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에리카2.

by 이라IRA

소원했던 사이를 회복하기엔 시간이 약이다. 한 달, 두 달 지나고 각자의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그깟 한 번 못 갔던 바비큐 파티가 대수랴, 술을 먹기 위한 책을 읽는 모임은 영원할 것이고 즐거운 일들은 무궁무진하다. 성훈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의 사건으로 이 둘의 관계가 회복불능이 되리라는 것은 남중, 남고, 공대를 졸업한 성훈이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회원 모두가 완독을 고통스러워 했던 옐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치는 여자>를 주제로 좌불안석의 토론이 이어지던 날, 그날이 결정적인 디 데이였다. 그러나 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세계가 알아주는 페미니즘 작가가 쓴 이 책이 여자 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한 결정타가 되었다는 사실이? 둘은 더군다나, 남들보다 열정적으로 페미니즘에 공감하는 인물들인데도 말이다.

책 모임 며칠 전 미영은 단톡방에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사회 안에서 여성 개개인이 겪는 고통을 단순히 개인의 감정이나 불운이 아닌, 사회의 구조, 관계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2> 중에서 읽었던 부분이 생각나서 발췌했습니다.’


몇 분 되지 않아 윤하가 답글을 올렸다.


‘미영님이 정희진 책도 읽으시는군요!’


미영은 이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회원들도 둘의 멘트에 대해 특별한 반응이 없다. 아마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의례 감지되는 불편한 기운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땐 최대한 남자도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 성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윤하는 여기에 대해 계속 사족을 덧붙인다.


‘이 책이 극 사실주의이자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쉽게 읽히지는 않을 거예요. 저도 읽으면서 진도가 안 나가네요. 그래도 다들 파이팅!’


여기서 잠깐, 그럼 과연 20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옐리네크 작가의 ‘피아노 치는 여자’란 어떤 작품인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어렵게 다가가는 소설이기 때문에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소설처럼 사건을 선형적으로 따라가는 게 아닌, 주체의 붕괴와 언어의 균열을 통한 해체주의적 포스트 모더니즘 성격을 띄기 때문에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라면 처음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을 접한 독자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게 될 것이다.

가부장제와 남성 권력을 뼛속까지 내재화한 주인공 에리카의 분열된 주체성과 에리카를 억압하고 학대하는 어머니의 존재가 가부장제의 또다른 모습으로 구현되는 모습, ‘피아노’가 에리카에게 자신을 보기 좋게 포장하고 권력의 도구가 되는 동시에 억압의 장치가 되는 일련의 이중적인 구조와 분열성,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에리카의 착취적 성욕과, 동시에 착취당하고자 하는 성욕의 이중성과 모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만 이 소설을 펼쳐놓고 예기할 수가 있다.

도무지 호감이 가지 않는 소설 속의 인물들, 화자에 대한 독자들의 불신, 무슨 의미인지 모를 끊기는 문장과 언어, 심상치 않은 난이도 때문에 완독만 하더라도 박수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작품, 그런데 이 책으로 토론을 하라니, 대망의 디 데이는 덤 앤 더머들의 대환장 파티가 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날, 이 모임의 멤버들도 자신들이 ‘책 좀 읽는다’, 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엉뚱한 소리들만 해대고 있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 소설이 왜 페미니즘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지 전 도무지 모르겠어요. 이건 한 변태적이고 비뚤어진 개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리카라는 이상한 여자를 보편화시키지 마세요.


-이 작가는 페미니즘 작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페미니스트예요. 이 소설도 반 페미니즘적인 성격이 매우 강합니다. 주인공이 같은 여성한테 아주 적대적이잖아요? 이 작가가 그 유명한 소설 ‘인형의 집’ 후속작을 썼는데 읽어 보셨습니까? 인형의 집에서 가출한 주인공이 나와서 고작 한 일이 뭔지 알아요? 창녀가 된 겁니다!


-에리카의 어머니가 가부장제를 내재화한 인물이라니요? 도대체 어딜 봐서 그렇다는 겁니까? 딸에 대한 과잉 사랑이라는 건 이해했지만 이게 어떻게 가부장제와 연관됩니까?

어때, 가관이지 않은가? 윤하는 절망 속에서 할당된 시간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딸의 교제와 일상, 욕망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엄마는 여자에게 정절과 제한을 요구하는 남성 권력의 또다른 현시라고 봐야겠죠. 에리카가 여자의 몸과 외설, 마조히즘을 통해 성욕을 해소하려 드는 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도구화하려는 남성적인 시각이니, 작가가 의도적으로 주체를 분열시켰다고 봐야 하지 않나요?


여기에 승엽은 발끈하며 되묻는다.


-어디에 남성적인 시각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쇼윈도에서 나체로 행했던 여자들의 행위를 남자들이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대놓고 하는 노골적인 행위에 대한 흥분도는 떨어져요.

대놓고 하는 거 말고, 그럼, 은근하게 하는 건 좋아한단 의미일까?


-아, 네.


윤하는 곧바로 토론할 의욕을 잃는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런 생각을 한다. 토론자가 남성회원 7명, 여성회원 7명의 정확히 5:5의 성비인데 일곱 명의 남성회원들이 모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비해 여성회원들의 대부분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풍경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왜, 아직도?


-이 작가가 그 유명한 소설 ‘인형의 집’ 후속작을 썼는데 읽어 보셨습니까? 인형의 집에서 가출한 주인공이 나와서 고작 한 일이 뭔지 알아요? 창녀가 된 겁니다! 이 작가는 반 페미니스트예요.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겁니다.


희준이 같은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되풀이하더니 스스로 낸 결론에 또 스스로 만족해 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반 페미니스트라서 노벨상을 받았다.’ 는 발언에 분위기는 묘하게 냉각되었고 윤하는 그 자리를 뜨고 싶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미영이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여자들이 사회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었을 테니까요. 자신의 주체성을 찾겠다고 집을 나온 노라가 살기 위해 겨우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는 걸 다소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렇게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직업이 그것밖에 없나요? 하다못해 가정부도 있었을 테고, 음식점 주방 일도 있었을 거 아니예요?


- 그럼요, 할 일이 없다고 다 창녀가 되는 건 아니지..

남자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노라에게는 애초에 자아실현의 길이 차단되어 있었던 거죠. 그걸 극단적으로 창녀의 길로 빠진 결말로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반면 <피아노 치는 여자>의 에리카는 자신의 재능을 어머니의 욕망과 정절의 상징으로서만 이용하려 했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에리카는 특히 주체적이지 못했죠. 이 소설 전체에서 제가 느꼈던 건, 에리카의 비뚤어진 욕망과 주체성을 가장한 수동성이예요.

미영의 말에 갑자기 남자회원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이건 정신분석학으로 접근하는게 맞을 수도 있어요.


-개인의 뒤틀린 욕망과 가학, 피학적 욕망이 더 와 닿네요.

미영은 얘기를 이어 나간다.


-에리카의 자아는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의 욕망 또한 무엇인지 불분명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가학적이지만 수동적이기도 한 태도 때문에 그녀의 모든 목소리는 중심이 없고 그래서 힘을 잃을 수밖애 없는 거지요.


남자들은 미영의 통찰력과 분석적 깊이를 칭찬하며 에리카를 함께 비난하는데 힘을 보탠다. 윤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날 미영은 자신의 카톡 프로필 문구에 ‘나를 돋보이게 하는 긍정 에너지’ 라는 말을 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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