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훈은 이상할 정도로 미영쪽으로 몸을 틀고 있다. 미영 외에 그 자리를 즐기자고 합석해준 동지들이 둘이나 더 있는데도 그는 오늘을 미영에게 집중해야 하는 날로 정했다. 누가 보면 마치 그가 그녀에게 큰 빚이 있거나 환심이라도 사야 할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는 줄 알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당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다.
'이승환 콘서트 같이 갈래요?'
한달 전에 성훈은 미영에게서 생각하지도 못한 메시지를 받았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관심도 없는 가수의 콘서트에 함께 가자는 제안은 둘째 치고라도 성훈은 그녀가 누구인지 아직은 잘 몰랐다. 중학생 아들을 둔 자유 영혼이라는 사실 외에 이혼을 했는지, 별거를 하는 중인지 개인정보를 다 오픈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직 아니다.
반면 미영은 성훈에 대해 정확한 사실 몇 가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두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과 썩 좋지 않은 부부사이지만 겉으로는 건재한 가정의 형태는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여느 평범한 풍경의 가정에 속한 가장이라는 사실.
비록 만나고 싶은 사람은 다 만나고 차 끊기고 나서도 술잔을 놓지 않는 성훈이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을 둔 아빠에게 늦은 밤 콘서트에 단 둘이 동행하자는 제안은 적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영은 여러모로 재미있고 유쾌한 여자였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타입은 아니었다. 이 ‘타입’이라 함은 성적취향을 포함해, 수줍은 사춘기 소년소녀의 감성을 되살려 누군가의 콘서트장에 같이 가고 싶은 만큼의 애틋한 감정까지 포함되어 있다. 미영은 그에게 욕망이나 애정 따위를 불러일으키는 타입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나이 벌써 마흔을 훌쩍 넘은 불혹들이 아니던가.
- 채식주의자 몽고반점에 이은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이 저는 너무 인상깊었어요. ‘도로변의 일렁이는 짐승 같은 나무들’이라는 상징적인 모습을 통한 식물과 동물의 합일이자, 그동안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던 영혜의 동생과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 같아 굉장히 강렬했고 마음이 찡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미영은 다른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캐치해내는 깊이가 있었다. 책을 분야별로 가리지 않고 읽기를 좋아했고 톡 방에 하나의 책을 얘기할 때 연관되는 책 여러 권을 다발로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런 미영을 모임장인 윤하는 처음엔 꽤 좋아하는 것 처럼 보였다.
- 미영님이 참석하면 그날 책모임이 풍성해진 느낌이지 않아요? 다방면으로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예쁘게 하고 주변사람 배려할 줄도 알고, 그런 사람 어디서 만나기 쉽지 않은데 말이예요.
윤하가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했던 터라 요즘 그들 둘 사이에 도는 묘한 기류를 성훈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뭐, 여자들이란 사소하고 별거 아닌 일로 기 싸움들을 하지 않는가. 그는 그냥 모르는 척하며 조용히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어쩐지 자신이 껴 있는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게 불안할 뿐이다.
미영이 성훈과 승엽을 바비큐 파티에 초대했던 날짜는 성훈이 하필 책모임을 윤하 대신 주관하기로 한 날과 겹치는 날짜였다. ‘이번 생을 버티는 유일한 낙은 오직 술 먹는 일’이었던 성훈이 이승환의 콘서트는 마다했으나, 호젓한 레스토랑의 루프 탑을 통으로 대여해서 바비큐와 술 파티를 벌이겠다는 제안은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어떡하죠? 그 날 집에 일이 있어 참석이 확실치 않아요. 책모임 주관하기가 힘들 확률이 높은데 윤하님도 모임 진행할 일정이 안되면 다른 분에게 진행을 대신 부탁해야 할까요?’
‘운영진이 우리 둘 뿐인데 누구에게 부탁해요?’
‘이번 바비큐 모임엔 제 직장 후배들 세명이 같이 참석합니다. 참고로 그녀들 모두 싱글입니다.’
윤하의 다그치는 톡과 함께 ‘바비큐 파티벙 톡방’에서 미영의 메시지가 뜬다.
‘오, 남자 넷, 여자 넷 성비가 딱 맞네요!’
‘고기는 제가 다 구울게요.’
‘아, 좀더 아껴두려고 했는데 돔 페리뇽을 가져가야겠네.’
희준과 승엽, 소훈이 환호성을 지르고 파티가 시작하기도 전에 톡방은 이미 파티분위기가 된다. 나이 마흔이 넘어도, 또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웃기는 결혼생활일지언정, 어쩜 이리들 다 똑같을까? 묘한 환멸감이 드면서도 어떻게든 바비큐 파티에 가고 싶은 성훈은 윤하와 바비큐 톡방을 오가느라 진땀을 뺐다.
‘성훈은 그럼 뭘 갖고 올 거야? 아 책모임 일정은 잘 정리된 거지? 윤하님에게는 잘 말했어?’
‘아, 마음은 나도 미영님네 바베큐벙 가고 싶죠. 근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타이밍 좋게 지금 윤하님과 그 얘기중… 죽겠네요 ㅠ’
순간 성훈의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며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금 쳐 넣었던 톡이 윤하의 톡방에서 맥락 없이 떠 있는 게 아닌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으려 해 봤자, 말풍선 앞 ‘1’의 숫자는 이미 지워지고 없다.
‘뭘 나랑 얘기중이고 미영님네 간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죠?’
병신, 망했잖아. 스스로를 순발력 좋고 임기응변에 강하다고 자부하는 성훈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별다른 대책이 서지 않는다.
‘미영님이 계속 오라고 톡을 보내는데 난들 어떻게 하나요. 승엽님도 일정이 확실치 않다고 해서 나에게 계속 확답을 요구하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어떻게든 달래는 봐야죠. 하지만 간다고 얘긴 안했어요. 당연히 시간이 되면 책모임이 우선 순위죠. 윤하님이랑 먼저 약속했는데 아무렴요.’
성훈의 작은 설렘이 그렇게 무산되고, 파티 당일 승엽과 소훈에게까지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미영의 원대할 계획이었던 파티는 예상 외로 조촐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미영이 가시를 한껏 부풀린 고슴도치처럼 자신의 가죽 안에 영혼을 웅크리고 있을 때 남자들은 차라리 분이 풀릴 때가지 내버려 두는 편이 낫겠다고들 속삭였다. 미영은 한동안 자신의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남자들과 성훈의 발목을 잡아 챈 윤하에게 무언의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미영의 가시를 못 본체 하려 애썼다. 그녀가 곧 예전처럼 웃음과 선물을 안고 그들 품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책 모임 내엔 정치 색이 같아 결성하게 된 또 다른 소모임이 하나 있다. 이 소모임의 멤버가 아까 바비큐 파티에 뜬금없이 언급된 희준, 승엽, 소훈과 함께 성훈이 포함되어 있었다. 술자리에서 서로 친해지다 보면 암묵적인 금기어인 정치에 대한 주제가 언젠가는 금기에서 풀리게 되는 날이 온다. 그런데 비슷한 나이또래 남자 네 명이 알고 보니 열성 민주당 내 당원이라면, 그날부터 호형 호제하며 언제든 부르면 달려 나갈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는 거다. ‘공공의 적이 있을 때 가장 빠르게 가까워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들 스스로가 아무리 ‘공통의 선의와 교집합의 대의명분, 장대하고 국가적인 꿈이 같아서’ 가까워졌다 믿을지언정 말이다. ‘정치’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들어냈을 뿐인, ‘허구적 신화’에 가까울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소모임은 시커먼 네 남자만 매번 모이기에는 마치 사막 위에서 같은 풍경만 바라보면서 건조한 모래 바람만 맞고 걷는 기분이 들었던 건 네 남자가 모두 같았다. 3차의 후미진 한 포차에서 소주를 흘리지 않고는 제대로 따를 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될 때쯤, 그들은 서로 자기 생각, 자기가 아는 지식만을 떠들어대고 읊조리기에 바쁜 처연한 풍경을 연출했다. 말을 하는 사람은 있는데 들어주는 존재는 없는, 이 외로운 광경을 에드워드 호퍼가 살아 돌아온다면 재빨리 화폭에 담아냈을 것이다. 처음의 브로스가 건조한 모래바람 속에서 퇴색해갈 조짐이 보이자, 소훈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했다.
-우리 너무 이런 얘기만 하지 말고, 윤하님이나 미영님도 합류시키는게 어떨까요?.
과연 예상했던 대로 똥색이었던 배경에는 아쿠아 빛깔이 자리를 잡고 동시에 초록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하기 시작했다. 윤하와 미영의 존재는 순식간에 생명이 없는 공간에 활기가 돌게 했다. 정치얘기는 예전의 반도 못했어도 훨씬 더 긴장감 있고 재미있는 자리가 되는 건 당연했다.
-윤하님 도착하기 전 이 사람들 다 뭐 같은 줄 알아요? 몽구스 아시죠? 모두 그러고들 있답니다.
그러나 네 남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둔하디 둔한 더듬이로도 감지해 내기 시작한 것이 있었으니, 여섯 명이 함께하는 자리보다 다섯명이 만나는 날의 분위기가 훨씬 더 좋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미영과 함께할 때 윤하가 화제에 오르면 미영이 묘하게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는 걸 알아챘다.
-난 근데, 윤하님 패션 전공한 것 치고는 너무 평범한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크리놀린이라도 입은 듯이 퍼지는 샤 스커트에 언발란스한 빈티지 체크 자켓은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울고 갈 패션 감각이라 해도 좋을 것이고, 허리까지 닿는 긴 생머리에 꽂은 큰 리본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이 분야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미영 앞에서는 누구도 윤하의 상대적 평범함을 반박하지 못했다.
-윤하님은 미영님 좋아하는 것 같던데, 미영님은 아닌가봐요?
-잘 몰라요. 친하지 않아서.
순간 성훈은 윤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영님은 다 좋은데, 이상하게 남자 회원들하고만 친한 것 같아요.
성훈은 뒤에서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마주보고는 칭찬배틀이라도 하는 마냥 서로 좋아하는 척하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