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말 것!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by 아트필러

※ 글에는 해당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히토의 성장


영화를 처음 볼 때에는 플롯을 따라가기에 바빴고, 다시 본 지금에야 인물에게 이입할 수 있었다. 이건 뭐든 맥락에 빠져들기보다 주변부를 관찰하는 내 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영화가 2차 대전 당시 일본인의 시선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한국인의 DNA가 깨어났기 때문일 수도.


책을 읽고 난 직후 영화를 봐서 그랬는지, 전반부에는 온전히 소년 마히토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다. 화재 사고로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재혼을 해서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마음대로 말할 수도 없다. 나츠코는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새 동생을 가지고 있다. 마히토는 ‘내가 이 애정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하는 마음에 자꾸만 충동적으로 군다.


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30926_264%2F1695697466122s7Vq8_JPEG%2Fmovie_image.jpg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네이버 영화

나는 이 감각에 집중했다.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감각. 마히토에겐 나츠코를 대하기가 무엇보다 어려웠을 거다. 나츠코를 엄마로 인정하자니 죽은 엄마를 배신하는 것 같고,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다. 그렇다고 나츠코를 부정할 수도 없다. 나에게 다정한 데다가 임신해서 몸이 약한 여인에게 못되게 굴만큼 철없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아빠는 새 동생을 맞이할 준비가 됐고. 나만 여기 남아 있다간 이 가정에 섞이지 못하겠구나 싶었을 거다.


전반부에 마히토는 의젓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니 그 모습은 마치 로봇처럼 어색하다. 자기 마음을 어쩌면 좋을지, 그 태도조차 정하지 못해서 뚝딱거린다. 반면 마히토의 내면에서는 응축된 슬픔과 괴로움이 소리 지르고 있다.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물음을 계속 던지느라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고, 돌로 머리를 치고 왜가리를 잡으려고 하는 등 분함을 우회적으로 삭힌다.


꿈에서 깨면 모든 게 명료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왜가리의 안내로 환상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영화 중후반부가 그런 꿈같다. 마히토를 괴롭히는 복잡한 생각들이 탑 안의 세계에서 서로 얽히고 싸우며 하나의 길이 트인다. 다만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중간중간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들에, 마히토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그런 점이 꿈과 닮았다. 살아가며 자연스레 아는 것이 있듯이, 마히토는 여정을 계속하며 자신의 답을 찾은 거다.


펠리컨과 와라와라


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30926_210%2F1695697533348twj9S_JPEG%2Fmovie_image.jpg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네이버 영화

첫 번째 의문. ‘엄마는 왜 죽어야 했나요?’ 어머니의 죽음은 소년에게 주어진 첫 시련이었고,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나아갈 수 없다. 마히토는 와라와라가 사는 섬에서 그 답을 찾는다. 삶과 죽음은 필연적인 것. 누군가를 죽이는 대가로 살아가고,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죽고 죽임으로써 유지되는 세계의 사이클. (전쟁을 겪은 세대는 그런 생각이 일상화되어 있을 것 같다.)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은 때때로 무책임하다. 실제로 죽음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죽어가는 펠리컨을 삽으로 내려치지 않고, 묻어주는 행위는 마치 ‘죽음은 슬퍼해 마땅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히토는 세계의 잔인함을 받아들인다.


나츠코


두 번째 의문. ‘나츠코는 내 엄마인가요?’ 산실에 들어간 마히토가 ‘나츠코 씨’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는 ‘엄마!’ 하고 소리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난 네가 정말 싫어!’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상상할 정도로 나츠코를 대하기 어려워했으면서,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 앞에서 나츠코는 엄마보다 가까운, 지켜야 하는 존재가 된다. 마히토에게는 이 순간이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대목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과거의 슬픔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며 만들 더욱 소중한 인연들이다.


앵무새 군단


세계의 잔인성에 대해서는 이미 적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세력은 누구일까? 악의로 가득 찬 세계를 지키려는 앵무새들. 경례를 하고 칼을 찬 모습이 군국주의와 닮았다. 악의에 찬 블록으로 쌓은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마지막에 앵무새 왕이 새 블록을 마음대로 쌓으려고 하자, 원래 있던 세계가 무너진다. 폭력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질서를 세우고, 그런 질서는 유지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


앵무새 왕이 유독 잘못한 걸까? 어떤 방법으로든 체계가 생긴 세계에는 악의가 깃든다. 처음 쌓여 있던 탑도 그러한 악의를 통해 지탱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세계도 무너지는 걸 피할 순 없다. 마치 원죄와 같다. 세상은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이익을 누리려면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는 나의 노동과, 나의 슬픔을 대신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전에 왜 살아가야 하는가? 세계는 악의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삶을 지탱할 수 있을까? 마히토는 돌을 쌓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악의가 있기 때문이다. 악의를 가지고 블록을 쌓는 건 세계의 고통에 동조하는 일밖엔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계를 재건하고, 질서를 정립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한다.


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31117_300%2F1700204391517N2LOj_JPEG%2Fmovie_image.jpg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네이버 영화


“친구를 만들 거예요.” 영화에서 제시하는 답은 이건가 보다. 서로 죽이고 빼앗는 세계를 직면해야만 한다.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인연을 소중히 하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는 것. 배신당하고 실망하더라도 다시금 관계 맺는 것. 세계는 선하지 않지만, 나 자신만은 선함을 간직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삶이 다시 시작된다. 이 지난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을 반복하는 것 자체가 살아갈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닐까?


Editor J.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마히토의 대답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모 나츠코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쇼이치와 나츠코, 이복동생이라는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겠다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어른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이에게는 아직 이르고, 무겁고, 버거운 질문에 어른보다 너른 품으로 답했다.


그 외로운 결심은 다른 세계에서 조금은 보답받았다. 환상이라도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엄마를 다시 만났고, 엄마가 해줬던 빵을 먹었고, 엄마는 죽는다고 해도 자신을 낳는 건 근사한 일이라며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과거로 돌아간다. 엄마와 아들은 다시 서로를 만나기 위해 전쟁으로 불바다가 될 세계로, 아버지가 사랑하는 새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히미와 마히토가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현실 세계가 모순으로 붕괴했을지도 모른다. 히미가 돌아가지 않으면, 마히토는 존재할 수 없고, 마히토가 돌아가지 않으면 히미가 과거에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계는 고독한 탑 쌓기가 아닌 작은 인간의 사랑과 용기로 지탱된다.


마히토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츠코를 구하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것도 나츠코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나 나츠코의 진심 때문이 아닌 히치코와 히미의 따듯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미래를 겪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히미는 동생이나 남편을 미워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지 도 않는다. 그저 와라와라를 구하고, 마히토를 구하고, 마히토에게 맛있는 빵을 대접하고, 마히토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조언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고, 곁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그 시간 속 언젠가 미래에 마히토가 읽을 수 있도록 책을 남겨두었다. -어른이 된 마히토에게-라고 적은 건 아마 과거에 겪었고, 미래에 일어날 그 만남을 기약하면서 쓰지 않았을까. 마히토에게 필요한 건 그런 애정이었다.


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30926_17%2F1695697509716Nlnfc_JPEG%2Fmovie_image.jpg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네이버 영화


쇼이치와 나츠코는 마히토를 아끼고 챙겨주려고 하고 그 마음도 진심이지만 실제 행동은 상처가 되는 것뿐이다. 엄마가 죽은 지 1년 만에 이모가 아빠랑 재혼을 해서 이복동생을 임신한 상황이 아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은연중에 엄마와 나츠코가 배다른 이복자매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래도 언니동생으로 엮인 가족이었으니 마히토에게는 이모나 마찬가지다. 마히토는 아직 어린 아이다. 그러니 마음껏 슬퍼하고, 투정 부리고, 화를 내야 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과하게 철이 든 애어른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히토가 계속 나츠코를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큰할아버지를 만나서 자신의 상처가 ‘악의’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자신만 사라지면 완벽해질 것 같은 곳에서 그저 사라지고 싶은 마음 반, 존재와 사랑을 여전히 확인받고 싶은 마음 반으로 그 모든 슬픔, 불안, 분노를 표현하기보다 스스로 돌로 머리를 찍었을 그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었을까. 그런 아이의 투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줄 어른이 마히토의 곁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살아가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악의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는 아이의 성숙함이 아팠다.


행복하다고 말하며 배에 손을 가져다 대는 나츠코나 집에 돌아와 나츠코를 찾는 쇼이치나 아직 어린아이 같다. 나츠코에게 마히토는 ‘자신과 닮은 언니와 사랑하는 남자의 아들’이고, 쇼이치에게 마히토는 ‘자신의 아들’이다. 어떻게든 잘해주려고 하지만 어설프다. 어른이라고 모든 것에 능숙한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문득문득 불안함, 소유욕, 미안함, 슬픔 따위가 치밀어 오를 때 외면하거나 별 거 아니라며 넘겨버린다. 사람은 미련할 만큼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과 감정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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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코는 어쩌면 언니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당차고 어딘가 남달랐던 언니는 과거에 실종되어 가족 모두가 걱정했지만 묘하게 달라진 채 돌아왔고, 멋진 남자와 결혼해 귀여운 아들을 낳았다. 병원에서 화재로 죽었지만 그 존재감은 여전히 떨칠 수 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언니가 죽고 언니의 남편과 결혼한다. 나와 언니는 닮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죽은 언니의 대체품일 뿐일까. 이 아이야말로 사랑의 결실이라고 믿고 싶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쇼이치에게는 마히토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렇게 성을 내는 것을 보면. 너그럽고 인자한 새어머니가 되고 싶지만 한계다. 마히토는 예의 바르지만 묘하게 속을 알 수 없다. 나를 미워하는 걸까. 차라리 못된 아이라면 미워하기 쉬울 텐데 흠잡을 구석이 없는 아이다. 그러니 이런 미움은 못된 마음이고 나의 악의다. 언니에 대한 미안함, 마히토에 대한 미움, 쇼이치에 대한 불안, 아이에 대한 걱정 등등이 뒤섞인다. 그래서 나츠코가 산실에서 내뱉는 모진 말은 어느 정도는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마히토에 대한 걱정과 애정도 진심이다. 진심이라는 건 명확하고 뚜렷하기보다 모호하고 모순적인 것이 뒤섞인 것에 가까우니까.


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31117_235%2F1700208231671bclpI_JPEG%2Fmovie_image.jpg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네이버 영화


쇼이치는 여전히 아내와 이별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닮은 나츠코와 아들 마히토가 있고 장소만 달라졌을 뿐 예전과 같은 일과 생활, 가족이 이어지도록 애쓰는 것 같다. 쇼이치의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다. 히츠코의 병원에 불이 났을 때도, 마히토와 아내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마히토가 머리를 다쳤을 때도, 나츠코와 마히토가 사라졌을 때도, 히츠코의 예전 이야기를 들을 때도 화내거나 당황하거나 웃을 뿐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 같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마히토가 마음 놓고 엄마를 그리워하거나 슬퍼하며 울 수 있었을 리 없다. 두 사람은 충분히 히츠코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못한 것이다. 마히토는 돌탑에서 히미와 만나 충분히 기뻐하고 슬퍼하며 날아가는 앵무새들과 함께 묵은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린다. 하지만 쇼이치의 슬픔은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여기서 누가 좋고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누구나 완벽히 선하거나 악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 나츠코도, 쇼이치도, 마히토도, 히치코도, 키리코도, 왜가리도, 펠리컨도.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선과 악이라는 것도 어쩌면 인간의 주관적인 관념일 뿐이니까.


어쩌면 나는 왜가리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히토처럼 용감하지도, 히미처럼 긍정적이지도, 쇼이치처럼 호탕하지도 못하다. 오히려 조금은 약았고, 내 이익을 우선 계산하고, 남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다면 아직까지는 후자를 택할 용기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가리처럼 처음엔 툴툴대고 꾀도 부리다가 나중엔 그게 더 괴로워져서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바보 같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대들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며칠간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지내다가 제목에 또 다른 질문이 숨겨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살 것인 지라는 질문 이전에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묻고 있었다. 이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달리 선택지가 있는 객관식이다. 죽는다와 산다. 이야의 처음과 끝, 마히토의 대답은 달라진다. 죽을 것이다에서 살 것이다로 변한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의 주제는 이 질문에 숨겨져 있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나츠코를 찾으러 떠난 미지의 세계에서 끝까지 겁먹지 않았던 건 용기 있는 아이라서, 나츠코를 엄마라고 생각해서도 아닌 ‘죽어도 상관없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죽어도 아빠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아이도 있다. 이모인 새엄마도 친절하지만 내심 내가 사라지면 기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죽어도 상관없다. 더 살고 싶지도 않다. 계속 새엄마와 아빠와 이복동생이라는 가족에 일원이 되기도 싫고,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마히토가 엄마가 남긴 책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던 건, 그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마히토가 이 책을 읽으며 살아가길 바라는 엄마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마히토는 이런 엄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게 환상이든, 함정이든, 지옥이든, 저승이든, 나츠코가 간 곳이든,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해도 그곳으로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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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세상에서 경험한 우정과 사랑과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해 낸다. 용기를 내고, 도움을 받아서 나아간다. 그래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도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주기 위해, 이복동생에게는 엄마를 돌려주기 위해,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나츠코를 만나러 간다. 자신은 아마 나츠코에게 나츠코 엄마라고 불렀던 것도 자신의 엄마로 인정했다기보다 ‘엄마’라는 존재로서의 나츠코를 각성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자신의 아이가 살아가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을 떠올리고 함께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도 살기를 선택한다. 그 세계에서 탑을 쌓으며 신의 후계자로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현실 세계에서의 마히토는 죽는다. 큰할아버지가 영영 실종된 것과 마찬가지로 탑의 세계 속에서 혼재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존재하게 된다. 히치코가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마히토는 자신이 살기를 바라며 도와준 히미, 히치코, 왜가리 그리고 자신을 찾으러 달려온 아빠를 보며 더 이상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머리에 돌을 찍어 누르면서까지 그토록 확인하고 싶어 했던 그 답을 마히토는 저 세계에서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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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의 아이러니가 생긴다.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죽기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삶과 죽음은 시점이 다를 뿐 모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환생하는 영혼인 와라와라도 펠리컨에게 먹히면 죽는다. 그러니 영원한 삶, 영원한 죽음은 여기에도 저기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이 질문도 선택지는 없는 셈이다. 마히토가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그만큼 간절히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고, 히미와 마히토가 각자의 차원으로 돌아가 살기로 결정한 것은 언젠가 그 세계에서 죽기를 택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남는 것은 관계다. 두 사람은 마히토의 엄마, 히치코의 아들로서 살고 죽기를 택한 것이다. 이 선택이 나는 감동적이었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찰나밖에 되지 않는 인생인데, 어차피 죽을 거 왜 살아야 하냐?라는 허무주의적, 존재론적 질문에 한때 11세 소년이었던, 지금은 84세의 노인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사랑하며 살 것이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 사랑이 찰나라 해도, 결국은 모두 잊힌다 해도, 소중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전력을 다해 이야기해 주었다.


희망을 간직하는 방법은 진부하지만, 결국 사랑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인연을 이어가는 것,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렇게 우리는 서로 죽이고 빼앗는 어리석은 세계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 무의미한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랑, 희망 모두 진부한 신기루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단순한 답은 그 진부함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Editor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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