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말도 안돼. 그녀가 나를 배신했다. 일기장에 빼곡하게 써 있는 그녀는 내가 알던 민진이 아니다.
'부모님에게 차라리 예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려던 결혼을 해버렸다면 지금쯤은적어도 내 병원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여유롭게 준비하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기꺼이 지원해 주셨겠지. 매일 내 책임 하에 있던 환자가 눈 앞에서 죽어가는 꼴을 더 이상 직접 보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명절 때마다 가족으로부터 홀로 버려져 있는 일 따위는 없었을 거다. 승언은 이 모든 일의 발단이 은주라고 한다. 애초에 이 세상이 우리를 받아줄거라던 기대는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부모가 은주네와 같을거라는 기대했던 건 처음부터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은주는 그걸 알고 있었다. '
“그런 사람까지 우리 커뮤니티에 끼워 주는 건 솔직히 너무 오바 아니야? 트렌스젠더를 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거부감 안 든다고 얘기할 수 있어?”
언제였던가, 트랜스 젠더의 커뮤니티 가입 찬반에 대한 토론이 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무심코 던졌던 얘기에 민진이 왜 그렇게 까지 정색을 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건 뒤통수를 몽둥이로 이미 얻어맞은 상태에서 해머로 한번 더 세게 세게 맞은 꼴이다.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보기 위해 똑바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지경, 떨리는 손 발이 차가워지고 온 몸이 분노로 오히려 천천히 식고 있다. 게다가, 승언이 그 아이가 트젠이었다고? 이건 말도 안 된다.
민수, 그녀라고 해야할까, 그토록 여자가 되고 싶어했으면서 이름은 그냥 민수인, 이해할 수 없는 그녀는 결국 우리 커뮤니티 입성에 성공했다. 가입에 대한 찬반 투표는 놀랍게도 50대 50, 결국 최종 결정권은 모임장인 나에게 돌아왔고 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설득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민진이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 때 민진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다.
민진을 처음 만났던 날 그녀는 위장결혼을 할 뻔한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거의 결혼까지 갔었다고 해야겠죠. 아버지가 특히 적극적으로 추진하셨으니까요. 그 집에서 무리한 혼수를 요구해 온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불 같은 아버지 성격을 모르고 사돈 될 쪽이 너무 예의가 없으셨죠. 아, 근데 제가 별 얘기를 다하고 있네요.”
민진은 예쁜 입으로 재잘대다가 갑자기 멋쩍은 듯 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모습이 특히 예뻤다.
“ 민진씨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상황이 반대였을 수도 있었겠는데요, 의사 사위 들이려면 여자쪽에서는 병원이라도 차려주려고 하지 않나요?”
그녀와의 교제를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극도로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 세계에서 단 두 번의 소개팅으로 이런 인물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니까.
“부모님이 보수적이고 많이 엄격하셨던 편이예요. 그건 지금도 그렇죠. 제가 장녀라 특히 저에게는 더 그러시죠. 제가 이렇다는 걸 그분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예요. 은주님이 그래서 많이 부럽네요.”
그녀의 부모님 성향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엄격한 통제 하에서 유리로 만든 꽃병처럼 자랐다는 점에 사실은 왠지 모르게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는 엄격하고 섬세한 공정을 거친 크리스탈 같았다, 학창시절 내내 공부밖에 몰랐다는 점, 그래서 친구도 가까운 친구 몇 명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점들도 마음에 들었다. 극도로 다른 이에게 끌린다고 했던가.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 다른 전기극을 가지고 만난만난 것 처럼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민진은 나와 가는 어디든 처음 가보는 곳이라고 했다. 그 흔한 해운대조차 가본 적 없었던 그녀와 전국을 누비고 골목 시장은 죄다 휘젓고 다녔던 여행은 그녀보다 의외로 나를 더 행복하게 했다. 한 번쯤 다 가 볼만한 곳들이라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여행지조차 매 순간 신세계를 경험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게 그토록 큰 기쁨을 주리라고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회사 동료 K가 무심하게도 뱉었던 말에 그래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해.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면 덩달아 기분 좋아지지. 그래서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으면 남편이 더 엇나가는거야. 이 얘길 우리 마누라의 머리로는 이해를 못해요.”
“김 과장님 아내분이 이 얘기를 듣고 있는다면 어떤 표정일까요?”
구내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억지로 함께 먹다가, 듣다 못해 이렇게 쏘아붙였던 기억이 난다. 개 꼰대 새끼, 나이도 얼마 안 먹은 놈이 여자들 앞에서 고르는 단어들 하며, 기분 같아서는 면전에 대고 침이나 뱉어주고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여행 중 민진의 얼굴을 보자 젊은 꼰대 김과장의 그 얘기가 떠오르지 뭔가,
김과장은 결혼 전에 회사 내 여성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이건 꽤나 불쾌한 사실이다. 그 게임중독자는 일요일 새벽까지 게임질을 하다 월요일에 퀭한 눈으로 지각을 일삼는 한심한 놈이었다. 게임을 즐기는 커뮤니티 안의 남자들의 성향은 뻔했다. 남초, 보수, 반페미니즘, 그걸 넘어선 여성 혐오주의자들.
“난 그런 형편 없는 놈에게 빠지는 여자들이 더 신기해. 도대체 결혼은 왜 해서 그런 놈에게 몸을 바치는 걸까? 그런 놈들에게 여자는 그냥 자기 시중이나 들고 성욕이나 푸는 도구일 뿐인데”
이런 얘기에 항상 고상한 척 하는 내 언니 같은 여자들은 눈살을 찌뿌린다.
“참나, 그럼 너처럼 여자를 좋아하라는 거냐? 이성에게 끌리는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거 아니야?”
심지어 언니는 내가 내 자신 이외의 여자를 ‘몸’으로 밖에 생각하는 건 김과장이나 별다를 바 없다는 해괴한 논리나 펼쳐 댔다.
“너 옛날에 조윤선 장관 보면서 침이나 흘려댔잖아. 그 당 색깔 사람들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조윤선은 죄수복 입은 것 마저 섹시하다며. 그런 사람을 회사 내 강연까지 초청하고 그건 좀 아니지 않니.”
여하튼 언니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거라고는 없다.
어찌 됐든, 민진이 새하얗다 못해 반짝이는 눈처럼 빛나는 해변의 모래사장을 보며 황홀해 할 때 김과장이 떠오르다니. 민진은 나의 거울이었다. 그래, 그것만은 인정한다. 그런데 요즘 내가 비친 거울은 내 모습이 아니었던 거다. 이 얘길 어떻게 꺼내야 할까.
벌써 자정이 넘었다. 노트북에 있던 일기장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한 게 뉴스를 보고 난 직후였는데, 네 시간 째. 같은 곳에서 같은 자세로 굳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오늘 정말 병원 워크샵을 간 걸까? 내가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