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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Jun 05. 2023

내가 앓고 있는 것




당신을 생각하느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미열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느라 조금 웃었습니다.

내가 앓고 있는 것이 당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_ 17-1# / 이병률 ]






어쩌다가 옷 한 벌을 살까 싶어,

아... 옷이 너무 없다 싶어,

혹은

옷은 많은데 참 입을 옷이 없네. 싶어

번화한 동네 어딘가로 가지.


강남역 대로의 즐비한 브랜드 매장이기도 하고

홍대 근처, 어울리지 않는 젊음이 넘치는 거리이기도 하고

반포의 대형 백화점이거나

혹은 그 아래 가득 찬 이름 모를 매장들이기도 해. 


문 앞에 서서 후-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그리고는 마음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하...

그냥 헉. 하고 숨이 막혀.


아... 쇼핑이 노동 같기만 해.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지쳐.

무언가를 골라내 집어와야 하는데

너무 까마득하고 진땀이 나.

선택지는 너무 많고, 말소리는 너무 시끄럽고, 공기는 너무 탁해.

초점은 흐려지고 두통이 스멀스멀 오르려 하기도 해.

생존 비슷한 것을 위해, 혹은 정서적 위안을 위해

반드시 옷 한 벌은 사야겠는데

어쩐지 너무 고역이야.


그래, 이를 악 물고, 노동을 시작하자.

발을 들인 이상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고르고 고르고,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생하고 고생하고.


오염이 가득한 네모 안에서, 요란하고 어지러운 시간 안에서

겨우 하나를 골라내었어.

부지런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음... 생각보다 괜찮아.

두고두고 생각해도 꽤 괜찮아.

나와 잘 어울리고, 나에게 에너지를 주고, 나를 즐겁게 해.

매일 입고 싶은 옷이야.

그렇다고 매일 입을 순 없겠지만 어쨌든 자주 입고 싶은 옷이야.


잘 골랐나 봐.

희열이 느껴진다. 뿌듯해. 다행이야.

수많은 무언가 안에서 하나를 만나고 선택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거든.

.

.

.


너도 그랬어.

너도.


너는 내내 모르겠지만.

너는 끝내 모르겠지만.


너도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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