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에리카3.

by 이라IRA

윤하는 이후로 소모임 방에서 부쩍 말이 없어졌다. 성훈은 다음 분기 책 선정 때엔 민감한 이슈가 나올법한 책은 다루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소모임 사람들 여섯이서 강릉이나 속초 어딘가로 1박 엠티라도 다녀와야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소원해진 우정을 다시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서 바다를 바라보며 신선한 회 한 점에 술잔을 기울인 채, 남자들이 주접을 부리고 재롱을 피워주면 여자들의 기분은 금세 풀리기도 하니까.


전략과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는 듯 소모임 카톡 방에서 다시 활기가 돌았다. 성훈은 지방 출장이라고 집에 둘러댔던 순간 모든 맥박이 온 몸을 압도하여 혹여 아내가 눈치채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자신 정도만 되어도 착한 남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래서 차는 여섯 명이니 벤 한 대면 충분하겠네요?’


‘그럼 성훈님 차가 딱이겠는걸요?’


‘무슨 소리예요. 회사 출장 가는데 벤을 왜 갖고 갑니까!’


‘고기와 음식은 다 그 근처에서 한꺼번에 장을 보는 편이 낫겠죠?’

‘우리 이러지 말고 엠티 전 오티 한번 하시죠?’


아주, 신이들 나셨구나. 성훈은 여섯 살, 네 살 딸 아이들을 아내에게만 맡겨 두고 주말에 몰래 놀러가는 상상을 하고 있자니 급하게 떡을 훔쳐먹은 마냥 목이 막혀왔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쉬지 못하고 가족들을 먹여 살려줘야 하지 않은가. 살면서 몇 번쯤 셀프로 숨통을 트여줘도 괜찮다고 생각을 고쳐 본다. 사실, 엠티 전의 오늘의 오티가 더 설레는 날인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여섯 명이서 몇 달 만에 한 자리에 다같이 모이는 자리가 될 터였고 원래 여행이라는 건 갈 때보다 계획할 때가 더 재미있다고 하지 않는가.


‘저는 오늘 좀 일찍 퇴근해서 먼저 근처에 가 있겠습니다’


‘오, 그럼 나도 일찍 갈 테니 우리 먼저 시작하고 있을게요.’

이른 시간부터 술에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성훈이었지만 그 날 희준을 먼저 만나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듣게 된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소훈이랑 윤하 둘이 만나고 있던데? 주위에 누가 없었고 분명 둘만 있었어. 아는 체하기 조금 뭐해서 가만있었는데 끝내 날 못 보더라고. 그래서 나도 가만히 있었지.


- 뭐야, 둘이 사귄다는 거예요?


- 뭐, 그야 모르지. 근데 꼭 사귀어야만 만나는 건 아니잖아?

낄낄거리는 희준의 얼굴을 성훈은 갑자기 한대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묘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같은 책모임 운영진을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자신에게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았나. 희준이 한 얘기 덕분에 그날 오티 모임도 건성으로 하고 집에 돌아왔다. 다른 멤버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어서 여섯 명이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도 성훈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날은 어김없이 그의 기억력이 언제부터 끊겼는지에 대한 테스트성 질문이 들어온다. 전 날의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듯 가장 먼저 취한 성훈 자신이 안주거리가 되는 관례(?)가 있었고 그런 장난은 항상 윤하가 주도했다. 톡 방 분위기를 보아하니 전 날 멤버들은 꽤나 들 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다. 성훈은 갑자기 이유 모를 화가 치밀었다.


'오늘 ‘손석희의 질문들’에 성훈님이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 출연하던데..'

실컷 놀린 뒤 장난감 주며 달래라도 주는 듯한 윤하의 태도에 성훈은 더 빈정이 상했다.


'ㅋ 손석희는 미투 이후로 망가졌죠. 오달수는 분별없는 손석희 덕분에 억울한 희생자가 됐고요.'


'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성훈의 예상대로 윤하가 반발한다.


'이상한 소리라니요? 윤하님 때문에 이런 얘기도 못합니까?'


'미투 운동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얘기하는데 역사적으로 미투는 굉장히 진보적인 사건이자 긍정적인 파급력이 있는 사건이었죠? 오달수가 희생자라니 그 무슨 웃기지도 않는..'


성훈이 작정하고 시비를 걸려고 하는데 그 순간 소훈이 자신을 거들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윤하님, 오달수 사건 팩트체크 됐어요? 오달수가 정말 가해자인지는 안 밝혀졌잖아요.'


'자기 얼굴 까고 나와서 톱스타급 상대로 자신을 피해자라고 밝히는 건 쉽지 않죠. 그게 거짓이기도 쉽지 않아요.'


이상하다. 둘의 대화가 썸을 타는 사이에서 나올 법한 대화라고 하기엔 왜 날이 서 있을까. 더군다나 이제 막 사귄다고 하는 사이에서는 적절한 대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훈은 감지한다.


'모든 사건은 팩트체크부터.. 윤하님이 평소에 관심 많은 뉴진스, 동덕여대 사건도 모두 팩트체크부터 하고 얘기합시다. 톡방에서 그런 얘기로 도배하지 마세요. ㅋㅋㅋㅋ '


성훈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시작한 건 아닌지 갑자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어우 뉴진스, 동덕여대 사태라면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만 ㅋㅋ 뉴진스는요..'


‘윤하님이 방을 나갔습니다.’

희준이 눈치도 없이 소훈을 거드는 사이에 윤하는 이미 톡방을 나가고 없었다.


성훈은 나쁜 일은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성격이라 그 다음 일을 그에게 물어본다면 제대로 듣기는 힘들 것이다.


몇 년 후 그 때 일을 성훈의 기억에 기대어 반추해 보자면 갑자기 깊어진 감정의 골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띄엄띄엄 흐릿하게 남아있다. 윤하가 없이도 책 모임은 잘 굴러갈 것이고 자신이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히 여기는 술판은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계산이 서고 나니, 성훈은 무리하게 자신을 굽혀서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소훈과 윤하가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해서도 그 이상 들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더 이상 큰 갈등 없이, 다른 누군가가 더 다치지 않은 채로 끝났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기로 하니, 그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윤하는 미영에게서 띄엄띄엄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윤하님, 미안해요. 전 그 때 다른 걸 하느라 그 톡들을 못봤어요.’


‘윤하님, 그동안 고생한 게 있는데 남자회원분들과 다시 잘 얘기해보시는 게 어때요?’


‘윤하님, 그동안 수고하셨고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정말 아쉬워요. 그동안 좋은 추억 많이 쌓았어요. 어디서 만나게 되면 우리 웃는 얼굴로 인사해요. 건강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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