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 장의 무게

기억이 들려주는 시간의 소리

by 박영미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책장을 정리했다.

기증할 책, 폐기할 책, 간직할 책을 나누기 위해 한 권씩 꺼내 들다 보니 손은 생각보다 더뎠고 마음은 오래 머물렀다.

책마다 붙어 있던 메모, 페이지 사이에 숨듯 끼워둔 쪽지들, 희미한 밑줄 하나까지,

모두 시간이 남긴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손끝에 먼지가 앉도록 책을 넘기던 중,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몇 해 전, 군 생활 중인 아들이 처음으로 보내온 손편지였다.


그날 나는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밥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익숙하지 않은 말투 너머로 낯설게 다가오던 아들의 자란 마음.

훈련소 냄새가 밴 종이 위에 번진 글씨는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몸조심하고 잘 다녀와”라는 말과 함께 입영 버스에 오르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날부터, 한 대중가수의 노래, <이등병 편지>가 내 마음을 후벼 팠던 기억이 겹쳐왔다.


그 편지는 이제 더 이상 눈물의 대상이 아니었다.

시간의 거름 속에서 숙성된 한 장의 풍경처럼, 온기 있는 이야기로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기억은 그렇게, 시간이 빚은 감정의 결정이 되어 다시 다가왔다.

시간은 감정을 숙성시키는 힘을 가졌다.


편지를 접으며, 뉴스를 틀었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 1951. 피카소 미술관.

지구의 반대편, 중동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화염과 총성이 뒤엉킨 그곳. 울음을 삼키는 가족들, 이별을 견디는 젊은이들.

세상은 또 다른 비극의 무게를 기록 중이었다.


책과 부모님에게 들었던 한국에서의 전쟁을 생각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삶을 일으킨 우리의 윗세대.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평범한 일상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희생 위에 놓여 있다.


지난해 12월 3일, 우리는 다시 하나의 균열을 마주했다.

흔들린 것은 신뢰였고, 꺼지지 않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증명했다.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말과 법, 사람과 신념이 살아 있다면 다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정상’이라는 이름의 길 위에 섰다.


책장에서 꺼낸 명화집을 넘기면서도 계속 떠오르는 그림이 한 점 있다.

조지 클로젠, <울고 있는 젊은이 Youth Mourning>, 1916.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조지 클로젠의 <울고 있는 젊은이>.

1차 세계대전에서 약혼자를 잃은 딸의 슬픔을 지켜본 65세의 아버지인 화가 클로젠은 그 절망을 물감으로 녹여냈다.

나무 십자가가 꽂힌 무덤 앞.

벌거벗은 젊은 여인이 흙바닥에 무릎 꿇은 채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다.

소리 없는 울음은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전쟁의 잔혹함은 그 고요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듯하다.


전쟁은 언제나 가장 여린 것부터 삼켜버린다.

하지만 예술은, 그 잃어버린 존재들을 다시 불러낸다.

눈물이 그림이 되고, 총성이 음악이 되며, 절망은 언어가 되어 감각 속에 다시 살아난다.

무명용사 돌무덤의 비목이 시가 되고 선율이 된 가곡 <비목>을 오랜만에 틀었다.


그리고 다시 손에 쥔 편지.

그건 단지 아들의 성장이 아니라, 평화를 누리는 오늘의 증거였다.

특별하지 않았던 그날, 그 평범함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책장을 닫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눈물 없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지금,

역사를 돌아보는 여유,

평화의 이름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헌신과 저항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캘린더 속 6월은 아들이 군대에 있던 시절, 유독 무겁게 다가왔던 달이었다.

그 기억의 계절, 6월.

이제는 단지 전쟁의 상처를 기리는 시간이 아니라, 그 상처 위에 피어난 아름다움을 조용히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평범한 하루조차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시간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지금, 조용히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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