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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란 Dec 07. 2023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가 울부짖었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회사 다니느라 힘들었으니 주말이면 늘어져 쉴 만도 한데 딸은 두세 달이나 주말이면 멀리까지 뮤지컬을 본다며 집을 나갔다. 마스크를 쓰고 오페라 안경까지 챙겨서 화장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부랴부랴. 이번 뮤지컬은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회차를 고르고 골라, 소위 N차 관람을 하던 딸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좋아하는 배우의 ‘막공’이니 같이 가자는 거였다. ‘첫공’ ‘퇴근길’ ‘막공’ 같은 말뜻은 하도 들어 알고 있었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프랑켄슈타인은 끝나는구나. 한 번 보고는 싶었다. 프랑케슈타인 소설과 영화가 뮤지컬로는 어떻게 구현됐을지 살짝 궁금했다. 공연을 보고 또 보니 그랬겠지, 딸은 입만 벌리면 ‘위대한 생명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며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메인 넘버 곡을 장중한 목소리로 흉내 내곤 해서 나마저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엄청나게 추운 겨울이었다. 뮤지컬 관람료가 그렇게 비싸다는데 웬일? 가겠다, 해놓고 이때다 싶어 나의 얇고 넓은 프랑켄슈타인 지식 자랑도 할 겸 아는 척을 시작했다.   


네가 프랑켄슈타인 소설을 읽기나 했어? 그걸 쓴 작가가 누군지는 알고 있어? 원작자 메리 셸리가 18세에 그 이야기를 썼다는 것은? 책이 나온 해가 장장 200년도 더 전인 1818년이란 것은? 메리 셸리를 낳고 열흘 만에 죽은 엄마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라는 훌륭한 작가인 것은 알고 있었니? 메리 셸리 엄마가 쓴 책 제목이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건? 프랑켄슈타인 원래 제목이 뭔 줄은 알기나 하고?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책을 냈을 때 하도 어려서, 젊은 여자라서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하고 ‘익명’으로 출판했다는 슬픈 사연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딸은 주야장천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오만에 차 ‘위대한 생명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 부분만 불러 제쳤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크리처는? 괴물은 노래 안 해? 그 대사는 혹시 나와? 크리처가 씹어뱉듯이 던지는 그 말, 한 맺힌 그 말. 그는 나를 만든 창조주야. 그러나 그는 나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 하는 절규 말이야. 나는 책 읽을 때 그 말이 너무나 슬펐거든.”

딸이 좋아하는 배우는 프랑켄슈타인 역할을 맡았지 괴물 크리처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아니었다. 크리처의 넘버 곡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한국 뮤지컬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강렬하게 묘사하는 괴물 크리처보다 닥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주요대사를 몰아준 모양이었다. 많이 아는 척 하는 내 말을 모르쇠 하는 딸과 함께, 직접 보고 그 말을 하는지 확인하자며 프랑켄슈타인을 보러 갔다. 딸이 오페라 안경을 내게 넘겨주었다.  


괴물 크리처로 지칭될 뿐 이름조차 없는 그는, 공연 중에 저 말을 하긴 했다. 땅이 꺼지듯이, 아무도 잘 들은 것 같지 않게 조용히. 그 순간 나는 열 번 넘게 봤으면서도 또다시 프랑켄슈타인 역 배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딸의 한쪽 손을 잡아당겼다. 저 말이야, 저 말. 내게 맺힌 그 말, 크리처의 저 말.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 대신 목을 졸랐지. 들었어?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은 그다지 세심하게 만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괴물이 전기충격을 받고 깨어나자마자, 죽은 자들의 조각조각을 깁고 꿰매 생명을 얻자마자 창조주에게 버려진 천둥 같은 큰 슬픔이 깊게 나타나지 않았다. 버림받은 그가 숲속을 헤매며 겪은 뼈 시린 외로움도 속속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사랑받지 못해 악마가 된 복수의 화신,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고 프랑켄슈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골라 죽이는 잔혹한 살인자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원작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크리처가 맹인 아버지와 젊은 남녀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 헛간에서 몰래 몰래 사람의 언어와 감정을 배우는 부분이었다. 크리처는 그 가족이 서로에게 부르는 이름을 듣고 엄마 아버지 아들딸이란 단어를 배우고 사람마다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에겐 모두 있는 이름이 자기에겐 없다는 것과 따스하게 애정을 담아 불러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까지.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 서로를 아끼고 챙겨주고 먹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들의 사랑과 다정함, 가난한 자들의 슬픔 같은, 감정과 표정을 배웠다. 


크리처는 인간의 아기가 그러하듯이 말을 배우고 단어를 익히고 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가난한 가족들이 고되게 일하는 것을 보고는 ‘우렁각시’처럼 나무도 잘라다주고 곡식 같은 것들도 챙겨다주었다. 저들처럼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일을 하고 착하게 굴면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미워하지는 않을 줄 알았다. 처음에는 크리처의 행동은 온순했고 마음은 부드러웠고 착하고 똑똑했다. 폐허에서 굶주리고 추위와 냉대를 피해 외롭게 살면서도 복수를 꿈꾼 적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이 자기를 만들 때 기록한 생명창조일지를 읽고 자신의 탄생 비밀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버림받았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는. 너무나 흉측한 모습이어서 정을 준 오두막 가족에게도 두들겨 맞고 쫓겨나기 전까지는. 

소설을 처음 읽을 때부터 나는 크리처의 마음의 행로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모두 나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할까. 나는 나쁜 마음을 가진 적이 없는데. 선의를 가졌을 뿐 누구도 해칠 마음이 없는데. 크리처는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을 찾아다닌다. 궁금하니까.  


“나는 너의 창조물이야. 네가 나에 대한 책임감을 인정한다면 나는 조용해지고 온순해질 거야. 오, 프랑켄슈타인.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를 죽이려고 하지 마. 나는 너의 창조물이라는 걸 기억해둬. 모든 사람들이 나를 혐오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도 착하고 착했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줘. 친구를 만들어줘. 신부를 만들어줘. 그러면 난 다시 온순해질 거야.” 


그리고 북극.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이 살고 있지 않은 흰 세상, 흉물이라 때리고 쫓고 죽이려드는 사람이 없는 곳, 차디찬 얼음과 눈만 쌓인 ‘북극’을 찾아가는 크리처의 여정을 좋아했다. 그곳에는 평화가 있을 거야. 넌 이제 혼자가 되는 거야. 혼자가 된다는 그 슬픔. 이게 나의 복수야. 먼저 가고 따라가고 마침내 프랑켄슈타인과 크리처가 만나는 복수의 끝, 북극의 마지막 장면을 사랑했다. 크리처의 슬픔에 이입하게 한 저 슬프고 절망적인 눈물과 비탄의 대화는 북극의 설원에서 벌어진다. 동생과 아내와 친구를 죽인 크리처를 찾아 죽이려고, 생명을 불어넣었으니 마지막 숨도 끊어주려고 허위단심 쫓아왔으나 크리처보다 먼저 죽은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의 주검 앞에서. 

 “그는 나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어.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 

“그런데 왜 울지?”

“그는 내 아버지니까.”


크리처가 갑자기 배를 부수고 들어와 빅터의 시체 앞에 나타나서 절규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죽은 몸을 붙들고 통곡한다. 놀란 선원들이 총이나 무기를 들고 크리처를 에워싸고 배 수리담당 선원은 왜 배를 부수냐며 화를 낸다. 크리처는 ‘이런 구멍쯤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지만, 이제 이 사람은 고칠 수 없다’ 며 서럽게 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괴물 이야기를 들었던 탐험대장은 그가 빅터가 죽기 전에 말한 그 괴물임을 알아보고, 울부짖는 크리처에게 말한다. 

“그런데 왜 울지? 그를 죽게 만든 건 넌데 왜 슬퍼하는 거지? 좋아할 일 아니냐!”비아냥거린다. “난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만들어내고 나를 알아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제 나를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내 아버지이고 창조주였다. 이름조차 주지 않았지만.” 


이야기의 끝. 나는 크리처의 저 대사에서‘조차’라는 조사 때문에 그렇게나 괴물 크리처가 안쓰럽고 가여웠다. 사전에 나온‘조차’조사: 이미 어떤 것이 포함되고 그 위에 더함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일반적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극단의 경우까지 양보하여 포함함을 나타낸다. 조차 조사는 예문조차 애잔하다. 그는 편지는커녕 제 이름조차 못 쓴다. 이번 달 월급은커녕 지난달 월급조차 못 받았다. 그 문제는 풀기도 어려운 데다 이해조차 힘들다. 그는 워낙 망나니라서 부모조차 그를 멀리했다. 영문 번역도 쳐봤다. You didn't even name me. 넌 내 이름도 안 지어줬어. You didn't even give me a name. 당신은 나에게 이름도 주지 않았어요.


그래. 괴물의 입장에선 생명이 창조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위대한 생명창조의 꿈에 부풀어 시체들 가운데서 생명을 만든 것은 오롯이 닥터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창조주이고 아버지이자 엄마고 의사다. 비밀을 알고 전능하고 아름답고 창조자이기 때문에 고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만들어낸 죄, 생명의 신비를 아는 자의 오만, 그러나 사랑해야 마땅한 피조물을 사랑하지 않은 죄, 무방비의 세상에 던져놓은 생명체를 예뻐하지 않은 크나큰 죄를 지은 사람이다. 그는 창조주라면 주어야할 애정과 관심과 사랑과 먹을 것과 보호에 이르기까지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만들어놓고 끔찍하다고 바로 도망쳤다. 폐허 같은 실험실에 창조물을 버려두고 유복하고 따스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줘야하는 첫 번째의 일, 이름을 지어주는 가장 기본조차 하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 

“왜 날 만들었지? 왜 그 컴컴한 죽음의 한 가운데서 나를 태어나게 했지? 왜 날 사랑하지 않지? 왜 내게 이름도 주지 않았지?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죽여서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할 거야. 내가 이토록 잔인해진 것은 억지로 내게 정해진 이 진저리치도록 고독한 삶 때문이오.” 


환대받지 못한 삶, 환대는커녕 적대만 가득했던 크리처의 삶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는데.

희한한 건 뮤지컬을 보고 와서 이렇게까지 원작과 뮤지컬을 비교하며 나의 의견을 개진했어도 끝까지 딸이 프랑켄슈타인에게만 공감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프랑켄슈타인 배역을 맡은 가수를 좋아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버려진 자, 소외된 자, 외로운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크리처는 정말 너무 나쁘고 못된 남자나 잘못 자란 아들 같지 않아? 왜 낳았냐고 무조건 원망하고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버럭버럭 화를 내고 징징거리고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지난 일들 하나하나 꼼꼼하게 들이대면서 협박하고. 심지어 프랑켄슈타인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서 자기가 겪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말겠다고 몇 번이나 말하잖아.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동생도 결혼할 젊은 신부도 절친한 친구까지 찾아다니면서 다 죽였잖아. 정말 끔찍한 스토커에 협박범에 연쇄살인자라고 생각해. 프랑켄슈타인이 창조주처럼 맘대로 생명을 만들어 놓았다고 해도! 막상 창조하고 나니 흉측해. 도무지 예쁘지가 않아. 사랑스럽지가 않아. 만든 자로서 절망적으로 놀랄 수도 있지. 만들어놓고 나니 정말 무서울 수도 있지. 도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그렇게나 집요하게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이름도 안 지어줬다고 쫓아다니는 거, 정말 끔찍한 거 같아. 그거야말로 진짜 괴물 같다고 생각해.” 


딸이 나름 진지하게 말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젊은 딸과 나이든 엄마여서 이렇게 다른 생각인 걸까. 딸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나는 말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유복하고 품위 있는 귀족집안의 장남이었어. 고생이라곤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고통이 뭔지를 몰라. ‘태어나보니’ 부자고 귀족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해줘. 예쁘다 해주고 떠받들어주고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자랑스러워하지. 어떤 행동을 해도 칭찬 받고 행여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부적절한 선택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전후좌우를 살펴 공감해주고 이해하고 응원해줘.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세계엔 하나도 없어. 그는 입에 밥 한 끼 넣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본 적이 없어. 배고픔을 느끼면, 그것도 살짝 허기를 느끼면 바로 구할 수 있지. 


그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사랑을 받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 남자야말로 철저하게 대접받고 자란 철없는 남자에, 잘못 큰 아들 같지 않은가? 남의 입장을 살피거나 배려하고 베푸는 일을 해 본 적이 없을 수밖에. 그렇게 사랑받기만 하고 뭘 해도 인정받고 자유를 누렸으니 자아가 팽배해지고 전능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러니 신비학에 빠지고 생명공학의 위대한 꿈을 꾸게 되는 거지. 자기애의 팽창, 신의 위치에 올라서고 싶은 오만에 사로잡힌 영혼인 거지. 사랑받을 줄만 알지 사랑할 줄은 모르고 위대해질 줄만 알았지, 무엇을 생산할지를 몰랐던 남자. 남의 말을 들어준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나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크리처가 울고불고 했는데. 난 메리 셸리가 크리처가 겪은 저주받은 운명을 뼛속깊이 슬퍼했다는 생각이 들어.”


또 한 번 어쩔 수 없이 괴물, 흉물, 스토커, 연쇄살인범을 변호하는 편에 서고야 말았다. 생각은 달랐으나 뮤지컬을 보고난 후 우리에게 달라진 건 있었다. 딸은 같이 ‘막공’을 보고 난 후 주말에 가만히 원작소설을 읽었다. 나는 그 후 1년, 제대로 알고 싶어서 프랑켄슈타인 관련 모든 것을 몰두하다시피 파기 시작했다. 1931년 만들어진 영화 <프랑켄슈타인>, 1935년에 만들어진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1818년에 메리 셸리가 쓰고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지 못한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2016년 이란의 최초여자감독 하이파 알만수르가 감독한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까지. 

메리 셸리의 엄마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가 쓴 <여성의 권리 옹호>와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까지 다시 봤다. 


“왜 난 모두에게 괴물이라 불려야 하나. 그동안 내가 겪은 세상, 내가 겪은 인간. 그리고 내 눈물을, 그 이야기를 들어줘. 그래. 난 신을 믿어. 지독하게. 하지만 그건 축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통해서야. 만약 신이 없다면 누가 이런 지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렇게 한탄하던 ‘이름조차’ 받지 못했던 크리처의 슬픈 운명과 200년 넘게 인구에 회자되는 이름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을 창조한 소설을 써놓고도 ‘이름 없이’ 책을 펴낼 수밖에 없었던 18세 메리 셸리의 기막힌 운명이 그 겨울, 내 맘 속에 들이닥쳤다. 

영화 <메리 셸리>를 여러 번 봤다. 메리가 크리처처럼 말하고 있었다. “난 이름조차 적지 못하고 책을 내야 했어요. 한 글자 한 글자 온힘을 다해 내가 썼는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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