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의 여자 2.

by 이라IRA

“굳이 따지자면 은주지.”

지금도 누가 부치냐는 질문은 꽤 많이 받는다. 30대대까지 숏컷을 고수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게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어 지금은 긴 생머리가 어깨를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까지 머리를 길러본 건 처음인데 긴 머리가 의외로 편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굳이 헤어 컷을 받으러 미용실에 가지는 않는다. 미용실에 자주 갈 필요도 없으니 돈도 절약하고 손질도 편하고, 여자들이 머리를 기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점이 있었다.

그래도 나와 민진의 얘기를 얼마 듣지 않고도 그들은 내가 부치라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그리고 난 묘하게도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을 펨이라고 인식한다는 사실에 대한 민진의 반감은 그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고서는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것도 승언을 만나고부터였을까.


“아무리 바빠도 그런 건 먹지 말랬잖아. 암은 재발하면 답도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해. 약도 내가 챙겨줘야 안 빼먹고, 진짜, 연인인지 자식인지 난 너무 헷갈린다.”


나는 민진의 타박에 애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를 챙기는 사소한 모든 것들이 싫지 않았는데 그걸 사실은 진심 귀찮아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녀와 쌓아왔던 많은 것들이 진짜였나 싶다. 아니, 승언이 우리 사이의 모든 걸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건가.


아, 민진이 나에게 화를 냈던 적은 한 번 있었다. 엄마와 언니, 내 가족과 같이 여행 갔을 때 유독 예민하다고 느꼈던 그 때 말이다. 그녀는 내 차 키를 챙겼냐는 물음에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


“네 소지품은 네가 좀 챙겨. 내가 왜 그런 것까지 다 챙겨야 해?”


나는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엄마와 언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가는 걸 보았다. 에이, 네가 꼼꼼하잖아 하며 웃어넘겼지만 민진은 그 날 저녁에 고기를 구울 때도 내내 부루퉁해 있었다.


“민진아, 그냥 앉아있어라. 우리가 하마.”


펜션 주방에서 상추를 씻고 있던 민진을 엄마가 말려서 앉혔다. 나는 테라스에서 강아지와 터그 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주방엔 민진과 엄마, 언니 셋이서 고기 구울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던 것 같다. 여행을 다녀와서 그녀의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이는 언니와 결국 크게 말싸움을 벌였다. 그리고는 민진과 우리 가족을 이어주려던 내 시도와 노력을 후회했다


이상한 건 친구들과 가는 여행에서는 한번도 비슷한 트러블이 없었다는 점이다. 민진은 평소에 즐겁게 요리하는 사람이고 집에 있는 침구와 내 물건들을 수시로 정리해 주는 여자다. 내가 아무데나 둬서 못 찾는 차 키와 휴대폰 찾아주는 일도 놀랍도록 잘 해낸다. 친구들에게는 심지어 그게 자기 취미라고까지 얘기하던 그녀였다. 왜 유독 가족 여행 때만 그랬는지 일기장을 뒤져봐도 그때의 심정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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