 그는 뉴욕에서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뽑았습니다.


김환기, 봄의 소리, 1965~1966, Oil on cotton, 178×127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의 작품에는 <겨울 아침>, <봄의 소리>, <아침의 메아리> 등 사계절과 시간, 혹은 음향을 떠올리게 하는 소제목이 붙은 경우가 있는데요. 이는 그의 작품이 자연에 대한 서정적 정서에서 출발함을 보여줍니다.


'뉴욕시대'로 불리는 1963년부터 작고하신 1974년까지의 기간에는 순수 추상의 길로 접어들며,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파리시대와 서울시대를 포함한 1950년대까지 엄격하고 절제된 조형성 속에 한국의 고유한 서정의 세계를 구현한 김환기는 1960년대 후반 뉴욕시대에는 전면점화(全面點畵)를 형성합니다.


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자.
이런 걸 계속해 보자.
- 1968년 1월 23일 김환기의 일기 중에서-


김환기, 하늘과 땅 24-Ⅸ-73 #320, 1973, Oil on canvas, 263.4×206.2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화백은 수묵과 같은 투명한 질감으로 그만의 독보적인 동양적인 추상화를 선보였습니다. 김 화백은 유화의 번짐 효과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흡수성이 강한 코튼을 바탕면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코튼 위에 아교칠을 한 다음 한폭을 완성할 만큼의 양의 물감을 유리병에 준비한 후, 점을 찍고, 그 하나하나를 사각형으로 둘러싸기를 반복했습니다. 머나먼 타향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며, 탄생시킨 전면점화는 김환기 화백의 많은 실험과 고민의 결실입니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는 점묘는 추상 공간의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며, 명상적인 시(時)적 공간으로 숭고한 추상의 세계를 남겼습니다.




03 점화를 세상에 알리다


김환기, 10만개의 점, 1973, Oil on cotton, 263 × 205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작가가 늘 조심할 것은 상식적인 안목에 붙잡히는 것이다. 늘 새로운 눈으로, 처음 뜨는 눈으로 작품을 대할 것이다. - 작가의 노트에서, 1968.7.2 -


김환기 화백이 살았던 맨해튼 마천루 시대 초기에 세워진 고층 아파트의 마룻바닥은 조선시대 궁궐 길의 박돌 또는 로마 시대의 옛길을 포장했던 원석(圓石, cobblestone) 모양의 벽돌 크기 통나무를 바닥재로 삼았던 고풍이었습니다. 점화는 바로 그 이미지에서 따왔다는 기억이자 지적입니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 1970년 1월 27일 김환기의 일기 중에서 -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Oil on canvas, 236 × 172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화백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Oil on canvas, 236 x 172cm)가 1970년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점화의 존재를 모국에 크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김환기 화백은 작품에 작업한 날짜를 적었습니다. 1970년 4월 16일에 완성된 <16-Ⅳ-70>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제목을 적었습니다. 이 제목은 절친한 선배이기도 한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따온 것입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04 뉴욕파, 한용진과의 이야기


뉴욕파 선발대들의 도착 시점은 모두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 도착하던 1963년 언저리였는데요. 조각가 한용진(1934-2019)은 1963년, 그의 아내 서양화가 문미애(1937-2004)는 이듬해인 1964년에 뉴욕에 도착합니다. 김창열(1929-2021)은 런던과 파리를 거쳐 1965년 중반 뉴욕에서 4년을 머문 뒤 다시 파리로 갔습니다.


한용진, 문미애 작가와 가족 이상의 애정을 나누며 지냈던 김환기의 이야기는 뉴욕 생존기였던 김환기의 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비나린 밤. 미애. 용진한테 간다. 술, 예술론으로 밤을 새다. 결론은 젊은 사람들은 서양의 우수성, 나는 동양 정신에 입각(김환기, 1970년 4월 24일 자 일기)


한용진에게 김환기는 지극히 존경하는 '부모 자리의 스승, 사부(師父)'였습니다. 한용진이 지녔던 폭 30cm, 높이 3m 정도의 캔버스에 그렸던 김환기의 남색 빛 점화 한 점이 두 사람의 자별한 사이를 말해주는 물증이기도 한데요. 이 캔버스에는 특별한 일화가 담겨있습니다. 김환기의 작업 공간이자 거처는 맨해튼 고층 아파트 맨 아래에 위치했으며, 매우 협소했습니다. 작은 돈이라도 아끼려고 했던 김환기는 캔버스 천과 골조용 나무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날라다가 아파트 거실에서 캔버스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밑바닥 생활'이었을지언정 열정과 의욕만은 충만했던 그는 큰 폭의 한 점 대작을 완성합니다. 그림을 아파트 창문을 통해 반출하려고 보니, 화폭이 너무 커서 도무지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한쪽을 30cm 폭으로 잘라 내고서야 겨우 그림을 반출할 수 있었는데요. 이때 잘라낸 그림의 한 부분을 한용진에게 주었습니다.


사제 지간으로 시작된 김환기 화백과 한용진 작가의 인연은 뉴욕에서 다시 만난 후 함께 모여 동고동락하며 서로 힘들 때 위로가 되고 지원하는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1974년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난 후 김향안 여사와도 지속적으로 이 관계는 이어집니다.




05 한국 작가 중 경매 최고 기록, 132억 원에 낙찰


김환기, 우주, 1971, Oil on cotton, 254 × 202cm.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화백의 대작 <우주>(1971, 코튼에 유채, 254 x 254cm)는 경매에서 132억 원이라는 금액과 함께 커다란 화제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1977년 현대화랑에서의 첫번째 회고전을 시작으로 n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습니다.




06 김환기의 "종이에 유채" (Oil on paper)


어제 하던 일(Oil on Paper)을 끝마치고 새로 5점을 했으니 가장 다작한 날인가. 새로운 감흥(感興)이 나는 것 같다. 예술(藝術)(창조(創造))은 하나의 발견(發見)이다.....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찾고 있는 거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세계(자연)가 아닐까. - 작가의 노트에서, 1968.2.1 -


1984년 뉴욕 딘덴파스 갤러리에서 열린《김환기 10주기 전》때, 아트(Arts)지의 비평가, 바리 슈봡스키(Barry Schwabsky)는 앙리 미쇼(Henry Michau)와 김환기를 주제로 해서 쓴 글 "그들의 그림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속에서 김환기의 "종이에 유채"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했습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한 번은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의 Drawing을 평하면서 그의 빛깔을 마치 이미 종이 위에 존재해 있었던 것과도 같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나의 견해의 차이점은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의 빛깔은 하나의 건조한 채색(물질)인데 김환기(Kim Whanki)의 빛깔은 맑고 투명한 액체이며 사뭇 화면에서 새어 나오고, 흘러나오고(십자 구도화), 또는 막 뿜어 나오고(전면 점화) 있다. 김환기의 걸작 "종이에 유채"를 보자.
그것들은 지극히 깨끗지 않은 물질인 신문지 위에 그려졌다. 유채가 빛깔 속으로 스며드는 활자의 흔적들을 융합해서 표면을 굳히며 리넨에서의 침투의 불가능을 극복하고 있다."
- Barry Schwabsky -


1968년대 뉴욕타임스는 종이의 질이 오늘날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하도 종이가 좋아서 신문지에 유채를 시도한 김환기는 종이가 포함한 기름과 유채가 혼합되어 빛깔에 윤기가 돌고 꼭 다디미질한 것과도 같은 질감이 나오는 것이 재미난다면서 한동안 "종이에 유채" 작업에 몰두했다.
67년 말에서 68년 1, 2, 3월 동안, 하루에 평균 10여 장씩의 작업을 계속했다. 수화는 그중에서 몇 장을 골라서 하얀 백지를 사다가 배접을 해서 유리틀에 끼어 보았다. 자기도 놀라게 우수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신문지 위에 작업을 충분히 시도하고는 "종이에 유채"를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다시 캔버스 위에 작업으로 돌아갔다.(68년 4월 이후)
지금 그 배접을 하다 말고 그대로 둔 40점을 꺼내서, 종이 보관을 우한 과학적인 과정을 거쳐서 배접을 시켜, 유리틀에 끼다. 종이가 유리에 닿지 않도록 막음 틀을 사이에 끼어서 그림과 유리 사이를 뜨게 하다.
그림은 어제 그린 것처럼 싱싱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 40폭의 "종이에 유채"는 기념관의 한 방을 꾸미려고 아껴두었던 건데, 기념관의 한 방을 채우는 것보다는 국내의 애호가들한테 할애해서 김환기 예술의 감상의 도를 높이는 일이 기념관의 의의라고 생각되어 현대와 원화랑에 일임하다.

1990년 9월
김 향 안





07 아내 김향안 여사


김환기와 김향안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향안 여사(1916-2004)와 김환기 화백의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에 대해 들어보신 분들도 꽤 되실 텐데요. 안타깝게도 1974년, 김환기 화백이 세상을 떠나자 김향안 여사는 남편 미술 세계 현창에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김향안은 요절한 첫 남편 이상,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롱당했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재혼한 김환기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격이 별나고 변덕이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 했지만, 두 남편을 기리는 일을 성공적으로 끌어간 대단한 여장부였습니다.


부부의 꿈은 김환기 미술관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남프랑스에 미술관을 지으려던 찰나, 그렇게 되면 작품이 해외에 나가 영영 국내로 들어올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현대화랑이 부암동에 사택을 짓는다는 걸 알게 된 김향안은 부암동으로 그의 결기를 향했습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은 흔쾌히 기증하다시피 부암동 땅을 내놓았으며, 사택을 설계하던 건축가 우규승은 설계를 취소하고 대신 들어설 환기미술관을 설계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국내로 들여왔던 박명자 회장과 원화랑 정기용 대표는 환기미술관의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김 화백의 소품과 판화들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김향안 여사 특유의 끈기와 열성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힘이 더해져서 1992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개관했습니다. 뉴욕에 있던 김환기 작품들이 고스란히 서울로 왔습니다.


김향안, 뉴욕 베르디 아파트, 1986년. Photo: 임영균, 황인


김환기 화백의 아내인 동시에 수필가, 소설가에 미술이론가였고 화가였던 김향안 여사였습니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김환기가 타계했다는 급보를 듣고 "한국의 멋이 죽었다!"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아트베이커의 MEET 시리즈에서는 수묵과 같은 추상으로 서정 시를 맑게 써 내려간 김환기 화백과 함께 했습니다. 



참고문헌


『김환기 뉴욕시대와 한용진ㆍ문미애』(갤러리현대, 2022), pp. 34-38.

김향안,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서울: 우석, 1989). p.68.

『WHANKI Oil on Paper 1968』((재)환기재단,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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